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요 14.27-31).

20220403(묵상)

  

 

 

평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Jn. 14.27-31

  

    본문 관찰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28).

    일이 일어날 때에 너희로 믿게 하려 함이라(29).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30).

    내가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31).

 

 

주의 평안입니까?

 

27절은 1절과 맥을 같이하면서도 26절에 이어지는 말씀이다.

성령님을 약속하시고(16-17), 그가 하실 일(25-26)을 말씀하시다가 다시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27a)를 말씀한다. 제자들을 향하신 주님의 목표는 평안이다. 그것만큼 근심(1) 평안(27)에로의 이동(shift)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 예수님의 부재 예고를 통해 흔들리는 제자들의 연약함이 주님의 눈에 들어왔고, 때문에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주님의 움직임이 빨라지고 있다.

 

 

27

 

평안은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것이지 제자들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27a) 특별히 주목하는 것은 예수님(18-20) 하나님(21-24) 성령님(25-26)을 소개하는 것에 이어서 선포되는 27절이다. 삼위일체 하나님은 제자들의 1절을 해결하신다. 이것은 27절의 평안으로 주어진다. 진정한 평안은 위로부터 임하는 선물이다. 주님이 값없이 주시는 은혜다. 사실 제자들이 한 일이란 근심뿐이다. 문제는 공생애의 막바지에 이르렀음에도 말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를 아셨고, 평안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신다.

주님이 주시는 평안의 수혜자인 제자들이 지불해야 할 몫은 믿음이다(1b,11-12). 무엇보다 평안은 위로부터 오는 것이기에 세상이 주는 것과는 차별적이다. 왜냐하면 세상은 평안을 위해 믿음을 요구하지 않기 때문이다. 진짜 평안은 결코 세상이 줄 수도, 만들 수도 없다. 그러기에 참 평안이 임하는 통로와 이것을 받는 제자()가 할 일이 있는 것 아닌가. 오직 믿음만이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27b)는 말씀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게 한다. 과연 누가 근심과 두려움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가. 그는 위로부터 값없이 주시는 평안의 선물을 받는 자이고, 그는 믿음의 사람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우리의 믿음을 귀하게 여기시는가를 새삼스럽게 깨닫는다.

 

 

28-29

 

평안의 주님을 만난 사람, 그 주님의 평안에 붙들린 사람, 평안이 위로부터 임하는 선물임을 믿는 사람은 28절의 말씀을 아멘으로 화답한다: “나를 사랑하였더라면 내가 아버지께로 감을 기뻐하였으리라.” 1절의 근심27절의 복음으로 해결된 사람은 예수님을 사랑하는 사람으로 성장해 가며, 동시에 예수님의 부재가 갖는 영적 의미를 믿고 알기에 기쁨으로 반응할 수 있다. 주님의 목표는 바로 거기까지 제자들이 믿음의 눈높이를 맞추는 것이고, 거기까지 영적으로 성장하기를 원하신다.

 

    “내가 갔다가 너희에게로 온다.”(28a)

 

예수님의 가심과 오심은 요한이 계속해서 반복되는 핵심적인 말씀 가운데 하나다. 가야만 오시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이치이고, 십자가의 죽으심 앞으로 가시는 것이야말로 주님이 부활을 통해 사망과 죄의 권세를 이기시게 된다. 이것은 실패도 아니고, 어쩔 수 없이 죽는 것도 아니고, 죽음 앞으로 가시는 것으로 끝나는 것도 아니고, 제자들의 반응처럼 슬픔과 근심으로 두려워 할 그런 일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주시는 평안을 믿음으로 받아 누리는 사람은 주님의 말씀처럼 들었나니 기뻐하였으리라”(28)로 반응하게 되어 있다. 주님의 죽으심이 결코 슬픔이나 만들어내는 도구가 아니라는 점 때문에 그렇다.

지금 주께서 제자들에게 거듭해서 강조하시는 것은 자신의 죽으심에 가져오는 파장을 바르게, 성경대로, 말씀대로, 믿음으로 눈으로, 삼위일체 하나님의 섭리하심대로 아멘 하는 것이다.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영적 원리이기 때문에 이를 이제 일이 일아나기 전에”(29a) 미리 말씀하신다. 어쩌면 평안은 29절처럼 이루어진 후에 제자들이 깨닫게 되고, 그때에야 믿음 앞으로 나아올 것 같다. 그만큼 아직 제자들은 근심과 믿음 사이에서 흔들리고 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그래서 30절이다.

 

 

30

  

역시 이 평안의 복음 앞을 가로막는 거대한 세력은 이 세상 임금’(12:31)인 사탄이다. 주께서 갔다 온다”(28a, 2-3)의 구속 사역의 무대에 사탄도 등장한다는 점을 결코 간과해서는 안 된다. 사탄은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의 메시야 사역을 방해하는 자로 복음이 가는 길을 가로막는다. 주님의 갔다가 온다’(28a)의 길목에 사탄이 자리를 잡고 있음은 예측하지 못한 것은 아니지만 이것은 과히 좋은 그림은 아니다.

그러나 사탄은 예수님과 동등한 위치도 아니고, 그럴 힘도 없으며, 그렇게 될 수도 없다: “그는 나를 어떻게 할 아무런 권한이 없다.”(30b, 표준새번역) 사탄은 결코 주님이 이루실 구속의 역사를 관계할 아무런 조건이 없다. 그는 지금까지 계속해서 주님의 메시야 사역을 방해하여 왔다. 하지만 십자가를 통해 주님이 영광을 얻을 때”(12.23-28)가 가까이 오면 올수록 주께서 친히 말씀하셨듯이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12.31, 16.11)하는 말씀의 성취가 임박하고 있는 것에 불과할 뿐이다. 사탄은 그런 존재다. 그의 실패는 창세기에서 이미 예고된 수순이었다(3.15).

 

 

부스러기 묵상

 

사탄은 결코 우리 주님의 적수가 되지 못한다.

그는 실패하기 위해 일하고 있고, 주님은 이미 승리하신 것을 거두고 계실 뿐이다. 승리하기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승리한 것을 성취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는 뜻이다. 그래서 주님은 이 치열해 보이는 영적 전투의 와중에서 31절처럼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 아닌가. 결코 흔들리는 제자들 때문에, 사탄의 방해 공작 때문에, 죽음이 기다리는 십자가 때문에 표류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목표는 더 분명할 뿐이다. 주님은 다음 두 가지를 세상에 알리시기를 원하신다. 그렇기 때문에 십자가로, 십자가로 나아가시는 것이다.

 

    “오직 내가 아버지를 사랑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오직 내가 아버지의 명하신 대로 행하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 함이로라.”

 

주님은 초점은 오직 하나님 아버지시다. 참 아름다운 그림이 아닐 수 없다. 서로 자리 싸움에 여념이 없는 제자들과 사탄의 후예가 되는 길을 택한 가룟 유다처럼 적()은 내부에 있고(13), 또 근심하며 흔들리는 제자들과 부화뇌동(附和雷同) 하는 이 세상 임금의 출현으로 미묘한 긴장이 계속되는(14) 치열한 영적 전투 바로 그 와중에도 주님은 변함없이 아버지 하나님을 시야에서 놓치지 않는다. 하나님을 세상에 알려야 하겠다는 일념으로 십자가로 가는 길을 중단하지 않으신다. 주님의 마음에는 이처럼 늘 아버지가 자리하고 계심을 본다.

내 심령에도 당신의 평안을 주셔서 나를 통해서도 주님의 영광이 세상에 전파되기를 소망한다. 이 일을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이루어주시겠다니 얼마나 복된 일인가. 성부는 성자를 통해서, 성자는 성부의 뜻을 이루어 드림으로, 성령은 약속으로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의 일에 참여하신다. 이 영광스러움의 부스러기를 은혜로 말미암아 주시는 주님을 만나는 묵상, 참 귀하고 복된 시간들이다. 이 평안이 내 심령에서 자라고 있다.

 

   

제목 날짜
복음은 세상을 거꾸로 사는 것이다(요 15.18-27). 2022.04.04
가지는 나무의 사랑, 그게 희망이다(요 15.9-17). 2022.04.03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거함으로 열매 맺는다(요 15.1-8). 2022.04.03
26 심판 안내장, 안식 초대장(마 11.20-30) 2022.04.02
평안, 삼위일체 하나님으로부터 온다(요 14.27-31). 2022.03.30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보내신다(요 14.15-26). 2022.03.30
예수님을 믿는 자만이 기도를 섬길 수 있다(요 14.12-14). 2022.03.30
도마와 빌립의 해답이 믿음임을 주님은 아신다(요 14.1-11). 2022.03.30
25 요한마저 흔들릴 때, 어찌할까?(마 11.1-19) 2022.03.26
*24 제자도③ - 약 속(마10.24-42) 2022.03.21
23 제자도② - 파송 그 이후, 고난(마 10.16-23) 2022.03.17
22 제자도① - 부르심과 파송, 그 마음(마 10.1-15) 2022.03.14
21 천국로(天國路): 믿음을 사용하십시오(마 9.18-38). 2022.03.05
20 천국로(天國路): 나는 누구인가?(마 9.1-17) 2022.02.19
제자는 ‘지금은’과 ‘후에는’을 사랑으로 완성한다(요 13.31-38). 2022.02.14
가룟 유다, 그 정체를 추적한다(요 13.21-30). 2022.02.13
주님의 언행(言行)이 나의 본이다(요 13.12-20). 2022.02.13
섬김의 종은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는다(요 13.1-11). 2022.02.13
19 천국로(天國路): 가다라 지방은 거절하다(마 8.28-34). 2022.02.12
‘장차 … 보리라’의 길목에서 부른 노래가 있다(요 12.44-50). 2022.02.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