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요 8.21-30).

20220128(묵상)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난다.

Jn. 8.21-30

 

    본문 관찰

 

    내가 가리니 내가 가는 곳에는 너희가 오지 못하리라(21)

    그가 자결하려는가?(22)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23-24)

    네가 누구냐?(25a)

    내가 그에게 들은 그것을 세상에게 말하노라(25b-26)

    그들은 깨닫지 못하더라(27)

    너희가 인자를 든 후에 알리라(28-29)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30)

 

 

불신 vs 믿음

 

21절은 예수님께서 다시’(7.33-34) 말씀하신 내용이다.

계속되는 말씀에 13절과 19절로 밖에 대답할 줄 모르는 유대인들이기 때문이다. 이처럼 다시 말씀하셨어도 결과는 마찬가지로 22절과 25절로 응답하고 있을 뿐이다. 그럼 도대체 왜 이럴까? 요한은 이 부분을 결코 놓치지 않고 통찰한다: “그들은 아버지를 가리켜 말씀하신 줄을 깨닫지 못하더라.”(27) 진리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하늘 양식이 비같이 임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님의 말씀에 계속해서 우문(愚問)과 오답(誤答)만을 반복한다. 소위 주제 파악이 안 된다. 주님이 뭘 말씀하시는지를 깨닫지 못한다. 그러니 바른 응답이 나오지 못할 밖에.

그러나 이 유대인들의 틈바구니에서도 믿더라”(30)로 응답하는 사람들이 있다. 중요한 것은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30)이다. 본문에 흐르는 이 두 기류를 따라 묵상을 시작한다.

   

 

그들은 깨닫지 못하더라(21-27).

 

죄 가운데서 죽겠고”(21a), 나의 가는 곳’, 즉 하나님의 나라에 오지 못하는 자들은 누구인가? 앞서 13절과 19절로 대답한 사람들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말씀하시는 21절에 22절로 대답할 수 밖에 없다. 이들이 바로 불신자의 계보를 이어가는 사람들이다. 21절의 사망 선고와 같은 -“너희 죄 가운데서 죽겠고”(21.24)- 말씀을 불신자들은 계속해서 듣게 되는가? 그 대답이 23-24절에 하신 주님의 말씀의 요지다.

 

    “너희는 아래에서 났고”(23a)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였고”(23a)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24b)

 

그러니 계속해서 네가 누구냐?”(25a)며 진리 주변을 빙빙 돈다. 도대체 말귀를 알아듣지 못한다. 이는 23-24절 때문이다. 이 세상(‘아래’)에서는 결코 저 세상(‘’)을 결코 알 수 없다. 믿음은 이처럼 이 땅에서 어떻게 생기거나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여 온 자”(25)그에게서 들은 그것을 세상에 말하”(26b)는 자인 줄 믿지 아니하면”(24b) 그 결과는 죄 가운데 죽는 것뿐이다. 이것을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고,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입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고, 또 깨닫지 못한다: “그들은 깨닫지 못하더라.”(27)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거듭나지 아니하면(3.3,5)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고, 위에 속한 자의 받을 영생을 얻을 수 없다.

   

 

이 말씀을 하시매 믿더라(28-30).

 

요한복음에서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게 되는 곳 가운데 하나다(30). 30절의 사람들은 27절과 다른 청중이 아니다. 동일한 장소에서, 동일한 메시지를, 동일한 분으로부터 듣고 있다. 그런데 어떤 이는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데, 그 중에서 많은 사람이예수님을 믿게 되는 일이 일어난다. 이런 일은 예나 지금이나 어찌 그리 동일한 지 모르겠다.

조금 더 촘촘하게 묵상해 보면 참으로 깊게 생각해 보아야 할 소중한 메시지가 숨어 있다. 이는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을 믿는 일이 일어나는 곳을 따라가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요한은 이 복음서를 쓴 목적에서 밝히고 있듯이(20.31) 그의 관심은 믿음생명이다. 믿음의 씨앗은 생명을 잉태하는데, 그럼 이 믿음이 과연 무엇으로부터 임하는가를 요한은 믿음의 사람들의 행적을 기록하면서 이를 증거하고 있다.

 

    ① 안드레 - “우리가 메시야를 만났다.”(1.41)

    ② 빌립 - “모세가 율법에 기록하였고

                    여러 선지자가 기록한 그이를 우리가 만났으니”(1.45)

    ③ 나다나엘 - “당신은 하나님의 아들이시요, 내가 하므로 믿느냐.”(1.49-50)

    ④ 제자들 - “예수께서 이 첫 표적을 제자들이 그를 믿으니라.”(2.11)

    ⑤ 예루살렘 사람들 - “그의 행하시는 표적을 보고 그의 이름을 믿었으나”(2.23)

    ⑥ 사마리아 여인 - “이는 그리스도가 아니냐.”(4.29)

    ⑦ 사마리아 사람들

        - “여자의 말이 증언하므로 예수를 믿는지라.”(4.39)

        - “예수의 말씀으로 말미암아 믿는 자가 더욱 많아

             친히 듣고 구주신 줄 앎이라(4.41-42)

    ⑧ 왕의 신하(표적 이전) - “그 사람이 예수께서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니”(4.50)

    ⑨ 왕의 신하의 가정(표적 이후) - “자기와 그 온 집안이 다 믿으니라.”(4.53)

    ⑩ 베드로 -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9)

    ⑪ 초막절 성전설교의 청중들 - “무리 중의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고”(7.31)

    ⑫ 초막절 이후 성전설교 - “이 말씀을 하시매 많은 사람이 믿더라.”(8.30)

 

8장까지 오면서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일곱 개의 표적 가운데 이미 5개가 소개되었다(가나의 혼인잔치 2.1-11, 신하의 아들 치료 4.46-54, 베데스다 연못의 치료 5.1-9, 오병이어의 기적 6.1-13, 바다 위를 걸으심 6.16-21). 예수님의 40여 개의 기적 가운데 이것만을 요한이 취한 것은 이 책의 기록 목적(20.31)에서 밝히듯 이를 통해 예수를 믿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표적이 있은 지 훨씬 수 십 년이 지난 이후에 이 책을 읽게 된 독자들은 뒤로하고, 이 표적의 당사자들과 그것을 함께 보았던 사람들의 표적 현장에서는 믿음으로 나아온 경우(④⑤⑨)가 별로 없다. 오히려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듣고, 말씀으로 말미암아 예수님을 믿게 된 경우가 더 많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가? 이러한 사실의 가장 바른 이해는 무엇일까? 물론 표적이 말씀을 듣는 일에 아무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은 예수님을 알고, 따르고, 말씀을 들을 수 있는 복음의 환경을 만드는 일에,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예수님을 믿도록 하였다. 하지만 더 많은 경우에 믿음은 말씀을 들음에서 비롯되고 있음을 결코 간과할 수 없다. 바울 역시 이 진리를 보다 분명히 한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부스러기 묵상

 

대다수의 유대인들, 특히 바리새인들과 서기관들 역시 말씀을 들었다.

그런데 왜 이들을 포함한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지 못할까? 예수님을 믿는다는 게 무엇일까. 사실 이것은 평생 동안 붙들어야 할 주제다. 인간이 얼마나 영적 어둠에 있으면(1.5, 3.19-20), 거듭남 밖에 있으면(3.3,5), 자유하게 하는 진리가 아니라 오해한 율법에 종속되어 있으면(5.16,18, 7.19,22-23,49,52, 8.4-6), 심판이 아닌 구원을 위해서 오신 주님을(3.17) 믿지 않음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은혜를 버릴까? 이것이 안타깝다. 무엇보다 예수님의 직접설교말씀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심판아래 있다는 게(21,23-24, 3.18) 두고두고 생각하게 하는 대목이다.

사람들은 흔히 요한이 소개하는 표적같은 기적이 오늘도 일어난다면 믿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을 어느 정도는 신뢰할 수 없다. 이미 예수님 시대에 증명된 게 아닌가. 이것보다 더 큰 기적은 죄인이 회개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 이것이 더 위대한 기적이다. 38년 동안 병자로 있다가 걸어 다니는 기적(5.1-9)은 불과 몇 십 년이면 끝난다. 하지만 믿음으로 말미암은 구원은 글자 그대로 영생이다. 이 보다 더 큰 기적을 바라는 것은 어찌보면 얌체다 싶다. 이미 믿는 자는 엄청난 기적을 통과한 사람이라는 것, 이게 얼마나 자연스럽게 믿어지고, 알아지고, 아멘이 되는지, 이게 다 기적이다.

요한은 이 기적을 말씀이라는 앵글을 통해서 더 집중적으로 조명한다. 말씀은 믿음을 잉태하는 씨앗이다. 믿음은 이 말씀을 통해 자라고 열매 맺는다. 그 열매를 통해 진짜 믿음인가를 알게 된다: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이러므로 그들의 열매로 그들을 알리라.”(7.16-20) 요한복음에 등장하는 사람들에게서도 이 말씀은 그대로 적용된다. 믿는 자와 그렇지 않는 자가 예수님 앞에서 어떤 생활을 하고 있고, 어떤 언행(言行)을 하고 있으며, 자신을 어떻게 드러내고 있는가를 그들의 열매를 보면 알게 된다. 아무도 예외가 없다. 내 믿음의 기초는 무엇인가? 주님 앞에 다시금 벌거벗은 모습으로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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