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영생을 주신다(요 5.17-30).

20220116(묵상)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영생을 주신다.

Jn. 5.17-30

 

    본문 관찰

 

    내 아버지께서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23)

    예수님은 믿는 자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신다(24-30)

 

 

예수님은 하나님이시다.

 

박해’(16)가 시작된 바로 직후에 이어지는 주님의 언행(言行)이다.

5장부터 고난의 희미한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빛이 어두움을 비추기 시작하자마자 어두움이 빛을 향해 반기를 든다. 유대 종교지도자들을 대표로 하는 자들이 그들인데, 이들은 38년 된 병자가 치유된 표적, 그러니까 육신을 입으신 메시야로서의 주님이 하나님의 뜻을 이 땅에 실현하시기 위해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을 구체적으로 보여주시는 하늘의 표적(sign)을 보고, 듣고,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조직적으로 저항하고 있다는 점에 그 심각성이 있다. ‘예수행전의 독자들은 빛을 깨닫지 못하는 자들과(1.5, 니고데모, 5장의 유대인), 예수 그리스도를 믿어 영접한 자들(1.12, 제자들, 사마리아 여인, 사마리아 사람들, 왕의 신하 가정)로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나누어지고 있다.

   

 

오늘도 일하시는 예수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17)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여전히 일하신다. 상황과 형편과 같은 가변적인 요인들에 의해 흔들리는 게 아니라 장차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이루어내는 일에 그 어떠한 것도 결코 방해가 될 수 없음을 분명히 하시며 세상 구원의 길을 한걸음 한걸음 내걸으신다. ‘박해죽음’(16-18)이 앞을 가로막으려고 하지만 전혀 상관하지 않으신다. 그 누가 이 거룩한 구원의 길을 막을 수 있으랴.

오늘도 아버지 하나님이 일하시니, 주님도 친히 육신을 입으시고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 그분은 오늘 5장에서도 당신이 왜 우리 인생들을 위해서 이처럼 일하셔야 하는지조차도 모르고 있는, 그래서 오직 사탄과 죄의 노예로 죽어 있는 인생들을 위해 변함없이 일하신다. ‘장차 보리라’(20b, 1.50, 14.12)의 은총 밖에서 자신을 핍박하고 죽이고자 하는 인생들을 보시고도 절망하지 않으셨고, 정죄하지 않으셨고, 포기하지 않으셨고, 죽음의 상태에 그대로 방치해 놓지도 않으셨다. 한번 두번 일하시다가 그만 두신 것이 아니라, 어제도 오늘도 계속해서 일하시는 주님이시다. 결국 갈보리 십자가까지 쉬지 않으시고 죽기까지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실 것이다.

그분이라고 어찌 피곤하지 않았겠으며, 그분이라고 어찌 자신의 일을 알지 못하는 인생들이 밉지 않았을까. 한편 주님의 일을 방해하며, 훼방하며, 금지하고, 핍박하려는 무리들만 하나 둘 모여들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이러한 인생들 앞으로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선포하시며, 아버지의 일을 언행(言行)하신다.

그럼 베데스다의 표적(1-15)이 어떻게 하나님 아버지의 일처럼 예수님의 일하심이 되는가? 주님은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이 문제가 될 수 없는 이유를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의 관계에서 설명하신다: “아들이 아무 것도 스스로 할 수 없나니”(19) 결국 예수님을 힐문하는 것은 아버지 하나님을 비난하는 행위가 되고 만다. 하나님 아버지처럼 아들 자신 역시 살리는 자이며(21,25,28-29), 심판하는 자이며(22,27,29-30), 이것은 부자(父子) 모두를 공경하게 하는 일의 표적이게 하려 하심이라 말씀한다. 그렇다면 안식일이라는 제도가 무슨 문제며, 하나님 아버지와 하나인 자로서 하시는 일이기에 더더욱 아무 문제가 될 것이 없다고 말씀하신다. 이렇게 해서 18절의 오해를 말씀으로 해명하셨다.

   

 

구원의 삼시제(三時制)

 

마침내 하나님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 세상에 선포되기 시작한다. 그분만이 구원에 대해서 말씀하실 수 있다(24- ). 육신을 입은 하나님으로서 자신이 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가가 장차 보리라의 언약을 따라 마침내 그 빛을 드러낸다. 이것은 ’(예수님)보내신 이’(하나님) 사이에서 시작되고 성취된다(24).

구원을 위해 일반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열심’(doing)을 동원된다. 그러나 성경의 관심은 언제나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선 존재’(being)로서의 인간을 말한다. 하나님 앞에 있는 인간, 그의 이름은 성도(聖徒). 그는 그리스도의 새생명 안에 살아가는 자다. 이러한 새생명은 어디로부터 오는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예수님을 보내신 하나님으로부터다. 이것이 믿음으로 우리 존재(being)가 새로워지는데 이를 성경은 영생(구원)이라 부른다. 이것이 영생, 곧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구원이다. 결국 베데스다의 표적은 18절의 장벽을 넘어 24절의 빛으로 나아간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로서 자기의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21b)는 권세를 하나님 아버지로부터 받으셨다. 이 살리는 일, 그러니까 구원이 마침내 그 빛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1) 과 거: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겼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또 주님을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자는 이미 새생명 가운데로 인도함 받았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2.1-3) 자리에서 놓임 받아 그리스도의 생명을 얻은 그의 친백성이 되었다. 우리는 이제 더 이상 죽어 있는 자가 아니라 살아 있는, 곧 생명 있는 자다. 이 살아있음으로 인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회복하신 신의 성품을 맛보며, 누리며, 증거하며 살아간다.

 

(2) 현 재: 영생을 얻었다.

 

헬라어 현재 시제다. 본문이 우리의 구원(영생)을 이야기할 때 그것은 이미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것으로 선언한다. 그런 의미에서 구원은 불가항력적인 은혜의 선물이다. 우리는 현재 영생을 소유하고 있다. 아들(예수님)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다(요일5.12).

 

(3) 미 래: 심판에 이르지 아니한다.

 

우리에게 심판’(정죄함)은 없다. 우리에게 앞으로 남은 것은 생명의 부활”(29)이다. ‘심판의 부활은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면제되었다. 지옥의 권세, 사탄의 권세, 사망 권세를 이긴 것이다. 그 이유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의 죄의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사탄은 결박당했다. 그는 우리를 죄의 심판 아래로 끌고 가지 못한다.

   

 

중간지대는 없다.

 

    ① 죽으면 천국에서 눈 뜰 것을 확신하는가?

    ② 천국 에서 내가 너를 왜 천국에 들어가게 해야 된다고 생각하느냐?”

        라고 주께서 물으시면 무엇으라 대답하겠는가?

 

정리하면 누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새생명 가운데 살아가는 특권을 누리는가? 먼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듣는 사람이다(24a).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을 얻어, 복음 안에서 살아가게 된 것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은 은혜다. 또한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다(24a). 믿음은 하나님의 선물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 그리고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10.17). 그러므로 하나님의 말씀을 자주 들으면 믿음이 자란다. 그러면 앞서 24절의 말씀이 내 안에 이루어진 것을 발견하게 된다.

   

 

부스러기 묵상

 

예수님의 일을 방해하는 사람들을 염두에 두고 하신 말씀이 계속되고 있다.

방해하는 무리들로 가득찬 예루살렘, 고난과 환난과 핍박 가운데 오로지 우뚝 찬란하게 피어오르는 한송이 복음을 본다. 사탄의 세력과 그의 힘에도 굴하지 않으시고, 당신을 환영하기는커녕 오로지 핍박하기 위한 구실만을 만들기에 혈안이 되어 있는 유대인, 아니 우리 앞에 정면으로 서 계신 복음을 만난다. 그럼에도 주님은 영생을 말씀하신다. 이것이 아버지 하나님의 뜻이요, 동시에 아들 예수님의 일이시다.

한편 안타깝게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풍성한 삶을 누리지 못하며 살아간다. 삶의 자리에서 신앙을 통해 우뚝 서지 못하는 것은 진정으로 말씀과의 만남이 없기 때문이다. 진실로 말씀을 만난 사람은 말씀을 사랑하며, 그래서 그 말씀의 인도를 따라 살아가게 된다. 콩나물 시루에 물을 주는 것이 말씀을 듣는 것이라면, 그 말씀이 자라는 것이 믿음이랄 수 있다. 물을 주는 것으로 끝나는 것 같은 콩시루에서 마침내 콩나물이 자란다. , 말씀을 듣는 것만으로는 눈에 띠는 흔적이 없는 것 같아 보이지만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믿음이 점점 자란다.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이 좀 더 미래의 그림으로 통해 분명히 증거되고 있다(24- ). 이 약속은 구원으로 완성될 것이다. 예수님이 하시는 모든 일은 아버지 하나님과의 관계 속에서 보시고(19), 맡으신 일이다(22). 이처럼 하늘에서 계획된 일들이 주님을 통해 열리고 있다(1.51). 이것을 볼 수 있고, 믿을 수 있고, 알게 되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으니 얼마나 감사한 일인가.

이러한 하늘의 표적 앞에서도 오히려 주님을 핍박하고 죽이기를 계획하는 유대 종교지도자들의 영혼이 불쌍할 뿐이다. 오늘 우리 시대에도 이들의 후예로 자처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똑같이 메시야이신 주님 앞에 살아가지만 심판의 부활’(29)이라는 모습으로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을 현실로 맞이할 자들이 있다. 이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이다. 이미 심판은 시작되었다(22,27). 어떻게 사는 것이, 무엇을 위해 사는 것이 주님을 위하는 길인가? 오히려 유대인들에게서 역설의 진리를 배우는 말씀이다.

 

    

제목 날짜
예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사랑한다(요 7.53-8.11). 2022.01.24
불신앙의 언덕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요 7.37-52). 2022.01.24
7장이라는 불신앙의 밭에도 31절의 꽃은 핀다(요 7.25-36). 2022.01.24
16 기도⑤: 백부장의 기도(마 8.1-13) (1) 2022.01.24
15 산상수훈(山上垂訓)⑦ - 2425 vs 2627(마 7.21-29) (1) 2022.01.24
14 산상수훈(山上垂訓)⑥ - 천국로(天國路)는 좁은 길이다!(마 7.13-20) 2022.01.22
불신앙의 싹은 유대에서도 자란다(요 7.11-24). 2022.01.17
불신앙의 씨앗은 아직 내부에도 있다(요 7.1-10). 2022.01.17
1장의 제자들이 6장에서 중간시험을 치른다(요 6.60-71). 2022.01.17
유대인들은 표적(sign)과 믿음 밖에 있다(요 6.41-59). 2022.01.17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요 6.22-40). 2022.01.17
주님은 제자들이 만난 풍랑을 기쁨으로 바꾸신다(요 6.16-21). 2022.01.17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라!(요 6.1-15) 2022.01.17
13 산상수훈(山上垂訓)⑤ - 천국: 이웃과 함께, 기도를 통해(마 7.1-12) 2022.01.15
예수님은 ‘장차 … 보리라’의 표적(sign)이다(요 5.31-47). 2022.01.13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영생을 주신다(요 5.17-30). 2022.01.11
‘장차 보리라’의 표적에도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요 5.1-16). 2022.01.11
믿음은 ‘장차 …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끌어당긴다(요 4.43-54). 2022.01.11
다시 사마리아의 부흥이 보인다(요 4.31-42). 2022.01.11
주님과의 만남에는 그 이후가 풍성하다(요 4.25-30). 202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