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절 속에 나사로의 표적이 보인다(요 11.1-16).

20220205(묵상)

 

 

 

6절 속에 나사로의 표적이 보인다.

Jn. 11.1-16

 

    본문 관찰

 

    사랑하시는 자가 병들었나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

       -유대로 다시 가자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들었도다

    나사로가 죽었느니라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

 

 

일곱 번째 표적

 

    “아버지께서 죽은 자들을 일으켜 살리심같이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자들을 살리느니라.”(5.21)

    “죽은 자들이 하나님의 아들의 음성을 들을 때가 오나니 곧 이때라

      듣는 자는 살아나리라.”(5.25)

 

1절의 베다니는 예루살렘에서 가까운 베다니다(18).

그러니까 10장의 베다니(40-42)와는 다른 곳이다. 주님은 나사로 때문에 죽음이 기다리는 유대로 다시 가시게 된다(7-10,16). 그 사이에 이틀이 더 지나고, 그리고 나사로는 죽는다(6,14). 마침내 다중적인 메시지가 동시에 향기를 발하는 일곱 번째 표적이 시작된다. 먼저 이 표적이 준비하고 있는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을 살펴보자. 이것은 11장에서 주님의 약속대로 밝히 빛을 발하게 될 것이다.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요.”(4a)

    “(이 병은) 하나님의 아들이 이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게 하려 함이라.”(4b)

    “그러나 내가 깨우러 가노라.”(11b)

    “이는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15a)

 

사랑하는 자친구인 나사로가 소개된다(3,11). 뿐만 아니라 그의 누이 마리아는 예고편으로 소개되는데(2, 12.1-8), 사실 이들 삼 남매들은 본래 주님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자들이었다(5). 요한은 나사로를 통해서는 4절이 이루어지며, 이것은 마리아가 장차 보리라의 믿음의 빛을 따라 주님의 장사(葬事, 12.7)를 준비한 것과 짝을 이룬다. 이렇게 해서 마침내 예수님의 공생애의 최종적인 목표(goal)인 십자가의 죽음을 이번 마지막 표적을 통해서 시작하게 된다. 표적은 다 공개되었다. 이제 남은 것은 그 표적이 그대로 실현되어지는 장차 보리라의 성취인 십자가다. 이것을 가장 극적으로 보여주는 사람이 바로 나사로다. 이러한 흔적은 벌써 오늘 본문에도 여러 곳에서 꿈틀거린다.

   

 

“(그러므로) 들으시고 그 계시던 곳에 이틀을 더 유하시고”(6)

 

왜 그러셨을까? 그 이유는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4a)는 주님의 말씀에서 드러난다. 헬라어 원문에는 5절과 6절 사이에 그러므로라는 접속사가 있다. 그렇다면 새 남매를 사랑하셨으므로 나사로가 병들었다는 전갈을 받으셨음에도(3) 이틀을 더 유하신다는 뜻이 된다. 나사로는 죽음마저도 하나님과 예수님의 영광을 이루고(4b), 제자들에게는 믿게 하려 함이라”(15)를 역시 이루고, 많은 유대인들에게도 예수님을 믿게 하는 계기가 되며(45, 12:11), 자신은 그리고 다시 살아난다. 이것을 이루는 이틀이다. 하지만 삼 남매뿐만 아니라 그 누구도 이 깊은 하나님의 섭리의 를 감히 이해할 수 있었겠는가(37).

이틀의 메시지는 참 많다. 유한한 인생은 무한하신 하나님의 섭리의 시간인 이 이틀을 결코 파악하지 못한다. 주님은 당신의 뜻을 이루는 시간으로 이틀을 쓰시겠다고 하시지만 그걸 모르는 인생은 그저 지치고, 피곤하고, 그래서 늦어지고, 끝나버리는 것처럼 생각하는 수준 밖에 되지 못하는 때가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고도 이틀을 더 미루시는 분, 자녀들의 급함과 필요를 아시면서도 이틀을 모르시는 척 하시는 분, 지금이 때라고 생각하는 성도들에게 이틀이 지나야 일하시겠다고 하시는 분, 그래서 우리의 때와 주님의 때는 언제나 다를 때가 더 많다. 그걸 모르니 우왕좌왕(右往左往)하다가 소중한 것들을 잃어버린다. 그게 어디 한 두 번이었던가 말이다.

주님은 이 이틀 속에 4절과 15절을 담으신다. 4(하나님)3(사람)과 타협하지 않는다. 3절의 때는 사람의 시간이요, 4절의 때는 하나님의 섭리가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시간이다. 이처럼 인시(人時)는 신시(神時)를 알지 못하며, 넘어서지 못하며, 역전시키지 못하며, 방해하지 못한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때에 일하시며, 5절의 성취자로서 4절의 부스러기를 남기시는 방식으로 일하신다. 사람은 주님의 일이 이루어지는 도구에 불과하다. 이처럼 십자가를 통해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은 주님이 주도적으로 성취하시며 인간은 그것을 이루는 하나의 표적의 도구가 될 뿐이다. 어느 누구도 십자가를 대신할 수 없다.

   

 

부스러기 묵상

 

표적(sign) 저 멀리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이다(47-53). 이들은 믿음의 사람들, 그러니까 나사로의 기적을 본 유대인들(45, 12.11), 제자들(15a), 주님의 반대편에 서서 예수를 죽이려고 모의”(謀議, 53)를 시작한 자들이다. 표적이 이렇게도 쓰인다는데 우선 놀라지 않을 수 없다. 참으로 기막힌 역설은 한 사람은 살아나고, 또 한 사람은 죽음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게 세상이다. 이게 당시 종교지도자들의 흉악하고도 이중적인 몰골이다. 그러면서도 성전을 붙들고, 율법을 붙들고,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예나 지금이나 이럴 수 있는 사람들은 항시 있다. 가장 영광이 꽃피우는 곳에서 가장 저주스런 바이러스가 어두움을 틈타고 있다.

다른 하나는 제자들이다. 이 깊은 섭리의 뜻과 장차 보리라의 꿈을 현실로 바꾸시는 주님을 모르는 만큼 제자들처럼 아우성(8,12-13,16)을 치게 되어 있다. 이게 어찌 제자들만의 언행(言行)이란 말인가. 우리가 모르고,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만큼, 그래서 주님이 말씀하셔도(4,7,9-11,14-15) 그것은 영적 절벽이다. 또 다른 하나는 바로 우리들이다. 어떤 면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그 말씀이 어려워서 그렇기도 하겠지만 본문의 시각에서 보자면 믿음이 없기 때문이다. 그것만큼 주님과 은혜와 섭리와 하나님의 영광으로부터 소외되어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다름 아닌 본문의 제자들처럼 말이다. 믿음이 없는 자들 말이다.

나사로는 죽었다(14). 그런데 그가 일한다. 이게 참 신기하다. 아니 살아있는 자도 아직 주님을 위해 일하기는커녕 오히려 일거리만 만들고 사는데 어찌된 게 죽은 나사로가 일을 한다. 마치 골짜기의 마른 뼈가 일하는 것처럼, 마른 막대기가 살구꽃이 피는 것으로 일하는 것처럼, 지렁이 같은 야곱이 일하는 것처럼 말이다. 다 끝난 것 같은데, 그래서 그는 이미 어두움(사망)에 들어간 것 같은데, 그러나 바로 그를 이틀 후에 주님이 -무덤에 있는 지 이미 나흘이다(17)- 쓰신다. 이 세상에는 죽어서 더 쓸모 있는 사람이 있다. 그런데 더 살려고 발버둥을 친다. 이게 우리가 아닌지, 조금은 겁난다. 나사로의 장례식에 참석하기 위해 주님의 뒤를 따라 베다니로 가는 길에 이런저런 생각이 이 마음을 흔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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