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사마리아의 부흥이 보인다(요 4.31-42).

202201013b(묵상)

 

 

 

다시 사마리아의 부흥이 보인다.

Jn. 4.31-42

 

    본문 관찰

 

    나의 양식(31-34)

    영적 추수(35-38)

    사마리아의 부흥(39-42)

  

 

부흥의 길목에서

 

예수님과 여인, 예수님과 제자들의 그림이 동시에 시야에 들어온다.

배경은 우물가에서 사마리아 마을로 이어진다. 한편 복음은 사람의 이해의 유무와 관계없이 일하고, 그 후에 사람들은 그것을 깨닫게 된다. 여인이 그렇고, 사마리아가 그렇고, 제자들이 그렇다. 주님은 결코 사람을 의지하지 않으시지만(2.23-25), 그러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신다. 한 여인을 통해 어떻게 사마리아 역시 장차 보리라’(1.42,51)의 주제에 편입되는가를 묵상하게 된다. 주님은 한 여인에게서 그것을 보고 계신다(35). 그리고 4장의 사람들에게 이것을 보여 주신다.

   

 

나의 양식(31-34)

 

그 사이에(31a)제자들이 먹을 것을 사러 그 동네에 들어”(8)간 이후에 사마리아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7- )이 이루어진 사이를 말한다. 묘한 대조가 엿보인다. 때가 제6시쯤, 그러니까 정오쯤이었기에 긴 여행에 피곤하여’(6) 쉴 때였을 뿐 아니라 시간상으로 시장할 때였다. 그래서 제자들은 먹을 것을 사러 동네에 다녀왔던 것이다(8). 얼마 후 제자들은 구해 온 음식을 주께서 드시기를 청하였는데(31),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전혀 뜻밖이었다: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32) 어떤 면에서 제자들의 어리둥절함은 자연스럽다(33). 그럼 도대체 이 양식은 무엇인가? 주님은 이 먹을 양식을 34절로 말씀하신다.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그러니까 주님이 먹을 양식’(32)은 제자들이 준비해 온 양식과는 다르다는 뜻이다. 이미 예수님은 영의 양식을 여인과 함께 드셨고, 그 사이에 제자들은 육의 양식을 구해 왔다. 그렇다면 여인과의 만남을 34절로 풀어보면 그 사이에’(31a) 이루어진 그것은 하나님의 뜻을 행하고 이루는 것이며, 그것이 주님의 양식이다는 말이 된다. 제자들의 손에는 육의 양식이 들려있고, 주님에게는 하나님의 뜻을 행하며 이루는 하늘 양식이 있다. ‘그 사이에를 함께 경험하지 못한 제자들로서는 이 말이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주의 일을 하는 자만이 알고, 누리고, 경험하는 양식이 그것이다. 일용할 양식만을 위해 일하며 사는 사람에게는 하늘 양식이 보이지 않는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3)는 약속은 이 모든 것’(6.25-32)을 먼저 구하는 자에게는 결코 경험되지 않는 진리라는 점이다. 제자들은 에서 시작하니까 주님이 말씀하시는 나의 양식’(34)이 보이지 않는 것이다. 그것만큼 여인과 만나고 계신 주님이 이상하게 보이는 것이고(27), 주님의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것 역시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닌가 싶다(33).

 

 

영적 추수(35-38)

 

    “눈을 들어 밭을 보라 희어져 추수하게 되었도다.”(35)

 

제자들은 주님이 보시는 것을 아직 보지 못하였다. 한 여인으로 시작된 사마리아라는 영적 추수를 말이다. 이미 추수는 시작되었다. 여인은 물동이를 버려두고 동네에 들어가서 와서 보라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28-29) 증거하고 있는 그 사이에무지한 제자들이 끼어있다. 제자들은 먹을 양식을 구하기 위해 동네에 들어갔었고, 여인은 복음을 전하기 위해 동네에 들어간 것 역시 묘한 대조다. 제자들은 사마리아의 영적 형편(35-38)을 아직 보지 못하고 있다. 예수님은 물론이고 여인도 보고 있는데 유독 제자들만 아직 이를 보고 있지 못한다.

장차 보리라’(1.42,51)를 여기서 다시 생각한다. 여인은 스스로의 힘과 능력으로 사마리아의 영적 추수를 본게 아니다. 주께서 그녀의 눈을 열어 주셨기 때문에 예수를 그리스도라 증거하게 된 것이다. 동일한 의미에서 제자들 역시 스스로의 노력과 열심으로는 사마리아의 영적 추수를 볼 수는 없다. 그렇다면 장차 보리라는 철저히 주의 손에 달려 있다: “내게 너희에게 이르노니 .”(35)

 

 

사마리아의 부흥(39-42)

 

여인의 증거로 말미암아 사마리아 사람들은 예수를 믿게 되었다(39). 사마리아는 영적 추수의 한 샘플(sample, 35)이다. 이미 추수기라는 말이다. 주님은 거두는 자이시다. 제자들을 추수하는 것을 시작으로(1.35-51), 혼인잔치에서도(2.1-11), 그리고 계속되는 공생애를 통해서 믿는 자들을 부르신다. 이것은 이미 장차 보리라’(1.42,51)의 비전에서 밝히 공개된 우리 주님의 하나님의 나라 복음이다. 이미 미래의 꿈(1.51)이 현실로 이루어지고 있다. 그 구체적인 현장이 바로 사마리아 동네이며, 이 일이 한 여인의 영적 깨어남을 통해 진행되고 있다.

이 일을 위해 예수님은 사람(사마리아 여인)을 사용하신다. 그러나 사람만으로는 아니다. 보이는 일은 사람이 하는 것 같지만 사람이 시작한 것도, 사람이 진행하는 것도, 사람이 성취하는 것도 아니다. 이 일은 주님이 사마리아로 통과하여야 하겠는지라.”(4)에서처럼 주님으로부터 계획되어 졌으며, 주께서 친히 이 일을 성취하고 계신다. 사람은 이 거룩한 영적 추수를 위해 사용되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것이 분명히 정리되지 않으면 주의 일을 하다가 이루어진 결과를 보고서 그만 내가 했다!’고 생각해 버린다. 이것은 독()이다. 종종 겸손한 사람도 일만 하면 겸손을 떠나고, 주께서 일하신다는 것을 믿는 사람도 일이 되어지면 그 결과를 보고서 어느 때부터 목에 힘이 들어가는, 이런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은 주님이 하신다는 진리를 온 몸으로 신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 부분이 실족하는 지점이다.

요한 역시 여인을 하나의 도구라는 점을 분명히 한다: “그 여자에게 말하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로 인함이 아니니 .”(42a) 여인이 전한 것은 여인 자신의 복음이 아니라 주님의 복음이다. 그 복음을 전한 것이다. 그렇다면 여인은 복음의 통로였다는 뜻이다. 이것은 여인만이 아니다. 우리 역시 주께서 복음을 위해 사용하시는 하나의 도구, 통로, 수단이다. 중요한 것은 주님이시다. 그래서 생명이신 주님이 직접 사마리아에 가신다(4,40). 그리고 주님이 이루신다: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41)

정리하면, 예수님의 말씀이 여인이 한 일로 나타난 것이다. 그녀 역시 증거자다. 무엇을 증거했는가? 주님이 하신 일이다. 변한 자신을 선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 역시 착각하지 않아야 할 부분이다. 나 자신을 전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보리라’(1.51)의 은총 안으로 부르신 주님을 전하는 것이다. 오직 예수의 이름 외에는 아무 것도 귀한 것으로 여기지 않아야 할 자, 그가 전도자다(20.24). 그가 바로 여야 한다.

 

 

부스러기 묵상

 

    “이는 우리가 친히 듣고 그가 참으로 세상의 구주신 줄 앎이라.”(42b)

 

주님을 만난 사람은 변하게 되어 있다.

4장까지 오면서 이 영적 법칙을 적용하기에 곤란한 사람은 니고데모였다. 그 이유를 주님은 그가 거듭나지 않았기 때문이다고 말씀하셨다(3.3,5). 새로운 사람으로 변해야 그 결과로 거듭나는 게 아니라 거듭나야만 예수님의 사람으로 변한다. 진심으로 예수님을 알고, 믿고, 따르는 제자로 살기를 원한다면 그에게 그 이전에 반드시 있어야 할 것은 거듭남(중생)이다. 거듭남만이 주님이 하시는 일을 보고, 알고, 그래서 주님을 전하는 자로 살아가게 한다. 여인에게서 이 진리의 흔적을 보았다. 여인의 입에서 우물가에서 만난 그가 그리스도라는 증거는 예사로운 일이 아니다(10.17, 고전12.3). 그는 말씀을 들음으로 믿음이,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증거함으로 성령님이 거하시는 자로 바뀌었음을 드러냈다. 그렇지 않고는 우물가 이후의 여인의 언행(言行)이 이처럼 진행될 리가 없다.

여인 한 사람이 변하여 새로워지니까 그 동네 중에 많은 사마리아인이 예수를 믿는지라.”(39b)라는 축복이 임한다. 주님은 지금도 이 방식으로 일하시기를 기뻐하신다. 예수님을 만나 변하여 새사람이 된 사람, 그는 하나님의 영광을 비추는 복음의 창()이다. 그를 통하여 전해지는 예수님의 향기가 또 다른 사람들을 변화시킨다. 하지만 이것 하나를 더 분명히 할 필요가 있다. 그녀를 통해서 주님을 소개(전도)받았지만 여인의 역할은 여기까지다. 사람들은 이제 여인을 통하여 주님께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곧바로 주님께로 나아간다(42). 하나님을 만나는 중보자는 사람이 아니다.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 뿐이시다(14.6, 4.12).

사람이 아무리 복음으로 충만하다 할지라도, 그래서 그를 통해 많은 사람이 복음을 만나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풍성한 삶을 살게 되더라도 그는 거기까지다. 여인이 지금 그렇다. 그녀는 주님과 복음을 섬기는 자리를 떠나지 않는다. 세례 요한 또한 그랬다(3.29-30). 진짜 복음에 붙들린 사람, 주님의 영광만을 위해 사는 사람은 이처럼 자신의 정체(identity)를 분명히 한다. 여인은 조용히 무대에서 내려온다. 4장의 무대 역시 우리 주님만이 홀로 빛난다. 주님의 것을 내 것인냥 하지 않는 믿음, 이게 여인에게서 배우는 또 하나의 부스러기다.

모든 그리스도인은 여인처럼 살아야 할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나를 통해 주님이 증거되고, 주님이 높아지며, 많은 사람이 구원을 받고, 주님을 보고 믿고 아는 자리에 나아가는 것으로, 그러니까 나를 거기까지 쓰시는 것 하나만으로 충분히 황송해함과 감사함으로 살아야 한다. 자꾸 이처럼 쓰이는 것은 기본이라고 생각하는 순간 은혜로부터 미끄러지는 법 아니겠나. 즉 이것이 명쾌하게 정리가 되지 않으니까 일했으니 알아 달라고 그러고, 드렸으니 더 달라고 그러고, 또 반대로 열심으로 일하지 않거나 헌신하지 않는 사람을 자신과 비교해서 깔보고 그러는 기현상이 신앙이라는 이름으로 자행되는 것 아니겠는가 싶다.

 

     7 너희 중에 누구에게 밭을 갈거나 양을 치거나 하는 종이 있어 밭에서 돌아오면

        그더러 곧 와 앉아서 먹으라 말할 자가 있느냐

     8 도리어 그더러 내 먹을 것을 준비하고 띠를 띠고 내가 먹고 마시는 동안에 수종들고

        너는 그 후에 먹고 마시라 하지 않겠느냐

     9 명한 대로 하였다고 종에게 감사하겠느냐

   10 이와 같이 너희도 명령받은 것을 다 행한 후에 이르기를

        우리는 무익한 종이라 우리가 하여야 할 일을 한 것뿐이라 할지니라

 

주님이 말씀하신 겸손의 비유가 마음을 파고든다(17.7-10). 요한이 교제하도록 소개해 주는 사람들에게서 주님의 비유를 회상하게 된다. 좋은 사람들이다. 이렇듯 예수(복음) 안에서 나도 좋은 사람이 되고 싶다. 다시 시작하는 마음으로 무명(無名)의 여인이 남긴 복음의 족적(足炙)을 자신의 창에 비추어 보는 시간이다. 눈부신 아침, 마음은 예수 그리스도로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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