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병이어의 표적을 보라!(요 6.1-15)

20220118(묵상)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라!

Jn. 6.1-15

 

    본문 관찰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1-6)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7-10)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11-13)

       →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14b)

    예수께서 자기를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14-15)

   

 

네 번째 표적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신 표적이 소개된다.

이 이적은 모든 복음서가 유일하게 소개할(14.13-21, 6.30-44, 9.10-17) 정도로 주님의 사역에서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 요한은 이 표적을 일단 소개하고(1-15), 지금까지의 표적 이후를 구성해왔던 방식대로 이 표적을 통해 생명의 떡’(22- )이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받아먹으라는 메시지로 이어간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1-6).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7-10).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 큰 무리’(2,5)를 이루고 있다. 이를 주께서 보셨다. 그리고 빌립에게 이렇게 물으심으로써 표적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가 어디서 떡을 사서 이 사람들을 먹이겠느냐.”(5b) 표적을 보고 왔고, 주님을 만나기 위해서 왔다지만 일용할 양식은 때를 따라 공급되어야 한다(14.15). 주님은 말씀 앞에 나아와 하나님의 나라의 일을 듣는 이들을 소흘히 하지 않으신다(6.34, 9.11). 주님은 영육(靈肉)의 양식을 어느 것 하나라도 무시하거나 불필요하다고 하시지 않으신다. 이 둘은 언제나 필요하다(2.46-47).

사실 주님이 빌립에게 하신 말씀은 그를 시험코자 하심이었고, 무엇보다 예수님은 자기가 하실 일을 잘 알고 계셨다(6). 주님은 여기서도 하늘의 표적을 행하실 것이다. 이 사건에 빌립과 안드레가 나온다. 그럼 이들이 하늘의 표적 앞에 어떻게 반응할까? 빌립은 예수님이 친히 부르셨고, 나다나엘을 전도할 때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1.45)라는 신앙고백을 통해 요한복음에 입문한 제자다. 또한 안드레 역시 마찬가지다. 그는 요한의 말을 듣고 예수를 좇는 제자가 되었고, 형제 베드로를 찾아가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1.41)라는 탁월한 신앙고백을 통해 12 제자의 반열에 든 사람이다. 이렇게 해서 이들은 공히 6장에 오기까지 세 번의 표적과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끊임없이 들어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주님의 질문을 받았다. 하지만 이들의 대답(7-9)은 매우 실망스럽다. 우물가에서 몇 시간 주님을 만났던 사마리아 여인(4.1-42), 가버나움에서 예수님이 갈릴리에 오심을 듣고 가서 청한 후에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믿었던 왕의 신하(4.46-54)에 비하면 이들은 한번이 아니라 주님과 함께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제자 수업을 받고 있는 선택받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제자훈련 중이다는 말이다. 하지만 지난 번 신앙고백들(1.41,45)은 온대간대 없고, 불신앙에 가득찬 이들의 모습, 이게 어찌 제자들의 모습만이겠나 싶다. “친히 어떻게 하실지를 아시고”(6)의 주님과 전혀 반대쪽인 표적 밖에 있는 제자들(7-9)의 간격만큼이 장차 보리라’(1.42,50-51)의 이중성이 아닌가 싶다.

언제까지 이백 데나리온이나 계산하고 있는 수준, 오병이어가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느냐며 이성주의(理性主義)나 합리주의(合理主義)의 노예가 되어 표적을 다시 어두움 속으로 던지는 영적 혼돈의 삶을 반복만 하고 살아갈 것인가. 그것만큼 신앙의 눈은 빛으로 오신 주님을 보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나 정말 놀라는 부분은 이것이다. 이런 불신앙임에도 표적은 결코 중단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사람들로 앉게 하라.”(10)

본인의 믿음이 아닌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표적의 사람이 되었던 왕의 신하의 아들에게서도 이러한 생각을 해 보았었다(4.46-54). 믿음 때문에 기적이 일어난 것이 아니라 기적 때문에 예수님을 믿었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번에도 역시 믿음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표적은 이미 시작되었고, 그렇다면 이를 통해서 다시금 제자들은 믿음의 눈을 뜨게 될 것이다. 이처럼 제자들에게는 표적이 되어져가고 있는 셈이다. 동일한 원리가 우리에게도 마찬가지다.

   

 

먹고 남은 조각이 열두 바구니에 찼더라(11-13).

 

오병이어가 어떻게 표적(sign)이 되어져 가는가를 흥미롭게 묵상하고 있다. 한 아이의 한 끼 식사인 오병이어가 예수님의 손에 들려 있다. 이미 저녁이 될 시간까지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 영의 양식을 주셨다. 이제는 일용할 양식 차례다. 예수님께서 떡을 가져 축사(祝謝)하신다. 그리고 나누어 주신다. 마침내 5천명이 먹고 남은 조각을 거두니 열두 바구니에 찼다.

참으로 한심한 친구들이 생각난다. 이 표적을 믿지 않겠다는 사람들은 이렇게 말한다. 모두들 자기 먹을 음식을 가지고 있었는데 어린 아이가 기꺼이 자기 것을 내놓음으로써 모두들 자기 것들을 함께 나누어 먹었다는 것이다. 참 웃기는 얘기들이다. 한심한 녀석들에게 일침을 주고 싶다. 지금 복음서는 1세기 작품이다. 그렇다면 예수 시대를 살았던 많은 사람들이 아직도 살아있을 때라는 말이다. 그런데 어떻게 허위 사실을 공공연하게 유포하였겠는가. 믿지 못하는 것은 개인 사정이고, 이 표적이 일어난 사실 자체는 결코 부인할 수 없다. 이는 복음서의 모든 기사들을 읽어내는 하나의 시각으로서도 매우 탁월한 통찰이다.

 

 

부스러기 묵상

 

     [요한의 주석]

    “그 사람들이 예수께서 행하신 이 표적을 보고

      그러므로 예수께서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14-15)

 

사람들은 예수님이 행하신 표적을 보았다.

무려 5천명이다. 성경학자들의 중론에 따르면 가족들까지 합하면 대략 2만 여명은 족히 되었을 것으로 본다. 확실한 것은 이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기적을 목도했다는 점이다. 믿음이 있어서, 그 결과로 기적의 수혜자가 된 것이 아니다. 은혜로 말미암아 값없이 주어진 축복의 부스러기다. 사람들은 자꾸 나의 어떠함이 기적과 이적을 이루는 하나의 원인(근거)이 된다고만 생각한다. 그러나 꼭 그러는 것은 아니다. 나의 믿음 때문에 다른 사람들이 하나님의 기적을 목도하는, 그 기적에 참여하게 되는 축복을 받게 된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자리에 있었던 사람들(2.1-11), 왕의 신하의 가족들(4.53)이 이 경우에 해당한다. 표적에 참여하게 되었는데 내가 어떠해서 이 표적이 임했다고 생각한다면 곤란하다. 왕의 신하의 아들은 어떤 면에서 아무 한 일 없이 기적을 맛보았다.

한 사람의 헌신과 충성, 그리고 믿음은 이처럼 많은 사람들에게 장차 보리라’(1.42,50-51)의 표적을 맛보고, 누리고, 얻게 되는 부스러기가 된다. 역시 한 아이의 헌신은 이처럼 5천여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표적을 맛보는 기회가 되었다. 이런 사람이 필요하다. 아이 때문에 이 표적이 온 것이 아니다.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무수한 하나님의 일들 역시 그렇다. 나는 아무 것도 한 일이 없는데 그것이 주어졌고, 나의 삶을 보다 풍성하게 만드는 것들이 어찌 하나 둘이겠는가.

일용할 양식이 14절의 표적이 된 것은 그런대로 긍정적이지만(18.15-18), 그러나 15절로 이어지는 것은 아무래도 옳지 않다. 사마리아 우물가에서 여인이 찾는 야곱의 샘의 물을 먹는 자는 다시 목마르려니와 내가 주는 물을 먹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니 나의 주는 물은 그 속에서 영생하도록 솟아나는 샘물이 되리라.”(4.13-14) 말씀하셨던 것처럼 오병이어는 단순히 육신의 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라 생명의 떡’(22- )의 표적(예표)이다. 그런데 15절로 반응하고 있느니 표적을 맛보았으나 아직 자격 없는, 그렇다면 앞서 생각했듯이 이들이 무슨 자격이 있고, 믿음이 있고, 어떤 조건이 기적을 이루는데 합력한 것이 아니며, 순전히 주님의 은총에서 비롯된 값없이 주시는 선물이라는 점을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여러모로 장차 보리라’(1.42,50-51)의 앞날이 그리 순탄하지 않다. 내적으로는 제자들의 불신(7-9)이 뿌리 깊게 자리하고 있고, 외적으로는 유대인들의 핍박(5.16,18)이라는 태풍이 점차 그 수위를 높여가고 있고, 여기에 말씀을 들었고 또 표적을 맛보았으나 15절처럼 밖에 예수님을 바라보지 못하는 여전히 큰 무리에 불과한 사람들, 그 틈바구니에 외롭게도 주님이 서 계신다: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15b)

이게 어쩌면 예수님의 목회 환경이 아닌가 싶다. 아직 믿음 없는 소리나 퉁퉁 외치는 철딱성이 없는 핵심 제자반, 말씀을 듣고 모이는 교인이지만 여전히 장차 보리라의 꿈 밖에서 동상이몽(同床異夢)하고 있는 큰 무리일 뿐인 다수 회중, 여기에 뭔가 꼬투리를 잡아 빛을 다시 어두움으로 환원시키려고 호시탐탐 예수님의 목회를 발목잡기 위해 점점 세력화 되고 있는 유대 종교지도자들, 이게 6장의 앞뒤에 보이게 보이지 않게 그려지고 있는 그림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을 현실로 빛나게 하시기 위해 어두움을 가로질러 묵묵히 예수행전의 길을 걸어가신다. 누구를 향한 탓도 없다. 이 모든 것을 홀로 품으시고 장차 보리라’(1.42,50-51)는 아버지의 뜻이 하늘에서 이룬 것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를 향해, 그 길이 핍박과 죽음(5.16,18)이라 할지라도 결코 포기하거나, 타협하거나, 우회하거나, 미루지 않으시고 갈보리 십자가를 향해 한걸음 한걸음 나아 가신다.

나는 무엇을 위해, 왜 이 길을 걷고 있는가? 주님처럼 살겠다는 것은 하나의 구호에 불과한 것은 아닌가? 네 번째 표적까지 오시면서도 철없는 성도들을 그대로 품으시고, 이들과 함께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 앞으로 나아가고 계시는 주님에게서 목회의 희망을 본다. 교회는 사도행전 2장이라는 모판이 그냥 주어짐으로 시작되는 게 아니다. 육신을 입은 하나님으로 세상 앞에(3.16), 사람들 곁으로 가까이 오셨음에도 불구하고(3)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15b)가 반복되는 것, 이게 지금 주님이 언행(言行)하고 계시는 목회의 한 지점이다.

여전히 앞이 보이지 않는 목회라는 오병이어를 내 한 끼 양식으로 붙들고 있는 초라한 나를 발견한다. 이것으로는 나 홀로 한 번으로 끝나는, 그래서 다시 배고플 수 밖에 없는 그런 것 아닌가. 이것까지도 주님께 드려야겠다는 생각, 주님 밖에는 소망이 없다는 생각, 오병이어가 12 바구니라는 부스러기로 풍성해진 기적의 식탁 앞에 서서 이런저런 생각을 하게 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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