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법은 믿음 밖에 있는 사람을 정죄한다(요 10.31-42).

20220204b(묵상)

 

 

 

율법은 믿음 밖에 있는 사람을 정죄한다.

Jn. 10.31-42

 

    본문 관찰

 

    유대인들이 다시 돌을 들어(31)

    예수께서 대답하시되(32)

    유대인들이 대답하되(33): 신성모독

    예수께서 이르시되(34-38)

    그들이 다시 예수를 잡고자(39)

    다시 요단강 저편에 가사(40-42)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42)

  

 

신성모독

 

유대인들은 예수님께 그리스도이면 밝히 말씀하소서.”(24b)라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의 대답(25-30)을 듣고는 다시 돌을 들어 치려”(31) 한다. 말씀을 주었더니 돌로 갚겠단다. 그러자 주님은 32절로 응답하시고, 이에 대해 유대인들은 돌로 치려하는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네가 사람이 되어 자칭 하나님이라 함이로라.”(33b) 이것이 소위 참람죄(僭濫罪), 그러니까 신성모독죄라는 것이다. 요한이 즐겨 사용하는 묻고 대답하는 방식이 예수님의 대답(34-38)으로 계속된다. 하지만 결과는 다시 예수를 잡고자”(39a) 하는 것으로 끝난다. ‘선한 목자로서의 자기 계시는 팽팽한 긴장만을 고조시킨다.

 

 

다시 다시(31,39)

 

문제는 믿음이다(25,37-38). 믿음이 없으니까 다시’(19,31,39) 돌을 들어 치려 하고(8.59), 또 잡고자 할뿐이다(7.30,44). 어찌 된 것이 말씀을 그렇게 많이 들어도 이 모양일까. 유대인들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30)는 예수님의 말씀은 유대인들에게는 사람이면서 자기를 하나님이라고 하는 신성모독으로 들렸다. 이 보다 더 확실한 신성 모독죄는 있을 수 없다. 그래서 돌을 들어 주님을 치려고 한 것이다. 사실 이들은 맹인이 눈을 뜬 지극히 사실인 사건을 놓고도 이를 믿기는 커녕 인정하려고도 하지 비상식적인 사람들이었다(9). 손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무지한 사람들 아닌가. 그러니 돌을 들고 예수님을 향해 사람이 되어 지칭 하나님이라”(33b) 한다는 식으로 언행(言行)하고 있는 것이다. 역시 말씀 이후의 39절이 씁쓸하고 답답하다.

 

 

예수께서 대답하시되(32,35-38)

  

말씀하심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유를 들어 다시돌로 치고, 잡고자 하는 유대인들에게 주님은 묵묵히 말씀하시는 것 밖에 다른 일을 하지 않으신다. ‘다시와 다시그 사이에 말씀을 담으시는 주님을 생각해 본다. 그러자 이번에는 참람죄(僭濫罪), [신성모독죄]를 들고 나온다. 여전히 예수님이 사람으로 보이고, 하시는 말씀 또한 사람의 말로 들리고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주님은 말씀을 계속하실 뿐이다.

사실 유대인들이 이러는 것은 율법(구약)을 근거로 하고 있다. 놀라운 것은 예수님 역시 이 대목에서 구약을 인용하심으로써, 그러니까 동일한 율법을 통해서 저들의 영적 무지를 깨우치시고 계시다는 점이다.

 

    “너희 율법에 기록한 바 하지 아니하였느냐.”(34)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35a)

 

참으로 탁월한 지혜다. 성경으로 성경을 말한다. 주님은 시편을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시면서 그 가운데 한 구절을 인용하신다. “내가 너희를 신이라 하였노라.”(34; 82.6)는 말씀이 그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임에도 저희에게 하나님의 말씀이 임하면 하나님이라고 하셨는데 하물며 36절처럼 말하는 것으로 너희가 어찌 신성모독이라 하느냐.”(36b)는 것이다. 이것은 이미 율법이 사람을 하나님이라 한 것과 같은 맥락이라는 뜻의 말이다.

진리는 더 빛난다. 예수님은 사람 가운데 한 분으로서 말씀이 임하게 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 아버지께서 거룩하게 하사 세상에 보내신 자”(36a)이시다. 그리고 율법이 이미 예수님과 그분이 하신 말씀을 지지한다. 하지만 다시금 만일 믿으라 그리하면 알리라.”(37-38)는 말씀을 부연하심으로써 너무너무 돌처럼 차갑고 바위처럼 완고한 유대인들에게 끝까지 장차 보리라의 빛 앞으로 나아와 어두움을 벗어버릴 것을 촉구하신다. 그렇지만 여전히 유대인들은 못된 버릇(, 신성모독)을 포기하지 않는다(39a).

   

 

부스러기 묵상

 

주님의 다시’(7,40)는 유대인들의 그것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일단 516절과 18절부터 서서히 고조되어 온 긴장 국면이 잠시 한 템포 숨고르기를 한다. 예루살렘에서 베다니(22,40), 그러니까 요한의 처음 시간(사역)으로 돌아가 거기 거하신다. 아마도 주님 역시 초발심(初發心)을 어떤 형편에서도 변질시키시지 않으시려는 어떤 깊은 뜻이 있으셨다고 여겨진다. 41-42절을 두고 하는 묵상이다. 이곳 사람들은 요한의 증언이 참이라고 하면서 그리하여 거기서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으니라.”(42)는 믿음의 계보 안에 들어온다. 어떻든 이곳에서는 말씀이나 표적을 듣고 보고서 믿었더라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다. 그것만큼 예루살렘과 베다니의 상반됨을 선뜻 이해되지 않는다.

어디 그뿐인가? 무엇보다 유대인들의 이 집요한 불신앙이 오히려 신비에 가깝다. 참으로 믿음이 무엇인지를 두고두고 생각하며 10장 정거장에 서 있다. 이제 다시 복음은 어느 곳, 누구에게, 어떤 모양으로 찾아갈까? 이 변화되지 못한 유대인들은 또 어떤 모양으로 복음의 발목을 붙잡고서 예수행전의 길목을 가로막아 설 것인가? 이런 반복적인 불신앙의 사람들을 주님은 어떻게 상대하실까?

주님이 오신 10장까지의 길이 결코 순탄치만은 않았다는 것을 주목한다. 이 길을 먼저 가셨고, 그 뒤를 따르는 자로 우리(제자)를 부르셨다. 그런데 어찌 양탄자와 같은 길만을, 평안하고 편안한 길만을, 영광과 갈채가 빛나는 길만을 걸어가겠다고 할 수 있으랴. 주님 가신 그 길을 우리에게도 따라오라고 하심 만큼만이라도 이미 받은 축복은 충분하다.

아직 갈 길은 멀다. 40-42절은 가끔 만나는 정거장이다. 오늘(40-42)이라는 시간은 잠깐 머물다가 다시 일어나야 할 시간이다. 우리에게도 이 정거장이 종종 주어진다는 것만큼이 기쁘고 감사하고 황홀할 뿐이다. 지금이 그렇다. 아무리 치열한 영적 전투가 계속된다고 해도 종종 오늘의 정거장이 있기에 다시금 일어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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