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다니교회에는 향유가 가득하다(요 12.1-11).

20220210묵상)

 

 

 

베다니교회에는 향유가 가득하다.

Jn. 12.1-11

 

    본문 관찰

 

    마리아(1-3)

    가룟 유다(4-6)

    예수님(7-8)

    대제사장들(9-11)

 

 

베다니교회의 풍경

 

에브라임에서 베다니로 제자들과 함께 올라오신다(1, 11.54).

유월절 6일 전의 일이다. 베다니는 예수께서 불과 얼마 전에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나사로가 있는 곳이다. 아마 나사로의 가정에서 예수님과 그 일행들을 초대한 모양이다. 잃어버린 것 그 이상인 이미 죽은 자가 살아났으니 축하 잔치를 마련하는 것은 자연스러워 보인다. 무엇보다 지금까지는 주는 자로서의 예수님께서 이번에는 받는 자로서 말이다. “예수를 죽이려고”(11.53)나사로까지 죽이려고”(10) 그 사이에 배설된 잔치에서 [베다니교회]의 풍경을 맛보는 것은 아무래도 좀 무리일까. 하지만 베다니교회 또한 세 남매들만 있는 게 아니다. 좀 더 가까이 가 보자.

   

 

마리아(1-3)

 

    “지극히 비싼 향유를 가져다가 예수의 발에 붙고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 향유 냄새가 집에 가득하더라.”(3)

 

마리아에게 이 비싼 향유가 있었다는 것으로 봐 상당히 부자였지 않았나 싶다. 족히 하루 길이 넘는 곳에 계신 예수께 사람을 보내어”(11.3) 나사로가 병들었음을 알리고, 또한 돌무덤(11.38)을 소유할 정도였음에서 볼 때 역시 그렇다. 사실 그녀가 부자였다는 것이 이 본문과 별 상관은 없다. 중요한 것은 그녀의 마음이며, 헌신이다.

마르다는 봉사함으로, 마리아는 예배(헌신)함으로, 나사로는 증인으로 각각 주님을 섬긴다. 일용할 양식 뿐 아니라 주님과의 교제, 주님의 말씀이 나누어지고 있다. 잔치에는 이 모든 게 다 있다. 그래서 이 잔치에는 예배의 그림이 있고, 교회의 풍경이 있다. 주님은 평범한 잔치를 이처럼 영광스럽게 하신다(7-8). 요한은 비로소 12장에서 와서야 주님께 받은 은혜를 다시 주께로 돌려드리는 성도의 출현을 알린다. 그녀의 이름은 마리아다. 한 건강한 예배자 마리아를 주목하는 이유는 또 있다.

가룟 유다의 발빠른 계산에 의하면 지극히 비싼 향유 곧 순전한 나드 한 근”(3a)300 데나리온의 가치가 있는 고가품(高價品, 5a)이다. 당시 노동자의 하루 품삯이 1 데나리온이었는데 그렇다면 이는 거의 1년 치 연봉에 해당하는 금액이다. 그녀는 이 귀한 것을 아낌없이 주님께 드린다. 여인은 이것이 예수님보다 더 귀하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면 결코 주께 드리지 못했을 것이다. 결국 나사로가 살아난 것은 물론이고, 지금까지 받은 복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그것에 비하면 정말 아무 것도 아닌 조그마한 것이라고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면 이 헌신은 불가능했다.

부자이기 때문에 이 정도는 드릴 수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을 발에 붓고, 그것도 부족해서 자기 머리털로 그의 발을 닦으니”(3b, 14.3-9; 26.6-13; 7.36-50 참조)에서 느껴지는 분위기는 당시 유대 문화권에서 여자의 머리는 곧 영광의 상징이었는데 이를 발을 씻는 도구로 드렸다는 것은 그야말로 자신을 가장 아래로 비하(卑下)시키는 섬김과 겸손의 헌신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것이었다. 여인에게는 300 데나리온을 드려도 아깝거나 후회스럽지 않은 신앙이 있었다. 주님은 바로 이 중심을 보셨다.

   

 

가룟 유다(4-6)

대제사장들(9-11)

 

    “이 향유를 어찌하여 300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니”(10)

 

가룟 유다, 그는 이미 6장에서 불신앙의 계보에 오른 사람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 내가 너희 열둘을 택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나 너희 중의 한 사람은 마귀니라 하시니, 이 말씀은 가룟 시몬의 아들 유다를 가리키심이라 그는 열둘 중의 하나로 예수를 팔 자러라.”(70-71) ‘가난한 자들’(5-6)을 말하는 유다의 명분은 매우 합리적이고, 그것만큼 설득력이 있어 보인다.

그의 겉모양은 신앙 좋은 성도(聖徒) 같지만, 그러나 그의 진심은 도둑’(6)이다. 주님의 평가는 마음의 중심을 감찰하신다. 그는 알곡과 공존하는 가라지 일 뿐이다. 알곡들로 가득한 베다니교회 회중 가운데 서 있지만, 그리고 그럴듯한 말로 믿음 깊은 사람으로 행세하고 있지만, 하지만 이런 혼돈스런 말로 정작 바르게 헌신하고 섬기는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도둑이자 마귀일 뿐이다. 그는 예수님이 아니라 300 데나리온을 택한다.

이처럼 신앙이 따라주지 않으면, 믿음의 눈을 잃어버리면, 무수한 표적과 말씀들을 들으며 3년이나 되신 시간들을 주님과 동거동락(同居同樂)했다 하더라도 -유다는 등록 후 3년이 된 성도다. 제자훈련 수료를 앞둔 지도자다- 유다처럼 사는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 부분이 좀 충격이고 혼돈스러운 부분이다.

베드로의 신앙고백 위에 준비되고 있는 주님의 교회(16.18)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다. 이들만이 아니다. 나사로까지 죽이려고 모의하는 대제사장들도 있다. 이게 교회란 말인가? 그런데 주님은 이게 교회라 하신다. 그 문제 많은 고린도교회를 향해서도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성도(聖徒)라 부르심을 입은 자들”(고전1.2)이라 부르신다. 이처럼 어느 시대나 교회는 이 두 그림이 공존한다. 천상의 교회 풍경에는 없지만 지상의 교회 풍경에는 이 그림이 천연덕스럽게 한쪽 모퉁이를 차지한다. 이게 현실이다.

그러나 진짜 아름다움은 받은 바 은혜를 기억할 줄 알고 그것을 다시 주님께 돌려드리는 헌신자들에게 있고, 이런 흔들리는 교회임에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 앞으로 나아오고 있음에 있다(11). 유다(도둑, 마귀)가 있다고 교회가 어떻게 되는 것도 아니다. 대제사장들이 기득권을 쥐고서 예수님이 그리시려는 그림을 좌지우지(左之右之)하는 것처럼 보여도 상관없다. 주님의 것을 훔쳐가는 깨진 바가지들이 있어도 진리의 샘은 결코 마르지 않는다.

   

 

부스러기 묵상

 

    “나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 그것을 간직하게 하라.”(7)

 

주님은 마리아의 헌신에서 임박한 자신의 장례를 보셨다(7).

그리스도의 향기가 온 세상에 가득하게 될 장차 보리라의 꿈이 현실로 임하고 있음을 아셨다. 종종 우리의 헌신은 이처럼 상상 밖의 기적이 되곤 한다. 이제 곧 숨가쁘게 진행될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로 이어지는 구속의 파노라마를 마리아는 보고 있다. 마리아는 예수님의 장례에 쓰려고 간직한 것을 미리 주께 드린 것이다. 예수님을 잡아 줄 제자가 있는 반면에 장차 보리라’(1.42,50-51)의 완성인 십자가를 보고 있는 자도 있다. ‘장차 보리라의 꿈은 마침내 현실로 임하고 있다. 주님은 마리아의 헌신을 자기 계시의 도구로 사용하신다.

종종 유다처럼 언행(言行)하려는 유혹을 받는다. 사실이다. 그래서 헌신이고, 충성이고, 믿음이 아닌가. 세속의 가치관으로 보자면 마리아가 틀리고 유다가 옳다. 가끔은 이 공식이 통하는 것처럼 보이는 때가 있다. 명분과 상식과 통념과 다수결이 세를 잡고서 밀어붙이면 꼼짝없이 마리아는 광신자가 되고 만다. 그래서 아무도 마리아처럼 앞서지 않고, 적당한 선에서 눈치보며 그럭저럭 살아간다. 하지만 지나고 보면 언제나 마리아가 옳았다는 것을 뒤 늦게야 알게 된다.

해서 말인데, 지금은 마리아가 필요한 시대다. 유다로는 안된다. 다같이 망한다. 주 예수보다 더 귀한 것이 없음을 알고, 믿고, 고백하고, 확신하고 있다면 그것만큼을 주께 드리고 사는 사람이 필요하다. 마리아처럼 살아보자. 나를 한 알의 밀알로 드려 주님 영광이 이루어지는 그런 헌신으로 이 땅의 교회로 하여금 주님의 향기를 발하도록 해 보자. 생각만큼 그리 어렵지 않을거다. 12장까지 듣고, 보고, 알고, 고백했는데 아직도 머뭇거리고 있다면 분명 유다는 아닌데, 그렇다고 마리아도 아니다. 내가 마리아일거라고 생각하는 것만큼 주님을 모독하는 것 아닐까 싶다.

 

    “이렇게 많은 표적을 그들 앞에서 행하셨으나 그를 믿지 아니하니”(37)

 

마침내 예수님의 행적이 십자가를 지신 공생애 마지막 한 주간(수난주간)을 맞고 있다(1,12). 지금껏 요한복음 안에는 두 부류의 사람들이 있었다. 비록 희미하기는 하지만 예수님과 그분이 하신 일을 보고 듣고서 장차 보리라!’에 믿음으로 반응한 사람들이 있다(2.11,22-23, 4.39,41,50,53, 7.31, 8.30-32, 9.17,33,35-38, 11.45). 동시에 그 반대로 여전히 주와 복음을 반대하고 급기야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자들이 있다(5.16,18, 6.26,66, 7.1,5,44, 8.37,40,59, 11.53).

바로 이런 흐름 안에서 고난의 종으로 가시는, 즉 대속(代贖)의 죽음을 위해 십자가로 가시는 길목에서 그분의 장례할 날을 위하여’(7) 이제까지 듣고 보고 깨닫고 믿은바 주의 말씀 앞에 믿음으로 반응하는 사람이 등장하고 있다. 이것이 베다니 이야기, 그러니까 주님께 향유를 부은 마리아의 언행이 갖는 의미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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