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을 만난 이후가 빛나는 사람이 있다(요 9.13-34).

20220201(묵상)

 

 

 

예수님을 만난 이후가 빛나는 사람이 있다.

Jn. 9.13-34

 

    본문 관찰

 

    첫 번째 고백(12-17)

        부모의 대답(18-23)

    두 번째 고백(24-34)

   

 

여섯 번째 표적 이후

 

다시금 안식일 논쟁이 시작된다(14, 5.9-10,16).

소경이 눈을 뜬 것은 바리새인들 사이에 쟁론을 낳았다(16). 첫째 그룹은 예수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봐 하나님께로서 온 것이 아니라 말한다. 그리고 둘째 그룹은 죄인으로서 어떻게 이런 표적을 행하겠느냐는 주장이다. 결국 둘 다 예수님 = 죄인’(24)이라는 주장인 셈이다. 그러나 진짜 죄인은 자신들 아닌가. 그럼에도 계속해서 이처럼 헛소리를 하고 있다. 왜 이처럼 계속해서 믿음 밖을 맴돌며 변방에 머물러 서 있는가? 이제는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것을 너머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18)까지다. 급기야 사실도 인정하지 않으려 한다.

   

 

빛바랜 표적이기를 바라는 바리새인들

 

    “저가 소경으로 있다가 보게 된 것을 믿지 아니하고”(18)

    “누구든지 예수를 그리스도로 시인하는 자는 출교하기로 결의하였으므로”(22)

    “우리는 이 사람이 죄인인 줄 아노라.”(24b)

    “(너는 그의 제자이나) 우리는 모세의 제자라.”(28)

    “하나님이 모세에게는 말씀하신 줄을 우리가 알거니와”(29a)

    “이 사람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29b)

    “네가 온전히 죄 가운데서 나서 우리를 가르치느냐.”(34)

 

바리새인들은 표적도, 예수님도, 맹인이었던 사람도 믿지 않는다. 예수님 안에 기적이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의도적으로 폄하(貶下)한다. 오직 자기들에게 유리한 진술을 확보하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다. 도대체 사실조차 인정하려고 들지 않는다. 맹인이었다가 보게 되었는데도 이 사실을 부정하고 믿지 않는다. 어찌된 사람들일까, 연구 대상이다 싶다. 이처럼 인간이 은혜를 떠나면 이럴 수 있구나 싶은 게 영 그렇다.

이렇듯 누가 잘되는 꼴을 못보는 사람들이 있다. 9장의 맹인은 날 때부터 맹인된 사람이 저가 장성하였으니”(1,21,23), 얼추 수 십 년을 빛 아닌 어두움에서, 예수님의 말씀대로 라면 4-5절 반대편에서 살아왔었다. 그런 그가 예수님을 만나 세상의 빛’(5, 8.12)이신 예수님의 은총 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그럼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 -비록 겉으로라도 말이다.- 축하해 주고, 함께 기뻐해 주고, 그런 다음에 뭐 자기들의 속셈을 내비쳤다면 조금이나마 덜 미웠을 텐데 어찌된 게 처음부터 주어 생략이다. 마음이 구부러진 인생의 단면이다. 모세라는 생명 없는 껍질만 붙들고 있고(29a), 뭘 안다고 하면서 진짜 진리는 모르고 있고(29b), 맹인이었던 사람과 예수님마저 가르치고 고쳐보려고 갖은 수단을 다 부리면서 정작 자기들은 배우려는 마음조차 없는(34) 참으로 서글픈 인생들이다. 교만하고 목이 곧은 인생의 쓴뿌리가 아닌가.

 

 

소경의 신앙고백

 

    “예수라 하는 그 사람이 하기에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노라.”(11,15)

    “(그가 어디 있는지) 알지 못하노라.”(12)

    “선지자니이다.”(17b)

    “그가 죄인인지 내가 알지 못하나 .”(25a)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맹인으로 있다가 지금 보는 그것이니이다.”(25b)

    “당신들도 그의 제자가 되려 하나이까.”(27b)

    “이상하다 당신들은 그가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는도다.”(30)

   “하나님이 죄인의 말을 듣지 아니하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31a)

    “하나님이 경건하여 그의 뜻대로 행하는 자의 말은 들으시는 줄을 우리가 아나이다.”(31b)

    “창세 이후로 맹인으로 난 자의 눈을 뜨게 하였다 함을 듣지 못하였으니”(32)

    “이 사람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지 아니하였으면 아무 일도 할 수 없으리이다.”(33)

 

본문은 표적을 빛바라게 만드는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다. 언제나 신앙의 현장(field)에는 맹인이었다가 은혜를 받은 사람들이 있고,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높이며 증거한다. 자꾸만 깊어지는 불신(不信)이라는 불치병을 앓고 있는 세상에도 믿음이라는 표적의 향기는 도도한 빛으로 흐른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이 늘 그렇다. 바리새인들의 틈바구니에서도 자신의 현재됨을 그리스도 안에서 간증하며 그것을 신앙으로 고백하는 사람들은 늘 있어 왔다. 그는 얽매이기 쉬운 모든 죄의 짐을 벗어버리고 세상을 비추는 예수님의 ’(5) 앞으로 나아온다.

무엇보다도 그는 예수님께서 고치셨다는 것을 분명히 고백한다. 일단 그는 예수라 하는 그 사람’(11,15)에서 시작한다. 그리고 너는 그를 어떠한 사람이라 하느냐?”(17)라고 묻는 바리새인들의 질문에 곧바로 선지자니이다.”(17b)라고 대답한다. 그는 맹인이었기에 아직 예수님을 본 적이 없다. 예수님께서 먼저 1절에서 그를 보셨고, 그분의 3-5절의 말씀을 들었다. 그가 찾아간 것도, 무엇을 요청한 것도 아니다. 말씀을 듣고 6-7절의 명령을 따라 행했는데 보게 되었을 뿐이다. 그런데 표적 이후에 그는 놀랍게도 예수님을 선지자로 고백하게 된다. 그리고 본문은 표적 이후의 그의 언행(言行)이다. 이처럼 그는 표적 이후에 모든 것이 바뀌었다.

 

 

부스러기 묵상

 

표적 이후의 맹인이었던 사람의 언행을 좀 더 유심히 관찰해 보자.

30절의 의문은 참으로 절묘하다. ‘죄 가운데 나서’(43) 자신들을 가르치려 한다는 맹인은 눈을 뜨게 되어서 보고 있다(30). 그런데 뭔가를 안다는 자신들은(24b,29a) 이 표적을 행하신 예수님이 어디서 왔는지 알지 못하”(30)고 있다는 소리를 듣고 있다. 이게 묘하다는 말이다. 어디 그뿐인가? 맹인이었던 사람의 31-33절의 고백(위 맹인의 신앙고백 목록 참조)은 참으로 압권이다. 이 모든 게 표적을 통해서 변화된 맹인의 영성이다. 표적은 이와같이 놀라운 일을 시작하게 한다.

바리새인들과 맹인이었던 사람의 빛나는 대조는 요한의 깊이를 느끼게 하는 대목이다. 이 사람은 표적 이후에 아직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다(12). 표적이 인도한 것은 33절까지다. 그리고 바리새인들로부터 쫓겨나는 것까지다 : “이에 쫓아내어 보내니라.”(34b) 은혜를 받은 사람이 누구나에게 환영받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예수님은 그를 빛의 세계로 인도하셨는데 오히려 바리새인들(세상)은 그를 거부한다. 과연 그가 어떻게 될 것인지 좀 더 지켜볼 일이다(35- ). 표적 이후에 장차 보리라’(1.42,50-51)의 예수님의 꿈이 어떻게 이 사람에게 성취되는가를 주목한다. 표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이 기적은 주님이 말씀을 통해서 완성하실 것이다. 이것이 표적이 갖는 또 다른 빛깔이다.

맹인이었던 사람에게 갈채를 보낸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표적의 체험 세계를 굳세게 지켜나가는 그의 신앙에서 참 많은 것을 생각하게 된다. 그는 참으로 당당하다. 종교지도자들 앞에서도 전혀 위축되지 않는다. 할 말을 자신 있게 다 한다. 모르는 것은 모르지만(12,25a) 그러나 자신이 이 표적을 통해서 알게 된 사실에 대해서는 목숨의 위기 앞에서도(22-23) 담대하게 외친다. 어디서 이 힘이 나올까? 그는 분명 실로암 못에 가서 씻으라!”(7a)는 말씀을 따라가서 씻고 보게 된 이후에 이처럼 변화되었다. 7절은 그의 인생에 전환점이다. 이런 역사하심이 우리 안에도 시작되고, 천국까지 가는 길목에서 언제나 정거장처럼 만나게 되는 부스러기들이 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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