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사로는 5장 25절의 표적이다(요 11.38-46).

20220208(묵상)

 

 

 

나사로는 525절의 표적이다.

Jn. 11.38-46

 

    본문 관찰

 

    나사로야 나오라(38-44)

    믿었으나 알리니라(45-46)

 

 

죽은 자가 나오는데

 

결혼식으로 시작된 예수님의 표적행전이 장례식으로 끝나는 것처럼 보인다.

이것이 마지막 일곱 번째 표적이 소개되는 11장에서 느끼는 당혹스러움이다. 사랑하는 자가 병들었다는 통보를 받으셨음에도 이틀을 더 유하셨고(3,6), 결국 장례식의 슬픔 가운데 있는 유족들을 찾아오심에서 더욱 그렇다. 이미 죽었는데 다시 살아나리라”(23)는 말씀이 이해되지 않는 것은 어쩌면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인다(24,39).

이런 정황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33절과 35절이었다. 이는 이러한 반응 바로 이전에 하신 말씀(4,9-11,15,23,25-26)과 결코 무관하지 않다. 과연 장례식이 표적으로 거듭날 것인가. 그래서 주님이 나사로의 죽음을 전후하여 하신 말씀(4,9-11,15,23,25-26,40-42)장차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바꿀 수 있을 것인가. 나사로의 무덤에 가시는 주님의 뒤를 따라 나서는 말씀이다.

 

 

나사로야 나오라(38-44).

 

무덤은 돌로 막혀 있다(38b). 그리고 나사로는 죽은 지 이미 나흘이 되었고 벌써 냄새가 나고 있었다(17,39). “돌을 옮겨 놓으라”(39a)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해 마르다는 이런 일이 별 소용이 없음을 넌지시 표현한다(완곡어법). 주님은 이를 아셨고, 그래서 네가 믿으면 .”(40a)이라고 질책하신다. 그러니까 마르다는 입술과(27) 마음이 일치하지 않았다. 이것은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했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이를 주님은 40절에서 아신 것이다.

그렇다면 자매들이 믿지 않았는데도 하나님의 영광을 보리라는 말씀을 이루신 것이 아닌가. 역시 죽은 시체가 믿었을 리 만무하다. 요한은 표적이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 그리스도를 믿게 하고, 또한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지, 믿음이 표적을 낳는다고 말하지 않는다. 표적은 인간의 협력에 의존하지 않는다. 표적을 위해 인간이 하는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이것이 요한의 매우 독특한 시각이다.

이것은 이어지는 주님의 기도에서 보다 분명히 나타난다(41-42). 예수님은 하나님이 이미 들으셨다고 말한다. 지금 하는 기도와 나사로의 살아남은 무덤을 둘러선 무리들로 하여금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그들로 믿게 하려 함이니이다.”(42b)는 것이다. 믿었기 때문에 나사로가 살아나는 표적이 일어난 것이 아님을 분명히 하자. 나사로는 이미 주님의 말씀하심을 들을 수 없는 시체 아닌가. 그런데 죽은 자가 나오는데 .”(44), 잘 보면 수족은 베로 동인 채로, 얼굴은 수건에 싸여 있는 채로가 아닌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믿었으나 알리니라(45-46).

 

표적은 믿음을 낳았다(45). 이미 죽은 자 4일이 지나 썩어 냄새나는 시체가 다시 걸어 다니는 살아있는 사람이 되었다. “나사로야 나오라.”(43)고 그러면 죽은 자도 다시 생명으로 돌아오는 기적, 여기에 더 무엇을 첨가할 수 있으랴. 사실보다 더 강렬한 메시지는 없다. 이처럼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은 이제 그 성취를 향해 비상한다. 나사로는 예수님의 부활을 가장 확실하고 분명하게 예표하는 표적이다.

이런 와중에도 11장의 그림을 훼손하려는 일단의 무리들이 눈에 띈다. 바리새인들로 하여금 뭔가 수작을 부리도록 빌미를 제공하려는 자들 말이다. 표적, 아니 이 일을 이루시는 주님을 보고 만나도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사람들이 이들이다. 이런 어마어마한 표적 앞에서도 46절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처음에는 참으로 충격이었다. 예수님의 언행(言行)을 보고 들은 모든 사람이 다 믿음과 은혜의 삶 앞으로 나아오지 않았듯이 지금도 이런 기적(?)은 너무나 자연스럽게 반복되고 있다.

 

 

부스러기 묵상

 

요한복음의 표적 기사는 여러모로 신비스럽다.

표적이 이루어지는 대상의 상태(준비, 자세, 태도)와 별 상관이 없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가나의 혼인잔치의 포도주(2.1-11), 신하의 아들 치료(4.46-54), 베데스다 연못의 치료(5.1-9), 오병이어의 기적(6.1-13), 바다 위를 걸으심(6.16-21), 맹인의 치료(9.1-7), 그리고 나사로를 살리신 표적(11), 이 일곱 개의 표적 모두가 다 그렇다. 공관복음서가 기록하고 있는 것처럼 믿음이 이와 같은 표적을 가져온 것이 아니라는 뜻이다.

나사로 역시 그렇다. 그가 무덤에서 주님의 음성을 듣고 믿음을 고백했기에 다시 살아난 것이 아니다. 왕의 신하의 아들(4), 그리고 베데스다 못가의 38년된 병자는 네가 낫고자 하느냐?”(5.6)는 주님의 말씀에 불평만 잔뜩 했을 뿐이고, 9장의 소경 역시 기적이 이루어진 후에야 믿음을 고백하였다(38). 더더욱 포도주가 된 물(2), 또한 오병이어와 바다(6)가 무슨 믿음이 있어서 예수님의 표적이 된 것 또한 아니다.

참으로 믿음이 무엇인가라는 가장 본질적인 물음 앞에 서 있다. 믿음만이 일을 이룬다고 말하는 동일한 성경이, 이번에는 믿음의 유무와 상관없이 표적들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서 약간의 혼돈을 느끼기도 한다. 솔직히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위해서 한 일이 무엇인가? 없다. 그는 주님이 나사로야 나오라.”(43) 그러시니까 그냥 나왔을 뿐이다.

조금 정리해 본다. 보통 믿음이라는 게 그가 목표하고 바라는 것을 위해서 동원되는 것으로 생각해 왔다. 하지만 주님은 그런 믿음의 유무와 관계없이 당신의 섭리와 목표들을 이루는 것을 위해 주권적으로 일하시며, 그러는 가운데 뭔가가 이루어질 때 그것을 이루시는 이가 주님이심을 믿어야 한다고 말씀하신다.

때로 후자의 믿음이 좀 약한 게 아닌가 싶다. 나사로나 두 자매의 믿음이 원인이 되어 나사로가 살아나는 기적이라는 결과가 만들어진 것이 아니다. 이 표적을 위해 이러한 의미의 믿음이 한 일은 아무 것도 없다. 믿음은 사람이 원하고 바라는 것을 얻기 위한 인과론(因果論)의 도구가 아니다. 믿음은 전혀 다른 차원에서 요구된다. 이 일을 주님이 이루셨다는 것을, 하나님의 영광과, 그 아버지의 아들됨과, 구속의 드라마를 이루시는 이가 메시야이시며 그리스도라는 사실을 믿는 것, 바로 여기에 믿음이 서기를 기대하신다. 이 모든 것을 통해서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을 현실로 바꾸시는 분이 주님이심을 보고 믿고 알고 깨닫고 시인하고 전하는 것, 이게 믿음이다.

이로써 4,15,25-26,40-42절은 성취된다. 나사로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런 인식이 믿음이다. 자기가 뭐 잘나고 똑똑하고, 이처럼 취급당 할 무슨 공로나 꺼리가 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주님이 이루시고자 하는 섭리에 대한 무지함 때문이다. 그것만큼 믿음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때로 나사로처럼, 왕의 신하처럼, 베데스다 못가의 병자처럼, 맹인처럼 당신이 이루시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보다 더 문명하게 드러내기 위해 우리를 쓰실 때가 있다. 누구 하나 이걸 알고 시작한 사람 없다. 표적 이후에 알게 되고 믿게 되었을 뿐이다. 또 이것은 그 모양과 형태가 매우 다양하다. 빈부귀천(貧富貴賤), 유무식(有無識), 지위고하(地位高下), 남녀노소(男女老少), 고난, 실패, 성공, 시련, 축복을 불문하고 이 모양 저 모양으로 주님이 쓰신다.

나사로처럼 쓰시면 축복이라고 생각하고, 욥처럼 쓰시면 실패라고 생각한다면 어찌 그것을 통해서 일하시는 주님의 섭리를 보는 믿음의 눈이 있다 할 수 있으랴. 나사로처럼 이렇게, 욥처럼 저렇게 쓰시는 하나님의 섭리적 이유를 아는 것, 그래서 욥처럼 쓰셔도 낙심하지 않고, 나사로처럼 쓰셔도 뻐기지 않는 것, 이게 믿음이다. 주님에게서 초점을 놓치지 않는 것, 이게 믿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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