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장차 …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끌어당긴다(요 4.43-54).

20220114(묵상)

 

 

 

믿음은 장차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끌어당긴다.

Jn. 4.43-54

 

    본문 관찰

 

    선지자가 고향에서는 높임을 받지 못한다(43-45)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46-54)

 

 

두 번째 표적

 

주님의 공생애행전행로를 따라 요한과 더불어 그 현장을 따라가고 있는 중이다.

장차 보리라’(1.42,50-51)의 현장이 계속 이어지고 있다: 유다(3.22, 4.3) 사마리아(4.4) 갈릴리(4.43) 주님은 유다에서 갈릴리로 가시려는 길에 사마리아를 통행하셨고, 그곳 우물가에서 여인을 만나 그녀도 보리라의 은총 안에 부르셨다. 그리고 그녀를 통해서 사마리아에 그리스도의 복음이 크게 전파되었다. 이처럼 처음부터 사마리아가 예수님을 영접한 것은 아니었다. 이에 반해 갈릴리인들은 주님을 영접하며 맞이한다. 요한은 그 이유를 이렇게 증언한다: “이는 자기들도 예수께서 하신 모든 일을 보았음이더라.”(45)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46-54).

 

하지만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은 것은 아니다(43-45,48). 이런 분위기에서 왕의 신하가 등장한다. 지금 왕의 신하인 아버지는 갈릴리 가나에 있고, 병든 그의 아들은 가버나움에 있다(46). 분명 아들과 함께 갈릴리에 오신 주님 앞에 온 것이 아니다(49). 아버지는 다시 갈릴리에 오신 예수님께 거의 죽게 된 아들의 병을 고쳐 줄 것을 청하기 위해서 왔다(47). 아버지의 발걸음은 이렇게 시작되었다: “예수께서 갈릴리로 오셨다는 것을 듣고 가서 청하되 ”(47a) 그는 주님이 오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그래서 약 30의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왔다. 아마 이 길은 12일의 거리였던 것 같다(52, ‘어제’). , 이런 형편과 함께 생사(生死)의 귀로에 선 아들의 병이 치료되는 것이 어떻게 아버지와 아들, 그리고 온 가족들에게 예수님의 표적이 되는가를 묵상해 보자.

 

(1) 아버지 자신에게도 예수님을 믿는 표적이 되었다.

 

첫 번째 표적은 생명이 없는 물이 포도주가 되는 표적이었다(2.1-11). 이 표적을 통해서 제자들이 주님을 믿게 되었다. 그런데 이 두 번째 표적을 통해서는 아들뿐만 아니라 아버지와 온 집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53). 이번에는 생명을 살리는 표적이다. 주님은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으로 이 땅에 오신 메시야라는 것을 장차 보리라’(1.51) 하셨는데 그 말씀이 지금 그대로 성취되고 있는 셈이다.

사실 아버지는 단순히 죽어가는 아들을 살리는 것을 목적으로 예수님을 찾아왔다. 그러니까 단순히 현실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싶다는 이유 하나였다. 이 말은 현실적인 문제를 예수님께 가지고 온 것이 잘못이라는 말은 아니다. 우리 역시 얼마나 많은 현실 문제를 주님께 말씀드리는지 모른다. 아버지에게는 장차 보리라’(1.42,50-51)와 같은 그런 의미의 높은 차원의 믿음이 아니었다. 비교적 가까운 거리인 갈릴리 가나의 지난 첫 번째 이적(46)과 갈릴리 주변 사람들에게까지 전파된 우리 주님의 예수행전’(45,47a)의 기쁜 소식을 그 역시 들었을 것이다. 해서 이런 능력의 분이라면 자기 아들의 불치병 역시 고칠 수 있다는 믿음이 그의 발걸음을 예수님 앞으로 나아오도록 했다.

주님도 이 점을 분명히 통찰하셨다: “너희는 표적과 기사를 보지 못하면 도무지 믿지 아니하리라.”(48) 이 말은 오병이어의 표적을 맛보고서 끈질기게 주님을 좇아온 무리들을 향해 주께서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6.26)라고 말씀하신 의미와 일치한다. 그러니까 이 아버지 역시 주님 자신을 믿은 게 아니라 주님의 능력을 믿었다. 그것도 아들의 질병을 고치고 싶은 지극히 단순한 현실 문제 때문에다. 예수행전을 통해서 그가 메시야라는 진리를 믿는 믿음까지는 아니었다는 말이다. 하지만 이러한 예수님의 질책에도 불구하고 끈질기게, 끝까지, 초지일관(初志一貫) 부르짖는다: “주여 내 아이가 죽기 전에 내려오소서.”(49)

본문의 절정은 바로 50절이다: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50a) 주님은 여기서부터 일하시기 시작하신다. 아버지는 지극히 현실 문제를 가지고 주님께 나아왔을 뿐이지만 주님은 장차 보리라’(1.42,50-51)는 표적(sign)으로 이 아버지의 믿음을 변하여 새롭게 하신다. 먼저 메시야이신 것을 믿는가를 확인하시고 일하시지 않으셨다. 비록 여기서부터 시작하지만 장차 보리라의 자리에 세우시고야 말리라는, 아니 그 자리에 설 것을 주님은 아셨다. 그러니까 구원 얻을 참 믿음이 아니었지만 주님은 이 보잘 것 없는 겨자씨만 한 믿음을 축복하셨다.

50절의 두 번째 메시지는 아버지의 응답이다: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b) 그랬다. 마침내 이 아버지는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고 갔다.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에 표적과 기사(奇事)를 보고 믿었던 초보적인 믿음에서 말씀을 믿는 성숙한 믿음을 소유하였다. 이 일은 예수님을 만나고, 그의 말씀을 듣고 이루어진 일이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복잡한 것이 아니다. ‘예수의 하신 말씀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주님 앞에 올 때는 현실적인 문제를 구하고, 또 그것이 이루어질 줄로 믿는 믿음으로 왔다. 그러나 주님을 떠나 다시 문제가 있는 가버나움 집으로 갈 때에는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가지고, 그 믿음을 입으로 시인하며 갔다. 갈릴리로 오는 발걸음과 가버나움으로 가는 발걸음이 이처럼 천지 차이가 나는 이 아버지처럼 예배당을 오고 가는 나의 발걸음이 이처럼, 말씀을 묵상하는 시작과 마치는 시간이 이처럼, 기도를 시작할 때와 기도를 마칠 때가 이처럼 장차 보리라’(1:42,50-51)의 표적으로 향기나게 되기를 참으로 소망한다.

 

(2) 그 온 집이 예수님을 믿는 표적이 되었다.

 

믿기는 아들이 있는 가버나움이 아닌 갈릴리에서, 그것도 아버지가 믿었다. 그런데 이루어진 역사 역시 두 가지로 성취된다. 하나는 앞서 묵상한대로 아버지가 갈릴리,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을 듣고서부터 변하여 새사람이 된 것이 그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30밖 가버나움에서도 일어난다. 그것은 병들어 거의 죽게 되었던 아들이 아버지의 믿음 때문에 살아난 것이다(51-52).

이것이 믿음의 능력이다. 이처럼 믿음은 시공을 초월한다. 믿음이 이루어지는 것은 장벽이 없다. 아브라함이 믿었는데 이삭과 야곱, 그리고 수 천 년이 지난 이후에 우리에게까지 그의 믿음이 축복으로 임하고 있다. 그는 믿음의 조상이 아닌가. 내가 지금, 이 시간, 이곳에서 기도하는데 이 기도가 응답된다. 바로 지금 아빠에게 이루어지기도 하고, 10년이 지난 어느 날 친구에게서 응답되기도 하고, 지금 기도하다가 오래 전에 기도했던 기도제목이 이미 내 안에 이루어진 것을 발견한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 믿음의 세계 속에서 장차 보리라’(1.42,50-51)의 축복으로 넘실거린다. 이게 믿음이다: “믿음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

신나는 일이다. 어떤 의미에서 아버지는 그냥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50b) 한 것뿐이었다. 그런데 주님은 이 믿음을 받으시고 축복하사 다시 이 아버지에게 돌려주실 때는 아버지와 아들과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53b)는 엄청난 축복으로 넘쳐나게 하셨다. 이것이 장차 보리라’(1.42,50-51)의 표적이다.

   

 

부스러기 묵상

 

아버지의 믿음이 아들을 살린다.

참으로 번쩍이는 진리의 부스러기가 아닌가. 아버지는 축복의 통로다. 자신도 살고, 아들도 살고, 온 식구들도 산다. 단지 육신이 사는 것만이 아니다. 예수님을 믿음으로써 영원히 사는 구원의 은총을 누리게 된다(3.16,36). 나의 믿음이 너를 살린다는 이 놀라운 진리가 빛이 되어 임하는 것을 보라. , 나 때문에 네가 살 수 있다니, 이 얼마나 벅찬 은혜인가! 주님은 나 때문에 또 다른 하나님의 형상이 죽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을 표적으로 제시하지 않으신다. 주님은 나를 이렇게, 그러니까 너를 살리는 사람으로 사용하고 싶어하신다. 주님이 죽은 자를 살리는 분으로 사셨듯이 나도 주님처럼 살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두 번째 표적(sign)을 보여주신다. 이 표적처럼 살아보자.

먼저 아버지가 살아야 한다. 그래야 가정(家庭)이 산다. 또한 아버지가 살아야 아들이 산다. 주님은 내가 사는 길을 보여 주신다. 그것은 믿음이다. 우리 주님이 하신 말씀을 믿는 믿음이다. 이 믿음은 단순히 병이 고쳐진 것을 기뻐하는 것이 아님을 주목한다. 참 믿음은 단지 현실적인 문제가 해결된 것만을 위해 필요한 도구가 아니다. 이 아버지는 예수께서 하신 말씀’(50b)을 믿음을 통해서 아들의 보이는 질병만을 치료한 것이 아니었다. 보이지 않는 영원한 생명, 이 생명의 주인이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그러니까 미래에 속한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을 현실로 끌어 당겼다. 그는 지금 이것을 보는 영광스러움에 초대받았다.

    

  

제목 날짜
예수님은 죄는 미워하시지만 사람은 사랑한다(요 7.53-8.11). 2022.01.24
불신앙의 언덕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요 7.37-52). 2022.01.24
7장이라는 불신앙의 밭에도 31절의 꽃은 핀다(요 7.25-36). 2022.01.24
16 기도⑤: 백부장의 기도(마 8.1-13) (1) 2022.01.24
15 산상수훈(山上垂訓)⑦ - 2425 vs 2627(마 7.21-29) (1) 2022.01.24
14 산상수훈(山上垂訓)⑥ - 천국로(天國路)는 좁은 길이다!(마 7.13-20) 2022.01.22
불신앙의 싹은 유대에서도 자란다(요 7.11-24). 2022.01.17
불신앙의 씨앗은 아직 내부에도 있다(요 7.1-10). 2022.01.17
1장의 제자들이 6장에서 중간시험을 치른다(요 6.60-71). 2022.01.17
유대인들은 표적(sign)과 믿음 밖에 있다(요 6.41-59). 2022.01.17
예수님은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이다(요 6.22-40). 2022.01.17
주님은 제자들이 만난 풍랑을 기쁨으로 바꾸신다(요 6.16-21). 2022.01.17
오병이어의 표적을 보라!(요 6.1-15) 2022.01.17
13 산상수훈(山上垂訓)⑤ - 천국: 이웃과 함께, 기도를 통해(마 7.1-12) 2022.01.15
예수님은 ‘장차 … 보리라’의 표적(sign)이다(요 5.31-47). 2022.01.13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영생을 주신다(요 5.17-30). 2022.01.11
‘장차 보리라’의 표적에도 무지한 사람들이 있다(요 5.1-16). 2022.01.11
믿음은 ‘장차 …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끌어당긴다(요 4.43-54). 2022.01.11
다시 사마리아의 부흥이 보인다(요 4.31-42). 2022.01.11
주님과의 만남에는 그 이후가 풍성하다(요 4.25-30). 2022.01.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