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산상수훈(山上垂訓)⑤ - 천국: 이웃과 함께, 기도를 통해(마 7.1-12)

20220116(양무리교회)

 

 

 

산상수훈- 천국: 이웃과 함께, 기도를 통해

Matt. 7.1-12

 

    본문 관찰

 

    이웃 관계(1-6): 비판하지 말라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

    하나님 관계(7-11): 구하라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황금율(12): 남을 대접하라

 

 

이웃 관계, 하나님 관계

 

    ▪예수 그리스도(메시야)

    ∙공생애 선언: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

        → 3중사역 시작(4.23-25): “수 많은 무리가 따르니라.”(25b)

             → 산상수훈(5-7): “제자들이 나아온지라.”(5.1b)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그가 임하게 하시는 그 나라는 어떤 모습인가.

핵심은 그 나라가 완제품(완성품)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먼저, 네 이웃을 대하는 나와 밀접하다는 점에서 그렇다(1-6). 다른 사람을 배려하며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이다. 주님은 정말로 를 정직하게 볼 수 있다면 그만큼 가 바르게 보인다.”(1-6)고 하신다. 이것이 너와 나로 이루어진 천국의 모습이다. 진심으로 아멘이다. 이렇듯 산상수훈은 말씀에 나를 비춰보도록 요구한다. 남을 판단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은 비판을 기계적으로 금지한 말씀이 아닌 이유도 발견된다. 나를 보는 일에, 그러니까 나를 아는 일에 실패하면 6절과 같은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다른 하나는 예수께서 임하게 하시는 그 나라는 우리가 기도를 통해 구해야 한다(7-11). 어떻게 하나님이 이루시는 나라를 내가 구할 수 있다는 것인가. 부족하고, 못나고, 죄 많고, 어리석고, 무지한 인간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기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문제가 될 수 있는 것은 무엇보다 잘못 구할 수 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가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통해 드러난다고 할 때 우리의 기도는 어떻게 드려져야 하고, 달라지고, 또한 새로워질 수 있을까.

   

 

비판하지 말라(1-6): 먼저 네 들보를 빼어라!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게 하는 일에 더해지는 비판과 헤아림은 다시 이 뿌린 씨가 부메랑이 되어 돌아온다(1-2). 왜냐하면 내 눈의 들보는 보지 못하고 네 눈의 티만을 보는 우()를 범함으로 천국이 아수라장이 되었기 때문이다(3). 이처럼 천국은 너를 비판’(비난, 정죄, 헤아림)함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이것은 오히려 그 나라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천국은 먼저 내 눈에 들보가 있음을, 그러기에 그것을 빼어내는 것이 우선한다. 비로소 그 후에야 밝히 보고”(5b), 즉 나를 보는 만큼 너를 바르게 볼 수 있게 되어 네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를 빼”(5b)게 된다. 이렇듯 자기를 보는 일에 실패하기 때문에 자꾸만 너를 심판하고 판단하고 비판하려는 경향이 앞서게 된다. 이것이 나와 너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관계를 일그러트리는 주범이다. 천국이 임하고 또 이루어지는 것을 방해하는 것은 너를 향한 비판과 정죄다. 너의 티만 보이는 셈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죄를 따라 처치하지 아니하시며 우리의 죄악을 따라 갚지 아니하셨”(103.10). 지금 주님이 하나님께서 나를 대하시는 것처럼 다른 사람을 대하라 하신다. 나의 큰 들보와 비교할 수 없이 너의 작은 티를 부풀리는 것은 외식하는 자’(5a)라는 지적을 받기에 충분하다. 왜냐하면 나는 너를 비판할 수 있는 자리에 있다고 생각하는 교만과 가증함이라는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사람은 속일 수 있을지 몰라도 주님은 지금 이처럼 언행하며 사는 자를 외식하는 자라 하신다. 그러니 어찌 그런 자에게 하나님의 나라의 모습을 볼 수 있겠는가.

주님은 자꾸만 너에게로 고정시키려는 시선에서, 그것도 너를 비난하고 비판하려는 시선을 내려놓고 먼저 나를 보도록 요구한다. 이것은 다른 사람들의 일에 무관심하고 나만을 좀 더 바르게 살 수 있도록 하라는 이기주의를 말하는 게 아니다. 문제는 다른 사람을 잘못 보는데 있다. 이것은 늘 자신을 보는 일에 실패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결국 주님이 지금 나에게 말씀하시고 싶으신 메시지는, 자신을 먼저 살피라는, 다름 아닌 먼저 네 눈 속에서 들보를 빼어라!”(5a)는 말씀이다.

엉뚱하게 다른 사람 들보타령을 하지 않음으로써 서로 삿대질하다가 피차에 망하는 공멸(共滅)을 피할 수 있다. 이렇듯 자기 의’()라는 게 얼마나 무서운 것인가.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까지 아수라장을 만들 수 있어서다.

   

 

구하라(7-11):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를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5.12)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로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는 예수님의 3중사역으로 세워지는 중이다(4.23-25). 사람의 나라가 아니라는 얘기다. 여기서 당장 이런 의문이 생길 수 있다: 하나님의 나라는 메시야가 오셔서 이루시는 나라이지 않는가. 그래서 하나님의 나라 곧 천국인데, 그러면 인간이 할 일이 있을까. 아마 없을 것이다.

그래서 일까, 주님은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명령하신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기도하라 하신다. 하나님의 나라인데 내가 할 일이 있다고 하신다. 옛날 이스라엘이 여호수아와 함께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때의 일이다. 그 땅은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다. 그런데 광야에서도 지난 40년간 일하고 땀 흘려 먹을 것을 생산하거나 만들지 않았으니까 그렇다면 가나안은 더 그래야 할 것 같지 않는가. 하지만 여호수아 512절 말씀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예수를 믿었다고, 구원을 받았다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니까, 내 안에도 하나님의 나라가 시작되었으니까, 앞서 말씀처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며 살 때 모든 것을 더하신다고 했으니까,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시는데 뭘 구하고 찾고 두드릴 필요가 있겠는가?’라고 생각할 수 있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많은 사람들이 넘어지는 부분이다.

그런데 주님은 산상수훈에서 주께서 시작하신 그 나라는 우리가 기도하는 것과 무관하지 않다 하신다. 하지만 기도하려다 금새 막힌다: 이렇게 기도해도 될까, 이런 걸 구하여도 되는 것일까, 이런 하찮고 어리석은 것을 찾고 두드려도 괜찮을까. 혹시 하나님이 내가 구하는 것과 다른 것을 주시면 어떻하지? 그게 내가 구하는 것보다 더 좋은 것이면 문제가 없겠지만 혹시 나쁘거나 원치 않는 것을 주시면 곤란하지 않을까. 감히 내 주제에 뭘 구해? 다 알아서 주시겠지 뭐... 내 부모도 다 알아서 주는데... 그래서 기도하자니 두렵고, 그렇다고 안 하자니 불안하고...

이때 주님은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9-10절에서 우리의 예를 구체적으로 들어주시면서, 곧바로 하나님의 나라와 관련하여 우리가 드리는 기도에 대한 놀라운 복음을 말씀하신다: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11) 무엇인가. 구하라 하신다.

아들이 떡을 달라하는데 돌을, 생선을 달라하는데 뱀을 줄 부모가 없다. 그렇지 않은가. 이처럼 하나님 아버지께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따라 살아가는 당신의 자녀들이 구하는 자로 나아올 때 결코 나쁜 것, 해로운 것, 악한 것, 망할 것, 독이 될 것, 죽고 고통스러운 것을 주시지 않는다 하신다. 하나님은 우리가 구하는 것 이상으로 좋은 것으로 우리의 소원을 만족하게 하신다.

정리하면, 하나님의 나라가 내 안에, 우리 안에 좋은 것으로 이루어지게 하신다. 무엇을 통해서인가?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다.

   

 

부스러기 묵상

 

너를 향한 나의 비난과 비판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고 있는 것을 방해한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나를 성찰하고, 돌아보고, 그래서 나를 깨끗하게 하고, 그 나라에 걸맞은 사람으로 만들 때 그런 나를 통해 너에게 그것이 전달되는 하나님의 나라가 오는 것을 보게 된다.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 내가 구하고 두드리는 기도를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좋은 것으로 이루어지게 하신다. 그러니까 내가 구하는 것이 비록 함량미달일지라도 구하는 것 그대로 하나님의 나라가 되게 하시지 않으신다. 그러니 무엇을 구하느냐가 중요하기보다 그것에 응답하시는 하나님의 일하심이 우선한다. 그렇기에 무엇을 구하여도 상관이 없다. 이것을 믿을 때 우리가 드리는 기도를 통해서도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있다. 그렇다. 구하는 것은 나의 몫이다. 그리고 이를 응답하는 일은 하나님의 역사다.

천국이 이처럼 나와 가정과 교회와 이 땅에 이루어지도록 이 두 가지가 건강한 교회를 세워가 보자.

   

 

[추가]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12a)

 

나와 너에게 사용하는 잣대가 같아야 한다.

내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것과 내가 남을 대접하는것이 다르지 않아야 한다. 이것이 이웃사랑이라는 황금률이다(12, 6.31). 상대방의 입장에 서 보면 가장 정직하게 볼 수 있다는 얘기가 아닌가. 다른 사람이 나에게 해주기를 바라는 수준은 높고, 내가 다른 사람에게 하는 수준은 낮다면 이것이 얼마나 가증하고 위선적인 외식인가 말이다. 나를 환히 들여다보시는 주님께 나의 이중성이 통째로 드러나는 대목이다.

사실 나와 너의 관계에서 일어나는 무수한 갈등은 다름 아닌 나에게서 비롯되는 경우가 더 많다. 캔 센더의 책, [피스메이커](IDI, 2000) 가운데 오늘 본문을 다른 부분이다(pp.97-179). 그 중에 이 대목이 특히 내 마음을 두드린다:

 

    *전정 싸울 가치가 있는가.

    *자신을 돌아보라.

    *혀를 다스리라.

 

문제는 나에게 있다는 것에 대한 인식의 출발이 얼마나 중요한가. 허물은 덮을수록 좋은 것이다 싶다. 주께서 나를 이처럼 대우해 주시듯이 나도 이웃을 그렇게 대접하며 사는 것, 이것이 이웃사랑의 시작이다. 주님께 많이 받았기에 그걸 나누며 살아도 부족한 게 복 있는 사람의 삶이다. 너를 보는 눈이 일그러지면 주님을 보는 자리로 다시 돌아와야겠다. 내가 어디에서 부름 받아 여기까지 왔는가를 놓치지 않는 초발심(初發心)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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