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천국로(天國路): 전적인 헌신이다!(마 8.14-22)

20220130(양무리교회)

 

 

 

천국로(天國路): 전적인 헌신이다!

Matt. 8.14-22

 

본문 관찰

 

    [관찰1]

    A 예수께서 산에 올라가 앉으시니(5.1)

       X 산상수훈(5-7)

    A' 예수께서 산에서 내려 오시니(8.1)

       B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1b)

          한 나병환자가 나아와 주여(2- )

          한 백부장이 나아와 주여(5- )

          사람들이 예수께 오거늘(16- )

          한 서기관이 나아와 선생님이여(19- )

          제자 중에 또 한 사람이 주여(21- )

       B' 제자들이 따랐더니(23)

 

            [관찰2]

            베드로 장모의 열병 치유(14-17)

            “우리의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고 병을 짊어지셨도다.”(53.4)

             예수를 따르려면(18-22)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

             죽은 자이 그들의 죽은 자들을 장사하게 하고 너는 나를 따르라

  

 

너는 나를 따르라!

 

산상수훈(X)이 마쳐지고, 예수님이 산에서 내려오셨다(A’).

이제 산상수훈은 산 아래에서 그 실상을 드러내며 실현되기 시작했다. 무슨 말인가.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4.17)가 산 아래에서 이루어지기 시작한다는 말이다. 어떤 모습으로 인가. 또한 과연 그 누가 이 길을 따라 시작된 천국에로의 길을 주님과 동행할 것인가. 바로 산상수훈이 성취되는 것으로다. 흥미로운 것은 산상수훈의 결론부에서 하나님의 나라라는 생명으로 인도하는 문은 좁은 문일 것이라는, 그래서 그 길을 찾는 이가 적을 것이라 했다(7.13-14).

그런데 지금 8장의 분위기는 그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이 여기저기에서 주님을 따르겠다며 헌신을 고백한다(8.1). 놀랍게도 찾는 자가 많다. 그렇다면 이상하지 않은가. 그래서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20b)는 말씀과 나를 따르라!’(22b)는 말씀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동시에 무리와의 동행이 아닌 저들과 떨어진 건너편으로 가기’(18)를 명하시는 장면 역시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이렇듯 19-22절에는 주를 따르는 자를 향한 부르신 자의 어떤 의도와 기준이 들어있다.

주님은 어떤 환경 속에서도 제자의 길을 우선적으로 가기를 원하신다. 본문 18절 이하는 이 점을 매우 분명하게 제시하고 있다. 그렇다면 주를 따라 천국으로 들어가는 문이 만만하지 않을 것이 예고 되고 있는 것 아닌가: ‘원한다고 해서 들어갈 수 있다고 생각하느냐? 아니다. 그 나라의 실전편은 먼저 해결해야 할 게 있다. 기준과 원칙은 너희가 아니라 내가 정한다.’ 그럼 그 원칙은 무엇일까?

   

 

헌신은 믿음의 결단이다.

 

    “너는 나를 따르라!”(22b)

 

산상수훈 말씀과 치유 사역을 통해 구약(17, 53.4 참조)이 성취되는 것을 보면서 주님을 따르겠다는 마음이 생겼다면 이는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는데 이것이 바로 헌신이다.

 

[1] 19-20

그렇다면 지금 한 서기관은 주와 천국을 향한 헌신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 한 분만으로 족하다는 것을 그는 주를 따르겠다는 것으로 청원을 하고 있다(19): “선생님이여 어디로 가시든지 저는 따르리이다.”(19) 그런데 주님의 대답은 좀 싸늘하다: ‘나도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다.’ 나를 따라와도 성공이나, 재물이나, 명예나, 집이 생기거나, 어떤 자리가 보장되는 그런 게 아니다. 나를 따르는 것은 그야말로 개고생이다.

그럼 무엇인가. 시작된 천국으로 가는 좁은 길에는 먼저 편안한 장래의 보장, 장밋빛 환상을 버리라!(20) 하신다. 그러니까 좀 더 쉬운 말로 하면 고생문이 환하다. 그러니 각오했느냐!”는 뜻이다. 기독교의 헌신은 그 결과가 많은 사람들이 기대하는 영광과 승리의 유형만은 아니다. 때로 옥에 갇히고, 오해를 받고, 인간 관계에서 오는 낙심과 좌절, 실패, 고통, 절망 등의 것들이 오히려 따르는 자의 길목을 가로막고 서 있다.

이로써 주를 따르는 것, 곧 천국으로 인도하는 문은 마치 크고 그 길이 넓어 그리로 들어가는 자가 많은 길이 아니다는 쪽으로 20절은 방향을 잡는다. 땅과 하늘에 사는 모든 것들은 다 거처가 있으되 인자는 머리 둘 곳이 없다.”는 말씀은 그렇다면 십자가라는 가장 고상하고 가치있는 헌신이라는 결단과 선택이 먼저다는 말씀으로 보여진다.

 

[2] 21-22

또한 주님이 요구하시는 헌신은 가서 내 아버지를 장사하게 허락하옵소서.”(22)라는 사사로운 이 세상 일과의 구별이다. 하지만 22절의 예수님의 말씀 또한 좀 혼돈스럽다. 부모를 공경하라는 제5계명을 무시하라고 하신 것처럼 들려서다. 그러나 여기 장사는 유대 문화를 반영하는 말씀이다. 여기 장사는 이미 장사한 지 1년이 지난 유골을 유골함에 넣는 풍습인데 여기에는 당시 랍비들의 잘못된 장례관을 알게 되면 주님이 왜 이처럼 말씀하시는가를 알게 된다. 랍비들은 육체의 살이 썩은 후에 뼈만 남는 것은 죽은 자의 죄가 구속되는 성화의 과정이다고 가르쳤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장사가 죽은 자의 죄가 구속되는 성화의 과정이다는 말이다. 거두절미(去頭截尾)하고 이런 것은 성경에 없다. 그럼 거짓말이자 속임수다.

예수님은 죽은 자들을 장사하는 것과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은 아무런 연관이 없다 하신다. 이것은 구약 율법도 아니고 관습이자 풍습 수준이다. 이런 선() 장사 습관이 어떻게 후() 천국 복음을 잇는 것이 될 수 있다는 것인가. 인간의 속죄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 이루어진다. 이처럼 지금 시작된 천국은 오직 예수의 복음에 의해서다. 그렇지 않고 세상의 관습이나 제도나 문화나 풍습과 같은 그런 다른 것들을 더함으로써 좁은 문을 변형해서는 안 된다 하신다: ‘이것을 다 끊고 나를 따르라!’

   

 

헌신은 하나님의 축복이다.

 

예수님은 다시 천국을 헌신이라는 주제 안에서 산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할 천국은 좁은 문이라 말씀하신다. 아무리 많은 무리가 주를 따르겠다 하더라도 말이다. 이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언제나 인간이 감당할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헌신과 결단과 함께 시작된다. 이것을 아는 것이 믿음이다. 이처럼 믿음은 언제나 도전이요, 결단이다. 이것은 모험이나 도박과 같은 그런 시시한 것들과는 근본적으로 구별된다. 이것들은 확률이나 우연, 혹은 막연한 기대에서 비롯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헌신과 결단은 하나님을 믿는 믿음에서 비롯되기 때문이다.

나에게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 성경이 인정하는 믿음이 있다면 그 믿음은 언제나 합력하여 선을 이룬다. 비록 그 시작은 쓰고, 아프고, 고통스럽기까지 할 수 있으나 그 결과는 언제나 하나님의 위대한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으로 마무리되곤 한다. 이것을 보는 것이 믿음이다. 이렇듯 헌신과 축복은 항상 함께 간다. 19절과 21절을 넘어서는 자가 주를 따를 준비가 된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에서 보여지는 것처럼 인간적인 눈으로, 세상적인 가치 기준으로 볼 때에 좁은 문, 찾는 이가 적은 문은 전혀 희망의 빛이 없어 보인다. 그러나 그럴수록 하나님을 믿는 믿음으로 결단하고서 따라기만 하면 그 다음은 주님이 다 책임져 주신다. 이것이 믿음이다.

왜 믿음의 헌신이 하나님의 복인가?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당신의 영광을 위해 몸과 마음과 물질과 시간을 아낌없이 드리며 사는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계신다. 그 분은 지금도 살아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이 믿음이다. 말씀은 늘 이것을 약속한다. 이것은 천국에서만이 아니라 육신을 입고 사는 현세(現世)에서까지 받는다.

 

    “베드로가 여짜와 이르되 보소서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따랐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현세(現世)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를 백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來世)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8-30)

 

 

부스러기 묵상

 

    B 수많은 무리가 따르니라.”(1b)

       → B’ 제자들이 따랐더니”(23)

 

나는 무엇을 따르고 있는가.

헌신이란 자신의 모든 것을 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헌신은 자기 자신은 없고, 그러니 오직 예수님을 따라 사는 삶이다. 하지만 이 헌신에는 항상 위기가 찾아온다. 그럼에도 묵묵히 헌신의 자리를 지키는 것은 너는 나를 따르라!” 부르신 주님의 소명을 우선순위에 놓는 일에 실패하지 않을 때 가능하다.

주님은 단순히 소유의 있고 없음이 헌신의 조건이라 하신 것은 아니다. 더 중요한 것은 어쩌면 이런 것들이 제자의 진정한 헌신을 가로막는 장애물이 될 수 있다고 보신 것이다. 그랬기에 한 서기관의 헌신 맹세를 두고 이상하다 싶은 대답을 하시지 않았을까(19 20). 그때나 지금이나 세상으로 가는 길과 주님께로 가는 길은 공존한다. 산 아래의 8장이 지금 이를 보여준다. 그래서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단이다. 주님처럼 머리 둘 곳이 없을지라도 기뻐하며 사는 것, 죽은 자들처럼 헛수고하지 않고 주를 따르기로 결단하는 헌신이다. 아무리 봐도 부족하고 볼품 없는 언약한 그릇인데 너는 나를 따르라!” 부르시니 감사할 뿐이다. 그래서 믿고 따르면 된다. 이것이 주를 따르는 자로 부르심을 입은 자의 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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