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의 뿌리를 해부하면 마귀가 보인다(요 8.31-47).

20220129(묵상)

 

 

 

불신앙의 뿌리를 해부하면 마귀가 보인다.

Jn. 8.31-47

 

    본문 관찰

 

    믿는 유대인들에게 이르시되(31-32)

    불신 유대인들이 대답하되(33,39a,41b)

    예수께서 대답하시되(34-38,39b-41a,42-47)

  

 

공존의 그늘

 

신앙과 불신앙이 반전을 거듭한다.

또 다시 30-32절이 불신앙의 저희에게 포위된다. 자꾸만 8장의 흐름을 역류시키고자 물밑에서 끈질긴 훼방을 계속한다. 이들은 결코 자기들의 정체(identity)를 스스로 드러내지 않는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이것이 비밀일 수는 없다. 주께서 마침내 메스를 드시고 저희의 어두움을 들추어 내신다. 마침내 이들의 뿌리가 밝혀지기 시작한다. 516절에서부터 시작된 어두움의 정체는 마귀(44). 그러고 보니까 그래서 믿지 않았고, 그렇기 때문에 사사건건(事事件件) 시비를 걸고, 그것도 부족해서 예수님을 죽이기 위한 음모를 518절 이후부터 줄기차게 진행해 오고 있었구나!

   

 

믿음_제자_진리_자유

 

그러므로’(31a)는 앞 30절과 연결된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에게 31-32절을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내 말에 거하면이라는 말씀에서 알 수 있듯이 주님께로 삶의 전부를 이동(shift)하는 것이다. 예수 안에서 사는 거다. 말씀 안에 거주하는 것이다. 진리의 지배를 받는 것이다. 예수님과 교제하는 것이다. 이것이 제자됨이다. 이는 믿음에 따른 선물이다. 30절이므로 31-32절이다. 믿는 자에게, 예수님 안에 거하는 자에게, 제자에게 또 다른 은총의 빛이 약속된다. 이는 진리를 아는 복이다.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이 현실로 임하게 되는 기적이 진리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는 것만큼 알게 되고, 보게 되고, 얻게 될 것이다. 이를 통해 믿음의 사람은 자유의 항구에 입항(入港)하는 것이다.

이것이 믿는 자에게 약속된 장차 보리라의 비전이다. 주님은 거기까지 당신을 믿는 자들을 이끄신다. 주님 안에는 자유함이 있다. 이게 진리의 특징이며, 제자들에게 약속된 축복의 장이다. 주님께 거하면 이것들이 이루어진다. 얼마나 신나는 일인가. 이를 믿음의 눈으로 볼 수 있고, 깨달을 수 있고, 알 수 있고, 누릴 수 있고, 얻을 수 있으니 말이다. 주님은 나에게도 진리는 아는 은혜와 영적 자유함의 선물을 참 많이도 주셨다. 값없이 주시는 은혜의 선물을 믿음으로 받기만 했는데 당신 안으로 나를 인도하시더니 이 부족하고 못난 자식을 제자 삼으셨다. 그리고 비록 아직 멀디 먼 영적 항로를 따라가는 초보자이지만 빛의 진리를 밝히 보여주시며, 예수 안에서 누리는 무한한 자유함의 비밀을 가득 부어주셨다. 그것만큼 나에게도 114절이 조금씩 보여지는 게 아닌가 싶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너희Identity

 

하지만 불행하게도 너희로 대표되는 불신자들은 여전히 30-32절의 은총 밖에서, 영적 어두움의 땅에서 살아간다. 그들은 13,19,22,25,27절의 줄을 놓지 않고서 또 다시 33,39,41절의 죄로 어두워진 불신앙의 편에 선다. 예수님이 직접 하시는 진리의 말씀을 들어도 말이다. 왜 이럴까?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렇게 살아가기로 아예 작정한 것일까? 516,18절에서 시작되어 이제는 거대한 세력으로 진리의 가는 길을 가로막는 너희는 누구인가?

 

    ① 남의 종이 된 적이 없거늘 어찌하여 우리가 자유롭게 되리라 하느냐.”(33)

    ② 죄를 범하는 자마다 죄의 종이라.”(34)

    ③ 내 말이 너희 안에 있을 곳이 없으므로 .”(37b)

    ④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느니라.”(38b,41a)

    ⑤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으려 하는도다.”(40a)

    ⑥ 하나님이 너희 아버지였으면 너희가 나를 사랑하였으리니 .”(42a)

    ⑦ 내 말을 깨닫지 못하는 것은 내 말을 들을 줄 알지 못함이니라.”(43)

    ⑧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44a)

    ⑨ 내가 진리를 말하므로 너희가 나를 믿지 아니하는도다.”(45)

    ⑩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

 

주님의 말씀에 따르면 그들이 이럴 수 밖에 없는 이유의 뿌리는 마귀의 자식이기 때문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44a) 마침내 저희의 [영적 유전자지도]가 밝혀진 셈이다. 그래서 너희 아비에게서 들은 것을 행하”(38b), “너희 아비가 행한 일들을”(41) 하고, “너희 아비의 욕심대로 너희도 행하고자 하”(44a)는 것이다. 그러니까 깨닫지 못하고(①⑦), 말씀을 받지 않고(), 예수님을 믿지 않고(), 진리를 듣지 않고(), 주님을 사랑하기는커녕(), 오히려 죽이려 하는() 죄를 범함으로써 저희 스스로가 죄의 종’()임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예수님이 밝히신 저희의 영적 유전자 지도 작성’(gene mapping)을 위한 하나의 단초다.

저희는 이처럼 아버지가 다른 자식이다. 그런데도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이라”(39a), “아버지는 한 분뿐이시니 곧 하나님이시로다”(41b)라며 여전히 친자(親子) 행세를 한다. 그러면서 그 증거로 율법을 붙들고 있고, 성전을 출입하고, 하나님을 이야기한다. 하지만 보이는 성전에는 거할 지는 모르지만 저 영원한 집에는 -‘나의 가는 곳’(21b)- 결코 들어오지 못한다: “종은 영원히 집에 거하지 못하되 아들은 영원히 거하나니”(35) 이들은 결국 죄 가운데 죽겠고”(21)의 집행이 임박하고 있을 뿐이다. 예수님은 조금 더’(7.33a) 이 땅에 계실 것이다. 마침내 만나지도, 주님 계신 곳에 오지도 못하는 그날이 가까이 왔다(7.33-34). 그래서 줄기차게 믿음을 말씀하신다: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b)

   

 

부스러기 묵상

 

아버지(‘’)가 다르면 이렇게 사는구나 싶다.

그래서 뿌리가 중요하다. 근본이 중요하다. 종교성으로 따지면이야 두 번째 가라면 서러울 저희들 아닌가. 그런데 허울 좋게도 의식과 관습과 제도와 형식과 모양과 전통을 따라 하나님이 어떻고, 성전이 어떻고, 진리가 어떻고, 제사가 어떻고, 뭐 이런저런 소리들을 해 낼 수 있다는 점, 지금 저희가 지금 우리 시대에도 이처럼 살아가는 자들의 예(sample)가 아닌가.

그래서 믿음이다. 예수님을 믿지 않으면 저희에게는 소망이 없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입양(入養)될 아무 근거가 없다. 오직 이 일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은혜로 주어지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그런데 예수님을 믿지 아니한다면 길은 없지 않은가. 이는 혈통이나 육정이나 사람의 뜻으로 되지 않는다(1.12-13). 그럼에도 우리 아버지는 아브라함”(39a)이라는, 그리고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이것들이 적절하게 섞인 제도와 관습과 전통과 형식만을 붙들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할 뿐이다.

결국 믿음밖에 서 있기에 그 끝은 죽음이다: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4b) 이 때는 임박했다. 집 나간 탕자는 혈통적인 아들일 뿐이다. 지금 저희가 그렇다. 아브라함의 혈통이라고 해서 다 구원 받는 것은 아니다. 구원은 이처럼 자동적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마귀의 자녀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돌아와야 한다. 아버지에게로 돌아올 때에만이 회복이 있다. 이게 믿음이다. 누가 진짜 아버지께 속한 자(30-32)이고, 그렇지 않은 자(33,39a,41b)인가:

 

    “하나님께 속한 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나니

      너희가 듣지 아니함은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음이로다.”(47)

 

내 아비가 마귀가 아니고 하나님아버지인 것은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것은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자이기 때문이다. 오늘도 말씀을 듣고 있다. 믿는 자에게 주시는 말씀(31-32)이 그대로 내 안에 양식이 된다. 한편 오늘도 이 진리의 말씀을 거부하며 44절 편에 서 있는 불쌍한 저희의 몰골을 생각할 때 마음이 아프다. ‘거짓의 아비’(44)인 마귀의 자녀로 살아가는 어두운 영혼들을 어찌할까. 해야할 일은 분명하다. 저들이 믿든 믿지 않든 복음을 증거하는 일이다. 예수님도 이 일을 중단하지 않으신다. 516,18절부터 시작된 거대한 마귀의 세력 앞에서도 이에 굴하지 않으시고 진리의 말씀으로 정면 돌파를 하고 계신다.

주님이 그러하셨다면 그의 자녀인 우리 역시 이처럼 살아야 한다. 주님은 이미 예고된 고난의 길을 이처럼 당당하게 가신다. 우리 역시 그 뒤를 따르는 자로 부르심을 받았다. 그걸 위해 오늘을 사는 것 아닌가. 지금은 내 아버지가 주님이심을 증거하며 살아갈 때다. 이게 믿음이다. 이게 제자다. 이게 진리를 아는 자다. 나는 이 진리를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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