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 언행(言行)이 나의 본이다(요 13.12-20).

20220216a(묵상)

 

 

 

주님의 언행(言行)이 나의 본이다.

Jn. 13.12-20

 

    본문 관찰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2-17).

    내 떡을 먹는 자가 내게 발꿈치를 들었다(18-20).

  

 

알고 행하면 복()

 

제자들의 발을 씻기신 이유와 목적을 밝히신다.

주님에게는 뭔가 깊은 의도와 노림수가 있으셨다. 그게 뭘까?

 

 

너희도 행하게 하려 하여 본을 보였노라.”(12-17).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왜 자기 발을 씻기시는지 알지 못했다(8-9). 아마도 다른 제자들 역시 비슷한 형편이었을 것 같다. 그래서 제자들의 발을 다 씻기신 후에 이렇게 물으신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을 너희가 아느냐?”(12) 주님은 이 일에 들어있는 진리(영성)을 제자들이 알고, 그래서 제자들도 행하게 되는(15), 그것도 서로 발을 씻기는’(14), 결국 이것이 제자들에게 으로 보이셨다(15). 주님은 이를 주(Lord)로서 제자들의 발을 씻겼다고 말씀하신다. 참으로 많은 메시지가 이 언행(言行) 안에 들어있다.

원래 발을 씻기는 것은 의 몫이다. 그런데 주님이 이 일을 하셨다. ‘도 이러셨으니 으로서 어떻게 살아야겠느냐를 친히 모범을 보이심으로 교훈하고 계신다. 3년의 공생애와 제자훈련의 열매를 제자들에게 묻고 계신 것으로 볼 수 있는 이유는 있다. 그것은 아직도 제자들은 누가 크냐 하는 변론이 일어”(9.46, 22.24)난 말씀처럼 섬김과는 거리가 먼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주님은 이를 아셨다. 이처럼 주님은 제자들이 서로의 발을 씻겨주는 섬김의 삶을 살기를 친히 모범으로 보여주셨다. 이러한 영적 질서(16)를 알고 행하면 복()이 있을 것임을 분명히 하신다.

주님이 나의 냄새나고 추하고 더럽고 악하고 부담스러운 죄들을 언제나 씻어 주셨다. 주인이 종을 친히 말이다. 이것을 거저 받았으니, 뿐만 아니라 한 번도 아니고 더러워질 때마다 언제든지 나를 찾아오셔서 내 무거운 죄의 짐을 이처럼 맡아주셨다. 주님의 눈빛과 침묵으로 말씀하셨던 것이 무엇인지 알 것 같다: “너희도 서로 발을 씻여 주는 것이 옳으니라.”(14b) 씻겨주는 것을 받는 사람이 있고, 언제나 씻겨주어야 할 사람이 있는 그런 곳에서는 결코 서로 씻기는일은 없을 것이다. 서로 자기 발을 씻는 것 외에는. 서로 씻겨주는 여유는 영적 성숙에서 나오며, 받은바 은혜의 충만함에서 비롯된다. 주님이 누구시며, 내가 누구인가를 알지 못하고서는 결코 이러한 섬김은 나올 수 없다.

   

 

시편 419

 

    “내가 신뢰하여 내 떡을 나눠 먹던 나의 가까운 친구도

      나를 대적하여 그의 발꿈치를 들었나이다.”(41.9)

 

주님은 섬김의 본을 보이시며, 또한 이처럼 서로 섬길 것을 말씀하시다가 가룟 유다와 눈이 마주치신 모양이다. 주님은 섬기셨으나 제자 중 하나는 그 주님을 결코 섬기지 못하는 자가 있음을 다시 말씀하시기 시작하신다(18).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사람 말이다. 그가 바로 가룟 유다다. 생각해 보면, 유다만큼은 이 말씀들이 누구를 겨냥하고 있는지를 알았을 것이다. 그 역시 양심과 영혼의 갈등이 없었다고 볼 수 없다. 그러나 그는 끝까지 섬겨주시는 분, 계속해서 말씀하여 주시는 분의 은혜를 거부하고 만다.

왜 그랬을까? 주님은 이렇게 해서 구약 시편의 예언이 성취되고 있음을 상기시킨다. 이렇게 미리 말씀하심은 이 예언의 성취자가 바로 자신이심을 믿게 하기 위함이다(19). 다윗의 시편이 가룟 유다에게서 성취될 줄이야 그 누가 알았으리요. 그러나 유다처럼 성경을 응하게 하는 도구가 된들 그게 무슨 의미와 가치가 있겠는가. 오히려 비극일 뿐이다. 잊어버릴만 하면 자꾸자꾸 등장하는 유다를 생각해야 하도 괴로운 일이다.

   

 

부스러기 묵상

 

서로 발을 씻어 주는 것”(14b)이 내 마음의 창에 박힌다.

함께 식사를 하고, 말씀을 듣고, 주님과 함께 하고 있고, 발 씻김 안에 있어도, 그렇다고 모두가 다 알곡처럼 구원받은 무리는 아니다. 오늘 식으로 말하면 교회에 등록을 하고, 성찬에 참여하고, 설교를 듣고, 주님과 교제하는 기도를 드리고, 세례를 받아도, 그렇다고 모두가 다 천국의 시민은 아니다. 이런 것들이 자동적으로 거룩과 구원과 영생을 담보하지 못한다. 공동체 안에는 믿음의 계보에 속한 사람들만 있는 게 아니라, 바리새인과 대제사장들, 그리고 가룟 유다도 있다. 알곡과 가라지는 세상 마지막 심판 때까지 함께 공존한다. 이것이 지상교회의 생태적 그림(identity)인지도 모른다.

누가 섬기는 자인가? 믿음의 계보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이게 없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섬기는 믿음의 사람들에게서만 발견되어지는 것, 그것이 서로 섬김이다. 이것은 섬김의 종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는다.

주님이 보실 때 가장 부족한 점이 섬기는 종으로서의 목양이 아닐까 싶다. 말씀으로 성도들을 잘 섬기는 귀한 만남이기를 기도하고 있다. 섬겨보자, 주님처럼! 나를 섬겨주신 주님처럼 나도 주님과 교회와 성도들을 섬기며 살아야겠다. ‘섬기며 살라!’ 하신 주님의 부탁을 외면치 말아야겠다. 가장 가깝게는 가정에서 가족들을 좀 더 귀하게 섬기며 주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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