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은 제자들이 만난 풍랑을 기쁨으로 바꾸신다(요 6.16-21).

20220119(묵상)

 

 

 

주님은 제자들이 만난 풍랑을 기쁨으로 바꾸신다.

Jn. 6.16-21

 

    본문 관찰

 

    16 제자들이

    17 배를 타고 가는데 이미 어두웠고

    18 파도가 일어나더라

    19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오심을 보고 두려워하거늘

    20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21 이에 기뻐서 배로 영접하니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오병이어의 표적은 곧바로 15절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전혀 예상 밖의 표적 이후였다. 일이 이렇게 되자 주님은 홀로 계시는 시간을 가지신다. 세상 나라를 이루려는 자들과의 분리다. 예수님은 종종 뭔가 급박할 때마다 홀로 계시곤 하셨다. 이번의 산행(山行)을 복음서(14.22-27, 6.45-52)기도하기 위함이라고 증언한다. , 그리고 왜 기도하셨을까?

   

 

16-18

 

제자들이 배를 타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것으로 본문이 시작된다. 때는 저물어 이미 어두웠고”(16-17), 예수님과 함께 있지도 못했으며(17), 설상가상(雪上加霜)으로 큰 바람이 불어 파도가 일어”(18)남으로써 오병이어의 낮()과 너무 대조적인 밤(어두움)이 찾아왔다. 삶은 언제나 이 두 국면을 따라 요통치듯 진행된다. 사실 네 번째 표적을 앞두고서도 어정쩡한 모습으로 실망스러움 밖에 보여주지 못했던 제자들이다(7-9). 저물어서야 일이 어느 정도 수습이 되었고, 예수님이 계신 곳으로 가는 행로(行路)는 여러모로 지치고 피곤했을 것 같다.

배가 출발을 할 때만 해도 바다는 잔잔했다. 그러나 얼마 아니어서 풍우대작(風雨大作)으로 삽시간에 위기가 찾아왔다. 그야말로 한치 앞을 예측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닐 수 없다. 낮에는 사람이라는 태풍이 불어와 있는 힘을 다 해 가까스로 수습을 했는데(15), 이번에는 어떻게 손을 쓸 수 있는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게 삶이다. 만약 풍랑이 이는 것을 알았다면 이처럼 서둘러 출항을 하지는 않았을지도 모른다. 제자들이 그것을 미처 알지 못했을 뿐 평안하다고 생각했던 바로 그때에 이미 그 속에는 위기가 함께 공존하고 있었다.

불과 몇 시간 전, 낮의 부끄러움을 익히 기억하고 있던 제자들이었기에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소위 뭔가를 보여줄 수 있는 기회가 왔다고 볼 수도 있다. 어쩌면 이 바다(홍해)를 건너야만 생명의 떡(만나)의 표적이 밝히 드러나며 이를 받아 먹게 된다는, 그렇다면 아마도 오병이어의 표적(1-15)과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설교(22- ) 사이에 다섯 번째 표적이 들어와 있는 것은 홍해를 건넌 이후의 광야 생활에서 이스라엘이 하늘로부터 공급받았던 만나의 그림을 회상하도록 하고자 하는 요한의 통찰이 들어있지 않나 싶기도 하다.

 

 

19-21

 

노를 젖는 제자들의 움직임이 빨라진다. 주님을 위해 일하고 있고, 주님을 만나러 가는 길목에도 풍랑은 있다. 신앙의 행로에서 자칫 잘못 생각하면 이처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좇고 있을 때는 시련과 고통과 같은 파도가 없어야 하고, 또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그러나 전혀 그렇지 않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는 반석 위에 집을 지은 지혜로운 사람에게도 동일한 풍랑은 있다: “비가 내리고 창수가 나고 바람이 불어 그 집에 부딪히되 .”(7.25a) 이것은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는 모래 위에 집을 지은 어리석은 사람에게만 있지 않다(7.26-27)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파도를 만난 것은 제자들이지만 이것을 저 멀리 가버나움에서 주께서 보고 계셨다는 점이다: “바람이 거스르므로 제자들이 힘겹게 노 젖는 것을 보시고 .”(6.48a) 제자들은 주님을 보고 있지 못하였으나(17b) 예수님은 고난 가운데 있는 제자들을 보고 계신다. 제자들이 홀로 외롭게 풍랑 일어나는 바다 한복판에서 악전고투(惡戰苦鬪)하고 있는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나 혼자 당하고 있는 일은 없다. 삶은 나 홀로 걸아가는 것이 아니다. 내가 알든 모르든, 믿는 믿지 못하든, 평안할 때에든 파도가 이는 그런 때이든 나는 이리저리 흔들리지만 주님은 언제나 나를 주목하고 계신다.

그리고 바로 그 문제의 중심으로 주께서 친히 오신다: “예수께서 바다 위로 걸어 배에 가까이 오심을 보고 .”(19b) 주님은 제자들을 외면하지 않으신다. “물결을 인하여 고난을 당하”(14.24b)고 있는 제자들을 말이다. 이처럼 주님은 찾아오신다. 주님은 이런 고난 가운데 있는 제자들, 뿐만 아니라 결코 우리를 잊지 않으신다. 하지만 주님이 오심에도 불구하고 두려워하거늘”(19b)로 응답하는 게 제자들이다. 물론 나도 그렇고. 그럼에도 주님은 전혀 믿음 없고, 유약하고, 아직 아니올시다인 제자들을 책망하시지 않으신다. 이들을 그대로 용납하신다. 찾아오신다.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20)

 

마침내 고난이 기쁨으로 바뀐다(21a): “내니 두려워하지 말라!” 다섯 번째 표적 또한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이 현실로 임하게 되는 일에 오병이어처럼 쓰이는 순간이다. 제자들은 고난을 만났지만 주님은 그 고난을 표적으로 바꾸신다. 물이 변하여 포도주와 마르지 않는 생수가 되었듯이 말이다(2.1-11, 4.13-14). 주님의 임재를 가까이에서 경험하는 것만큼, 그러니까 내 마음에 임하신 주님의 내주하심을 따라 살아가는 것만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하게 된다. 주님이 임하시지 않으시면 두려움은 물러가지 않는다. 오늘도 나다!”(ego eimi) 말씀하시며 나를 찾아오시는 나의 주 나의 예수님을 찬양하는, 그 주를 뵈옵는 복된 날이기를 간구한다.

   

 

부스러기 묵상

 

제자들은 마침내 홍해를 건넜다(21).

이제 생명의 떡’(22- )이신 주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을 받아 먹게 될, 그럼으로써 연속적인 표적(sign)들을 통해서 임하게 될 장차 보리라’(1.42,50-51)의 빛의 아침인 이튿날’(22a)을 복되게 맞이하게 될 것이다. 이제 문제는 해결되었다. 파도는 잔잔해졌고, “배는 곧 그들이 가려는 땅에 이르렀”(21b). 배를 탈 때는 주님이 계시지 않으셨는데 배에서 내릴 때는 주님과 함께 목적지에 도착한다. 참으로 멋진 파도타기였다. 제자들은 아주 소중한 진리를 파도와 더불어 배웠다. 진짜 몸에 좋은 약은 이렇듯 입에 쓰다. 그러나 그 열매는 참으로 달다.

종종 우리에게도 제자들이 만난 파도가 일어난다. 하지만 그럴 때마다 내일은 해가 뜬다는 것을 알면서도, 잠깐 지나가는 파도였다는 것을 누누이 경험했으면서도, 이 큰 바람 역시 우리를 침몰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믿으면서도, 큰 파도일수록 멋진 파도타기가 연출된다는 것을 보아왔으면서도, 정작 파도 앞에서는 지극히 초라하고 작아지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자꾸 물 먹고, 허우적거리고, 아우성 치고, 살려달라고 외치고, 절망하고, 낙담하고, 포기하고, 좌절해 버리는, 때마다 휘청거리는 볼품없는 자신을 본다. 여지없이 침몰 일보(一步) 직전이다. 우리가 그리는 그림은 이처럼 언제나 요모양이다. 사실 우리가 할 줄 아는 것은 이런 것들뿐이다.

그런데 참으로 놀라운 것은 그럴 때마다 주님이 가까이 오심을 보고”(19)라는 값없이 주시는 은혜가 부어진다는 점이다. 가나의 혼인잔치가 그랬고, 수가성 우물가가 그랬고, 가버나움에서 찾아온 왕의 신하가 그랬고, 오병이어가 그랬다. 인생이 그린 그림은 언제나 모자라 바닥이 나기 직전이고, 또 모자랐으며, 거의 죽게 되어 있었고, 먹을 것이 없어 기진맥진(氣盡脈盡)한 실패작(失敗作)이었다. 그런데 그런 어두움으로 죽어 있는 그림들마다 주님이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시기만 하면 그 안에 생명이 숨 쉬고, 풍성한 잔치가 되며, 생명이 살아나는 빛의 생화(生畵)가 된다.

오늘도 죽음을 몰고 오는 파도에서 생명의 빛으로 임하시는 주님을 만났다. 인생은 결코 스스로의 힘으로 말미암아 죽음에서 생명으로 넘어갈 수 없다.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말씀이신 그리스도, 생명이신 예수님, 바로 그분만이 112-13절의 진리를 통해서 14절의 영광이라는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을 현실로 이루신다는 것을 믿는다. 주님은 오늘도 이 모든 일을 두 발로 밟으시고 그 위를 걸으신다. 파도가 잔잔해진다. 그리고 기쁨이 시작된다. 마침내 생명의 떡앞으로 나아가는 은혜를 입는다. 물 위를 걸으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 가는 맛, 그게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오늘이라는 파도를 지나 생명의 떡’(예배) 앞으로 나아가는 발걸음이 신나기만 하다. 파도는 이미 끝났다. 이제는 생명의 떡이다.

 

   

제목 날짜
예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사랑한다(요 7.53-8.11). 2022.01.24
불신앙의 언덕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요 7.37-52). 2022.01.24
7장이라는 불신앙의 밭에도 31절의 꽃은 핀다(요 7.25-36). 2022.01.24
16 기도⑤: 백부장의 기도(마 8.1-13) (1) 2022.01.24
15 산상수훈(山上垂訓)⑦ - 2425 vs 2627(마 7.21-29) (1) 2022.01.24
14 산상수훈(山上垂訓)⑥ - 천국로(天國路)는 좁은 길이다!(마 7.13-20) 2022.01.22
불신앙의 싹은 유대에서도 자란다(요 7.11-24). 2022.01.17
불신앙의 씨앗은 아직 내부에도 있다(요 7.1-10). 2022.01.17
1장의 제자들이 6장에서 중간시험을 치른다(요 6.60-71). 2022.01.17
유대인들은 표적(sign)과 믿음 밖에 있다(요 6.41-59). 2022.01.17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요 6.22-40). 2022.01.17
주님은 제자들이 만난 풍랑을 기쁨으로 바꾸신다(요 6.16-21). 2022.01.17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라!(요 6.1-15) 2022.01.17
13 산상수훈(山上垂訓)⑤ - 천국: 이웃과 함께, 기도를 통해(마 7.1-12) 2022.01.15
예수님은 ‘장차 … 보리라’의 표적(sign)이다(요 5.31-47). 2022.01.13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영생을 주신다(요 5.17-30). 2022.01.11
‘장차 보리라’의 표적에도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요 5.1-16). 2022.01.11
믿음은 ‘장차 …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끌어당긴다(요 4.43-54). 2022.01.11
다시 사마리아의 부흥이 보인다(요 4.31-42). 2022.01.11
주님과의 만남에는 그 이후가 풍성하다(요 4.25-30). 202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