16 기도⑤: 백부장의 기도(마 8.1-13)

20210808(양무리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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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도: 백부장의 기도

8.1-13

 

    본문 관찰

 

    [믿음의 법칙]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 허다한 무리가 좇으니라(1)

    한 문둥병자(2-4)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

    한 백부장(5-13)

       주여 내 하인이 중풍병으로 집에 누워 몹시 괴로와하나이다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보지 못하였노라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나의 이 말을 듣고 행하는 자는 .”(7.24a)

 

산상수훈을 통해 주신 하나님의 말씀(5-7), 그 이후를 주목한다.

8장부터는 바로 이 말씀을 듣고, 그 말씀대로 행한 사람들의 이야기를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산상수훈을 실재 삶의 자리에서 맛보는 것, 이것을 가능케 하는 길이 보인다. 얼마나 멋진 드라마인가. 그렇다면 나도 이들처럼 예수님이 연출하신 작품의 주인공으로 쓰임 받을 수 있다는 얘긴데 . 마침내 산상수훈이 우리의 삶이 되도록 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교훈 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온 셈이다.

   

 

행하는 것은 믿음이다.

 

예수님은 듣는다 = 행한다 = 믿는다는 하나의 신앙 양식을 보여 주신다. 만약 말씀을 들음에서 나온 믿음이 없었다면 이들은 결코 무모한 행동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10.14,17). 믿음이 없는 자들에게는 이러한 행동이 매우 어리석고 무식한 비현실적인 행동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믿음이 있는 자에게는 결코 그렇지 않다. 그러므로 담대하게 행하게 된다. 골리앗 앞으로 돌진해 들어가는 다윗에게서 이 믿음의 역사를 생생하게 목격한다.

앞서 들은바 말씀(산상수훈)대로 행한 믿음의 사람들의 본보기를 만난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2) 이 무명의 한 문둥병자는 헤아릴 수 없는 허다한 무리 속에 그대로 소멸되고 싶지 않았다. 그는 잔잔하게 밀려온 말씀의 파도 앞에 한줄기 빛을 보았다. 자신을 보면 아무 소망이 없었다. 그러나 들은바 말씀, 그리고 그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들은바 말씀이 역사 되어질 것을 믿는 믿음이 있었다.

그는 입이 열리고, 마음이 열리고, 심령이 열리고, 그러자 전혀 다른 영적인 세계가 열리는 것을 보았다. 그러자 마침내 외쳤다: “주여 원하시면 저를 깨끗케 하실 수 있나이다!” 주님은 이처럼 믿음으로 나아오는 사람들을 결코 실망시키시지 않으셨다: “내가 원하노니 깨끗함을 받으라!”(3) 믿음은 내가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인정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거기에서 끝나지 않고 나의 한계를 보는 순간 그것을 주님께 아뢰는 것 앞으로 까지를 언행(言行)하게 한다.

바로 그때 이 믿음이 예수님에 의해서 확증된다. 이처럼 진정한 믿음은 예수님과의 관계 속에서 역사 되어진다. 따라서 믿음이란 예수님 없이 내 스스로의 자기 확신이나 자가 발전을 통해서 역사 되는 최면이 아니다. 예수님 없이 나홀로 내가 믿나이다!”를 반복하는 것, 그러니까 지성이면 감천이다!”는 식의 자기 열심이 믿음은 아니다. 그러므로 성경적인 믿음의 역사는 언제나 주님이 이루셨다는 것을 시인하도록 요구한다.

만약 그렇지 않고 내가 믿어서, 내가 이루었다는 식의 자기도취에 가깝다면 그것은 영광을 하나님께 돌리지 못하고 반드시 교만한 신앙으로 발전하게 된다. 왜냐하면 나의 땀이 어떤 결과를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많은 경우 믿음이 종종 이렇게 변질되어 질 수 있다. 이처럼 믿음이 자기 영광의 수단(도구)으로 전락한 경우를 종종 만난다.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믿음이란 무엇인가?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삽나이다.”(8)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10)

    “가라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13)

 

주님은 백부장의 고백을 믿음으로 보셨다. 그의 믿음은 결코 화려하지도 않고, 큰소리도 아니며, 자기가 얼마나 큰 확신을 가지고 있는가를 드러내는 것도 아니다. 철저하게 주님께 그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 이것만큼 믿음의 역사가 주님께 있다는 것을 증거 하는 예(case)는 아마 없을 것이다. 예수님이 평가하시는 믿음의 정체(identity)를 만나게 된다. 믿음의 주도권은 예수님께 있다. 믿음의 주인은 내가 아니다. 내가 한다고 믿는 것은 어떤 의미에서 자기 확신이다. 믿음은 예수님과의 관계에서 비로소 확증된다.

성경 어디에도 내가 믿었기 때문에 그것이 원인이 되어 어떤 결과가 이루어졌다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라 이방 종교에서 접근하는 방법론이다. 믿음은 나를 믿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는 것이다. 이러한 초점과 우선 순위가 바뀌면, 바로 그 순간부터 믿음은 왜곡되고 변질되기 시작한다. 내가 믿음의 결과를 만들어 내는 일에 어떤 공로를 했다고 생각하는 순간, 성경이 말하는 믿음의 본질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이, 믿음은 생각 보다 훨씬 단순하다. 예수님이 말씀하신 것이 옳다, 맞다, 확실하다, 그래서 아멘!’하고서 그 말씀대로 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의 실상을 보는 것이다. 믿음은 내 것이 아니다(12.2a). 그래서 내 믿음에 의해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주님 때문이다(3,13).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이 눈에 아무 증거 아니 뵈어도 믿음만을 가지고서 늘 걸으며,

      이 귀에 아무 소리 아니 들려도 하나님의 약속 위에 서리라.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나가세 나가세 의심 버리고

      걸어가세 믿음 위에 서서 눈과 귀에 아무 증거 없어도.”

      (찬송가 5451)

 

나의 믿음 없음을 불쌍히 여기소서!”

진심이다. 이것이 오늘 말씀 앞에 정직한 고백이자 기도 제목이다. 믿음을 말씀하시는(10,13) 그 사이에 동서로부터 많은 사람’(11)나라의 본 자손’(12)이 나온다. 결국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된 이유는 뭘까? 믿음이다. 이것을 복되다 하시는 주님 때문에 내 믿음이 빛을 발하게 된다. 나 홀로 나를 태워 믿음을 만들 수 있는 게 아니다.

나도 한 문둥병자처럼, 중풍병에 걸린 하인을 둔 한 백부장처럼 이 믿음이 있음을 감사드린다. 그러면서 한편으로 이 믿음이 더 깊어지고, 맑아지고, 강해지기를 소망한다. 더 있다. 이게 나에게서 자생(自生)하여 곧 바로 자멸(自滅)하는 주님과 아무런 상관이 없는 믿음이 아니기를 기도한다. 주님이 인정하시는 믿음, 주님이 역사하시는 믿음을 말이다(7:21-23).

문둥병자와 백부장이 복된 것은 복음을 듣고, 그 다음에 그 복음 앞으로 나아왔고, 그리고 이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입으로 시인하였다는 점이다. 중요한 것은 바로 그때까지 저들은 여전히 문둥병자였고, 또한 중풍병자였다. 그러니까 자신들이 믿는다는 것만으로 이 질병(문제)으로부터 자유할 수 없었다. 결국 문제 해결은 주님의 선언에서 비롯되었다. 주님과 상관없이 내 스스로 믿는다는 확신이 문제 해결의 핵심은 아니다. 그러므로 주님과 관계없는 것은 믿음이 아니다.

재미난 것은 중풍병에 걸린 하인이다(6). 그가 고침을 받는 것은 자기 주인인 백부장의 믿음 때문이다: “네 믿은 대로 될지어다 하시니 그 시로 하인이 나으니라.”(13) 여기서 매우 중요한 신앙의 원리를 하나 발견하게 된다: “나의 믿음이 너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이곳(가버나움, 믿음; 5)에서 기도하면 저곳(, 응답; 6)에서 문제가 해결된다.”

백부장처럼 살자! 나 한 사람 바르게 믿으며 살면 다른 사람이 나 때문에 복을 받는다. 이렇게 살고 싶다. 가정에서도, 목회의 현장에서도 이처럼 쓰이는 그릇이고 싶다. 산상수훈(山上垂訓)을 받았다면 이제부터는 그 말씀대로 사는 믿음이다.

 

    “라반에 그에게 이르되

      여호와께서 너로 인하여 내게 복 주신 줄을 내가 깨달았노니 .”(30.27)

    “그가 요셉에게 자기 집과 그 모든 소유물을 주관하게 한 때부터

      여호와께서 요셉을 위하여 그 애굽 사람의 집에 복을 내리시므로 .”(39.5)

 

백부장은 주님의 복이 하인에게 흘러가게 한다. 축복의 통로가 된 셈이다. 그는 주님으로부터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만나 보지 못하였노라”(10b)는 인정을 받았을 뿐만 아니라 이 믿음으로 통해서 다른 사람을 복되게 하는 일에 쓰임을 받는다. 참으로 아름다움 믿음의 향기가 아닐 수 없다.

어찌보면 당시의 노예제도 하에서는 하인 하나쯤이야 죽어 없어져도 뭐 대수였겠는가. 또 다시 사 오면 되는 일이었으니까 말이다. 그럼에도 주님을 만나 자신의 소원도 아니고, 일게 하인의 생명을 위해서 단 한 번의 기회를 사용한다는 것이 내 마음을 뒤흔든다. 모두가 다 자기라는 우상에 빠져 오직 자신의 배를 불리기 위해 혈안이 되어 살아가는, 더욱 믿음마저도 이처럼 세속적인 욕망의 도구로 전락시킨 지 오래인 이때에, 이처럼 다른 사람을 위해 주님의 눈높이에 맞춘 믿음의 사람을 만나는 것, 얼마나 귀한 간증인지 모르겠다. 백부장! 믿음! 오늘 우리 주님이 우리에게 말씀하시는 소중한 은혜다.

 

   

  • 이 본문의 설교는 지난 2021년 8월 8일에 앞서 양무리교회 주일설교로 전한 메시지다. 마태복음 본문 묵상과 설교 순서를 따라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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