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의 싹은 유대에서도 자란다(요 7.11-24).

20220124(묵상)

 

 

 

불신앙의 싹은 유대에서도 자란다.

Jn. 7.11-24

 

    본문 관찰

 

    초막절 전(1-10)

    초막절 중(11-36)

       예루살렘을 방문한 유대인들(11-13): “그가 어디 있느냐?”

       예수님의 가르침(14-18): “내 교훈은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은 증거들(19-24):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예수님의 가르침이 옳은 증거들(25-36): “하나님이 나를 보내셨음이라.”

    초막절 후(37-52)

  

 

예루살렘 성전 변론(1)

 

초막절이 시작되었다.

예루살렘은 유대인들(11,32, 종교지도자들), 각처에서 올라온 유대인들(15,20), 그리고 예루살렘 사람들(25)로 가득찼다. 정작 예수님은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10) 예루살렘에 올라가셨고, 이어서 성전에서 가르치시는데 12,15,20절과 같은 얘기나 들으신다. 그리고 예수님이 아니라 전통과 습관을 쫓고 있는 사람들이 7장의 무대를 가득 메운다. 그 속에서 예수님은 무엇을, 어떻게 하시나 느껴보기 위해 주님과 함께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본다.

   

 

예루살렘 사람들

 

    “그가 어디 있느냐?”(11)

 

초막절에 예루살렘을 방문한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찾았다. 예루살렘(2.13- , 5.1- , 7.10- )에 올라가신 게 벌써 세 번째다. ()으로는 7장이지만 예수님의 사역으로는 대략 3년 정도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증거하시는 일을 계속해 오고 계시는 때다. 공생애 사역이 점차 무르익어 갈 즈음, 그러니까 갈보리 십자가를 불과 얼마 남겨놓지 않은 때에 예수행전에 대해서 직간접으로 듣고 보면서 그 표적의 현장에 있었던 유대인들이 이러쿵저러쿵 하는 말들이 고작 이렇다.

 

    “좋은 사람이라 아니라 무리를 미혹(迷惑)한다.”(12)

    “이 사람은 배우지 아니하였거늘 어떻게 글을 아느냐.”(15)

    “당신은 귀신이 들렸도다 누가 당신을 죽이려 하나이까.”(20)

 

이런 말들을 하는 자들은 자신이 영적 어두움’(1.5)에 갇혀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일 뿐이다. 태초에 계신 말씀이신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메시야(어린양, 구원자)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7장까지 장차 보리라’(1.42,50-51)의 빛으로 하나님의 꿈을 현실로 임하게 하는 예수행전을 복음 안에서 묵묵히 이루어 오셨다. 그런데 결과는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를 듣는 것 밖에 없다. 결국 요한은 진정으로 어두움에 미혹된 쪽이 어디인가를, 그리고 누가 무지한가를, 그리고 어느 쪽이 악한 거짓 영의 지배를 받고 있는가를 고발한다.

그리스도의 신성(神性)을 부인하고 자기들과 똑같은 사람으로 만나고 싶어하는 죄에 미혹(迷惑)된 인생, 그러니 이 세상에 배우는 것으로 얻을 수 없는 것이 있다는 것을 결코 알 수 없다는 아닌가. 15절을 안다고 하지만 그 반대다. 어떻게 이런 류의 사람들이 진리, 신앙, 믿음, 영생, 구원, 거듭남, 영접함, 진리를 보고 듣고 알고 믿는 기적을 하늘로부터 얻을 수 있으랴. 이는 니고데모(3.2,4,9)를 필두로 이미 검증된 사실이다.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것의 옳은 증거들

 

    “내 교훈은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16)

 

주님은 자기 형제들로부터 자신을 세상에 나타내소서!”(3-4)라는 말을 들었지만 반대로 나타내지 않고 은밀히”(10)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다. 사람의 말을 따라, 그것도 불신자의 말대로(5) 행동하신 것이 아니다. 지금 가르치시고 계신 것도 내 것이 아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것’, 그러니까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말씀이라 하신다(16). 정말 하나님 편에 서 있다면 16절을 알게 될 것인데 그 이유는 그 속에 불의(不義)가 없기 때문이다(17-18). 결국 유대인들이 한 소리가 하나님을 알지도 못하는 불의한 자들이 하는 잡음(雜音)인 이유가 다음 몇 가지로 증거된다.

 

19

 

    “모세가 너희에게 율법을 주지 아니하였느냐.

      너희 중에 율법을 지키는 자가 없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나를 죽이려 하느냐.”

 

베데스다 못가의 38년 된 병자를 고친 이후에 유대인들은 더욱 예수님을 죽이고자 하였다(5.16,18). 그 이유는 안식일을 범했다는 것이다(5.10). 그러니까 예수님이 율법을 어겼기 때문에 죽어야 만 하는 충분한 이유가 된다는 뜻이다. 그러나 안식일을 지키기 위해서 또 다른 율법인 살인죄’(20.13)는 상관없다는 말인가? 예수님께는 누명을 씌우기 위해 율법 조항을 적용하고, 그것도 이를 통해 자신들이 율법을 어기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식이다. 살인을 하면서까지 안식일을 지키겠다는 무리수다. 이런 게 도대체 어디 있는가. 율법의 이름으로 율법도 어기고, 사람까지 죽이는 불의(不義)가 공의(公義)를 이기는 해괴망측(駭怪罔測)한 일이 율법의 이름으로 자행되고 있다.

 

22-23

 

    “모세가 너희에게 할례를 행했으니

      너희가 안식일에도 사람에게 할례를 행하느니라.”(22)

    “모세의 율법을 범하지 아니하려고 사람이 안식일에도 할례를 받는 일이 있거든

      내가 안식일에 사람의 전신을 건전하게 한 것으로 너희가 내게 노여워하느냐.”(23)

 

유대인들이 범하고 있는 오류에 대한 또 다른 하나의 결정적 증거는 할례에서 드러난다. 이게 23절에서 제기된 문제의 핵심이다. 양피 끝을 조금 자르는 것이 노동이 아니라 하나님의 법을 지키는 것이 된다면 결국 사람의 온 몸을 회복한 일이야 더 없이 하나님의 법을 준수한 일이라는 탁월한 설복(說服)이다. 모세를 숭앙하는 유대인들로서는 이러한 예수님의 통찰을 역전시킬 수 없는 일이다. 예수님이 잘못했다고 하려면 모세에게 오류의 원죄가 있다고 해야 하는데 자칫 모세가 죄인이 되는 일에 앞장서기라도 하게 된다면 이것 역시 돌을 맞을 일이기에 그렇다.

말씀을 사유화하거나, 사람의 목적을 이루는 도구(수단)로 사용하게 될 때 그 사람은 유대인의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유대인들은 작위적으로 말씀을 해석했고, 자기 편리라는 실리주의에 말씀을 희생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하나님의 빛으로부터 희생되는, 그래서 더욱 영적 어두움에 함몰되고 만다. 참으로 땀나는 일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세상에 오신 하나님, 즉 말씀의 주인이신 예수님이 어떻게 된 게 그말씀으로부터 정죄를 받게 되는가? 인간은 자신을 말씀 위에 놓음으로써 하나님의 자리를 찬탈했으며, 그것도 자기 마음대로 이해하고 해석한 율법을 따라 하나님을 정죄하는 씻을 수 없는 죄를 범한다. 요한은 인간이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죄인이라고 단단하게 못박는다.

   

 

부스러기 묵상

 

율법과 안식일과 할례는 유대인을 설명하는 가장 중요한 단어들이다.

그렇게도 애지중지(愛之重之)하는 것들이 어떤 도구(수단)로 전락하고 있는가? 씁쓸하게도 예수님을 죽이는 일에 도용(盜用)되고 있다. 이것만큼 유대인들은 이 아니라 어두움에(1.5), ‘장차 보리라’(1.50-51)의 은총 밖에, 그래서 거듭남과 구원과 믿음과 영생과 상관없는 죄인일 뿐이다. 그러니 하는 말마다(12,15,20) 참으로 어처구니가 없다. 다시 얘기하지만, 7장은 주님이 공생애를 시작하시는 무렵이 아니다. 이미 2년 이상 메시야로서의 공생애 사역을 언행(言行)하고 계셨다. 이처럼 수도 없이 하늘의 메시지를 경험했음에 불구하고 영적으로는 완벽하게 무지하다. 이게 죄인의 특성이다.

 

    “외모로 판단하지 말고 공의롭게 판단하라.”(24)

 

재미난 것은 사람은 외모본다는 것을 하나님이 아셨다는 점이다(8.15, 삼상16.7). 물론 외모보는 것은 아니지만 중심(핵심, 본질)을 보지 못한다. 그것만큼 거듭남과 믿음과 영생으로부터 멀어져 있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간의 불의(不義). 그런데 불의(不義)가 공의(公義)를 잡아 먹는 게 세상이다. 지금도 이런 일들은 버젓이 자행된다.

한편, 예수님도 사람들로부터 이처럼(12,15,20) 대접 받으셨다는 생각이 못내 아쉽다. 하지만 그리스도인 역시도 세상으로부터 이처럼 손가락질을 당할 수 있다. 이것이 인간의 욕망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복음과 진리 때문에 당하는 것이라면 얼마나 값진 것일까 싶다. 오늘 세상이 우리를 이처럼 피곤하게 할 때 그것만큼 우리가 예수님 쪽이라는 확실한 증거가 또 있을까.

아마도 주께서 우리보다 먼저 겪으신 일이기에 우리를 아시며, 그래서 우리를 격려하시고 위로하사 마침내 주님처럼 이기게 하실 것을 믿는다. 오늘은 왠지 해 볼 만 하다는 마음이 든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주님처럼 이겨낼 수 있는 힘과 능력이 없기에, 이것 또한 주님이 공급해 주셔야만 하는 부스러기이기에 다시금 목마름으로 하늘을 향해 무릎을 꿇는다. 우리 역시 예수님이 당하셨던 것들(12,15,20)을 피하지 않기로, 어쩌면 이 정도의 취급을 들을 수 있는 자로 여겨주시기를 은근히 기대하면서 뒷발굼치 높이 들고 주님 향해 믿음의 걸음을 내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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