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앙의 언덕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요 7.37-52).

20220126(묵상)

 

 

 

불신앙의 언덕에 생수의 강이 흐른다.

Jn. 7.37-52

 

    본문 관찰

 

    초막절 전(1-10)

    초막절 중(11-36)

    초막절 후(37-52)

       예수님(37-3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무리들(40-44): “예수로 말미암아 쟁론이 되니

       하속들(45-46):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

       종교지도자들(47-52):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

 

 

진정 당신은 목마른가?

 

7장은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사 가르치신 일을 증거한다.

이 일은 초막절 중간에 시작된다(14). 이미 살폈보았듯이 이 가르침을 받은 사람들은 유대인들(14-24), 예루살렘 사람들(25-31), 유대 종교지도자들(32-36)이다. 그리고 이들을 통칭할 때는 무리들’(12,20,31,32,40,43)이라는 대명사가 사용되고 있다. 본문은 성전설교’(초막절 강화)의 결론이라고 할 수 있는 명절 끝 날 곧 큰 날에 예수께서 서서 외쳐 이르시되로 시작되는 37-38절 말씀과, 이를 들은 무리들의 다양한 반응(40-44)을 소개한다. 뿐만 아니라 요한은 예수로 말미암아 무리 중에서 쟁론이 되니”(43)라고 증언하고 있다. 그리고 예수님을 죽이려는 종교지도자들의 간악한 음모를 과감하게 기술한다.

   

 

37-39

 

사실 무리들은 예수님의 설교를 듣기는 들었으나 자기식’(自己式, 내가복음, 5복음)대로 들었다. 그러니까 오히려 1,3-5,12,15,20,27,30,32,43-45,52절로 반응하였을 뿐이다. 주님은 이런 회중들을 보신다. 그리고 진단하신다. 그리고 그럼에도 그들을 초청하신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37)

 

주님은 7장의 회중들이 목마른 자들이라는 것을 아셨다. 그래서 이처럼 날뛴 것일까. 그럼에도 주님은 누구든지다 부르신다. 주께서 7장처럼 살아가는 자들의 영적 갈함을 채워 주시겠다는 말씀이다. 어제나 오늘이나 인생이 사는 곳은 물이 없어 기갈이 아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없어 기갈이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야 우리의 영적 목마름이 해결된다. 다른 길은 없다: “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보라 날이 이를지라 내가 기근을 땅에 보내리니 양식이 없어 주림이 아니며 물이 없어 갈함이 아니요 여호와의 말씀을 듣지 못한 기갈이라.”(8.11)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

 

주님은 여전히 믿는 자를 부르신다. 그리고 약속하신다. ‘믿는 자만이 7장의 황무지로부터 해방된다. 이 말씀은 우리 주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하신 말씀이다(39). 결국 성령을 받아야 한다. 믿음 없이, 영접함 없이, 빛 없이, 거듭남 없이, 생명의 떡 없이 살아가는 7장의 사람들은 지금 생수의 강 앞으로 나아와야만 한다(47.1-12 참조). 그래야만 진실로 우리 인생행로(人生行路)에서 만난 기갈이 해결된다.

주님은 오늘 말씀을 통해 나의 심령의 갈함을 해결할 수 있는 분은 오직 예수님 자신뿐이심을 확증하신다. 그것은 믿는 자가 받는 성령을 통해서만 해결된다. 그렇다면 내 스스로의 어떤 힘이나, 노력으로부터 근본적인 갈함을 해결할 수 없다는 말 아닌가. 그렇다. 주의 성령이 임하셔야 한다. 이것만이 살 길이다.

에스겔에서 성전에서 흘러나온 물(47.1-12)은 이제 성전이신 그리스도의 몸인 성전에서 흘러나와 우리에게 생명과 구원을 가져다 준다. 성전에서 흘러가는 곳마다 새롭게 살아난 것처럼(47.9,12) 이제 예수께서 생명이기 때문이다(37-39; 4.14).

 

 

40-44

 

설교를 들은 3 종류의 사람들이 등장한다. 똑같은 말씀을 들었는데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이처럼 각양각색(各樣各色)의 반응과 이에 따른 이유들을 보인다. 특이한 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을 가로막고 있는 42절이라는 장애물이고, 그것은 43절로 이어지고 있음이다. 좀 더 오래 머물러 있어 보고픈 부분이다.

 

    #반응들

       -선지자다.

       -그리스도다.

       -그리스도가 아니다.

    #이유들

       -어찌 갈릴리에서 나오겠느냐?

       -다윗의 씨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다윗의 살던 촌 베들레헴에서 나오리라 하지 아니하였느냐?

 

참 재미있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다라고 말했던 무리들이 들고 나왔던 근거다. 공교롭게도 성경에 이르기를”(42)이라는 표현에서처럼 말씀이었다. 이것은 대단한 흥미 꺼리가 아닐 수 없다. 예수님이 오실것을 기록한 성경을 가지고 이미 오신예수님을 거부하고 있다. 이처럼 자신들이 정당하다는 것의 증거로 성경을 꺼냈다는 점이다. 이 보다 더 대단한 역설(paradox)이 또 있을까. 예수님을 성경으로 거부한다!, 이게 사람이다. 영적으로 무지한 죄인이기에 그렇다. 여기서 몇 가지 교훈을 더 얻게 된다.

첫째, 나도 성경을 잘못 오해할 수 있다. 내가 성경을 인용하거나 알고 있다고 해서 자만(自慢)하면 안 된다. 자칫 내가복음이 될 가능성이 많다. 둘째, 지식(이성)은 믿을 것이 못된다. 사람들은 종종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의 파편들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에 이르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셋째, 말씀으로 말씀을 거부하고 있는 모습을 보라. 그래서 성경은 언제나 전체의 빛 아래서 이해되어야 한다. 부분적으로 아는 것이 이처럼 큰 오류를 낳을 수 있다. 나무를 보고 숲을 보지 못하면 이런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역시, “기독교란 무엇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하나님은 연구(탐구, 배움, 터득, 지식)를 통해 깨닫는 종교가 아니다. , 이교들처럼 명상을 통해 득도(得道)의 경지에 들어가면 진리를 알게 되는 그런 종교가 아니다. 하나님이 알려 주시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찾아오시지 아니하면, 하나님이 만나 주시지 아니하면, 그러니까 거듭나지 아니하면, 생명의 떡을 먹지 아니하면 결코 인간이 하나님을 알거나 발견할 수 없다.

   

 

45-52

 

이 와중에도 아랫사람들(하속들)은 좀 달랐다. 예수님을 잡으려고’(32) 갔던 그들도 그만 복음을 듣고 나서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 때까지 없었나이다.”(46) 오늘로 말하면 가족들을 위해 운전해 주러 따라 나왔다가 예배당에 들어온 길에 복음을 들은 것과 같다. 참으로 놀라운 것은 7장 같은 척박한 땅에도 믿음의 눈을 뜨는 사람들이(32,40-41), 낙수(落水)물이 바위를 뚫는 것처럼 변화의 기운을 맛본 일이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46). 그러나 반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점점 더 죄의 갑옷을 단단하게 입고서 진리를 대항하는 메아리 역시 만만치 않게 커져가고 있다.

 

    “너희도 미혹되었느냐?”(47)

    “당국자들이나 바리새인 중에 그를 믿는 이가 있느냐?”(48)

    “율법을 알지 못하는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

 

한 분은 성전에 서서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38) 축복하고 있는데, 그 동일한 성전에서, 그것도 종교지도자들이라는 사람들이 하는 말이 이 무리는 저주를 받은 자로다”(49)라는 저주를 하고 있다. 여러모로 7장은 혼돈이다.

   

 

부스러기 묵상

 

놀랍게도 7장에도 희망은 있다.

이 척박한 땅(1,3-5,12,15,20,27,30,32,43-45,52)에도 예수님이 서 계시기 때문이다. 성전에 서서 가르치시며 외치신다. 이것이 영적 황무지일지라도 변함없이 희망인 이유다. 이 희망은 31절을 지나 37-39절에서 절정에 이른다.

나는 영적 기갈을 느끼고 있지 않는가? 그런데 무엇으로 이 기갈을 해결하고 있는가? 어쩌면 아직 내가 예수님 외에 더 의지하고, 만족하고, 얻고 있는 그 무엇이 있기 때문에 기갈이 무엇인지조차 알지 못하고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아직은 예수 외에 대리 만족꺼리가 있기 때문에 우리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가 필요하지 않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렇게 살다가는 어느 날 고목이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순식간에, 일시에, 단번에 다시는 일어날 수 없는 파멸’(파국)의 시간 앞에 설 수도 있다. 그날이 오기 전에 말라 가는 내 영적인 뿌리에 예수의 생명수를 부어야 한다. 이것만이 살길이다.

포카리스웨트가 나를 깨어나게 한다.” 정말 그런가? 세상이 주는 것은 일시(찰라, 순간, 인공)적이다. 진정으로 타는 목마름이라는 영적 기갈을 해결할 수 없다. 잠시 잠깐 그것을 잊게 만드는 아편(마약)과 같다. 이처럼 만들어 낸 채워짐은 그것이 썰물처럼 빠져나갈 때 더 공허하고, 그래서 더 자극적이고 썬 어떤 것들을 찾게 만든다. 끝없는 악순환이 반복되어진다. 그리하여 결국 마지막 종점인 파멸에 이를 뿐이다. 사람들은 이러한 텅빈 충만을 무엇인가로 채워보겠다고 아우성친다. 그러나 육적인 것은 육신을 만족시킬 뿐이다. 세상적인 것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것을 위해 아스피린처럼 약간 효능이 있을 뿐이다. 그것도 잠깐!

하지만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들이 나의 영적 고갈을 해결해 줄 수 없다. 나는 이 진리를 믿는다. 일그러지고 깨어진 나의 영적 자존감을 과연 그 무엇으로 회복할 수 있을까? 다시 원점으로 돌아왔다. 그것은 무엇인가? 본문 37-38절이다. 다시 주님 앞에 선다. 주님이 주시는 생명수를 마셔야만 한다. 정말 가득 마셔야 한다. 다른 길은 없다. 이처럼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나아오는 길 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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