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는 ‘지금은’과 ‘후에는’을 사랑으로 완성한다(요 13.31-38).

20220217(묵상)

 

 

 

제자는 지금은후에는을 사랑으로 완성한다.

Jn. 13.31-38

 

    본문 관찰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31-35).

    베드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36a).

    예수님: 지금은 따라 올 수 없으니 후에는 따라오리라(36b).

    베드로: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

    예수님: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否認)하리라(38).

 

 

서로 사랑하라!

 

    “이제 나는 너희에게 새 계명을 준다. 서로 사랑하여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과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모든 사람이 그것으로써 너희가 나의 제자인 줄을 알게 될 것이다.”

      (34-35, 표준새번역)

 

유다가 27절의 지옥문으로 들어갈수록 주님은 하나님의 영광으로 빛난다(31-32).

어떻든 유다의 언행에서마저 영광을 이루시는 주님이심을 본다. 영광은 평화와 긍정과 덧셈에서만 성취되는 것이 아니라 상처와 불화와 뺄셈에서도 주님의 영광이 이루어진다는 것을 주목한다. 한편 불행하게도 유다는 사탄의 대리인 행세를 자임한다. 이처럼 선과 악이, 하나님과 사탄이 팽팽한 긴장이 유지되고 있을 때 주님은 매우 중요한 선포를 하신다. 이게 유명한 34-35절 말씀이다. 주님은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셨다(1b,34). 믿음의 사람들을 말이다. 요한이 기록하고 있듯이 공생애의 전부를 주님은 이 사랑하는 자기 사람들을 위해 그 어떠한 불신앙의 파도가 휘몰아쳐도 묵묵히 여기까지 오셨다. 그리고 서로 사랑하라!” 말씀하신다.

앞에서 주님은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을 통해 사랑의 본을 보여주셨고(1-17), 이처럼 서로 섬기고, 서로 헌신하는 것이 곧 서로 사랑하는 것임을 친히 모범을 보이심으로 깨우치셨다. 사랑은 당사자들 사이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게까지 그 영향력을 미친다. 사랑함으로 내가 주님의 제자임을 모든 사람이 알게 된다는 약속이 내 안에서도 열매맺기를 소망한다.

   

 

베드로의 그림(36-38)

 

주님의 33절 말씀에 대해 베드로는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36a)로 질문한다. 이미 주님은 733-34, 821절에서 이를 말씀하셨었다. 그런데 이제야 비로소 베드로가 뭔가 감()을 잡은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주님의 대답(36b)에는 지금은후에는 사이에 분명한 차이를 보이는 제자들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제자훈련 수료를 앞둔 제자들의 모습이다. 그러나 베드로는 주님이 예측하신 제자들의 지금은에 대해서 인정하기를 거부한다(37a). 그리고 이렇게 말한다: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37b) 베드로는 주님이 말씀하신 후에는지금은에서 행할 수 있다고 자신한다. 그러나 정말 그럴 수 있을까?

다시 누가복음 22장으로 가서 묵상을 이어본다. 요한이 기록하고 있는 36절과 37절 사이에는 누가는 다음과 같은 매우 중요한 주님의 말씀을 놓치지 않고 독자들에게 소개한다: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요구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31-32). 오늘 새롭게 깨닫는 것은 이것이다. 앞서(13.21-30) 살폈듯이 가룟 유다의 비극은 그가 믿지 아니하는 자’(6.64) 마귀’(6.70) 도둑’(12.6)으로 이어지면서 점점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갔다는데 있다. 급기야 1321327절로 이어지면서 완전히 사탄의 지배권 아래로 추락해 버리고 말았다. 문제는 이 일의 시작이 불신(不信, 6.64)에서부터 시작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베드로와 유다가 다른 점은 이것이다. 비록 베드로가 지금은후에는이 불일치하는 연약한 사람일지라도 그는 지금 어떤 사람인가? 주님께서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22.32)라는 주님의 말씀에서 읽어낼 수 있는 것처럼 베드로는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러니까 베드로는 믿음 안에서의 언행이고, 가룟 유다는 믿음 밖에서의 언행이다는 점이다. 이것은 근본적으로 다르다. 유다에 대한 계속되는 부담(딜레마)이 풀리는 순간이다.

베드로는 믿음 안에서 불완전한 모습으로 뒤뚱거렸고, 가룟 유다는 믿음 밖에서 자신의 악한 정체를 교묘하게 위장하고 그럴듯한 모양새만 갖춘(12.5) 사탄의 장단에 꼭두각시처럼 놀아난 타락한 모습으로 지옥으로 향했다. 그런 면에서 베드로는 그리스도인의 자화상이다. 우리는 베드로 쪽이다. 우리의 지금은’(26) 주님의 판단하심 대로지만 하지만 우리는 37절처럼 지금은이라고 항변한다. 주님보다 내가 나에게 점수를 후하게 주고 살아간다. 우리는 문제가 없고, 이 정도의 열정과 열심이면 뭐든지 할 수 있고, 그럴 충분한 자격이 있는 것으로 착각하며 살아간다. 베드로처럼 말이다. 목숨까지 버릴 각오가 되어 있는 것을 호언장담(豪言壯談)함만으로도 주님 보시기에 전혀 아닌 지금은을 당당해 하는 나, 이게 여전히 연약한 믿음 아래 있는 자의 실존이다.

이를 다 아신 주님은 38절을 말씀하시기 전에 누가가 전하고 있듯이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2b)는 말씀을 먼저 베드로에게 하신다. ‘지금은’ 37절을 말해도 잠시 후에는’ 38절로 밖에 언행(言行)할 수 없는 연약한 베드로임을 주님은 다 아셨다. 그래서 돌이긴 후에. 베드로는 거기까지 추락할 것이다. 역시 3년의 제자훈련이 이처럼 종료될 것이다. 제자들은 1장에서 제자훈련(35-51)을 시작하고, 6장에서 중간시험(60-71)을 치렀다. 이제 기말고사를 얼마 남겨 놓고 있다. 하지만 오늘 베드로의 언행과 이에 대한 주님의 예고로 볼 때 이들의 제자훈련은 과연 순조롭게 수료하게 될지 궁금하다.

   

 

부스러기 묵상

 

베드로와 가룟 유다의 근본적인 차이에서 다시금 믿음을 생각한다.

믿음 안에 있다 하지만 여전히 연약함으로 더불어 좌충우돌(左衝右突) 하는 무기력하고, 뻔뻔하고, 뺀질뺀질하고, 그 많은 시간과 신앙생활을 했으면서도 영적 초보운전을 계속하고 있지만 한 번도 갸룟 유다처럼 취급하지 않으신 주님을 가슴 깊이 사모하는 말씀이다. 뭘 보시고, 내가 뭐길래, 내가 뭘 했다고, 도대체 아직도 죄 가운데 있고, 그 많은 말씀을 듣고 여기까지 신앙생활을 해 왔으면서도 이 모양 이 꼴 밖에 되지 않은 나를 사랑과 은혜의 포로가 되게 하셨을까. 아무리 생각해도 황송하고 황공하고 황홀할 뿐이다.

겨자씨 한 알 만한 믿음일 뿐인 것 같은데 지금은보다 후에는을 보시는 분, 오늘의 나보다 내일의 나에게 더 희망과 기대를 아끼지 않으시는 분, 바로 그 주님께서는 나를 한 번도 실망시킨 적이 없으시기에 나 또한 주님을 실망시키지 않아야겠다는 조그마한 믿음을 주께 고백한다. 그러나 나는 오늘까지 줄기차게 지금은’(37)만을 소리치고 있다. 주님은 나의 말뿐임을 아신다. 무엇을 속이고, 가리고, 덮고, 아닌 척 할 수 있으랴.

새 계명(誡命, 34-35)을 들을 자격조차 없는 부끄러움이 앞선다. ‘지금은함량 미달이고, 거기에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否認)한 것 밖에 한 것이 없는 나에게 주님은 묵묵히 새 계명을 선포하신다. 또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모르겠다. 주님이 나를 사랑하신단다. 그리고 당신처럼 서로 사랑하라신다. 이처럼 서로 사랑함으로써 모든 사람이 볼 때 내가 주님의 제자인 줄 알게 될 것이란다. 주님은 거기까지 나를 목표하신다. 비록 지금은’(36,37) “아니올시다!”여도 상관 없으시단다. ‘후에는을 보시겠단다. 이처럼 나를 믿어주시고, 신뢰해 주시고, 격려해 주시고, 축복해 주신다. 38절이 과거형이 아니라 미래로 가는 현재진행형임에 불구하고 한결같은 사랑으로 나를 바라보시는 주님, 이제는 새 계명으로 살아감을 통해 주님의 제자됨을 성취해가야 할 때다. 제자만들기’(making Disciples)에 여념이 없으신 주님 곁에 있음이 행복하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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