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은 영광으로 가는 한 알의 밀알이다(요 12.20-36a).

20220212(묵상)

 

 

 

죽음은 영광으로 가는 한 알의 밀알이다.

Jn. 12.20-36a

 

    본문 관찰

 

    헬라인의 물음(20-21): 우리가 예수를 뵈옵고자 하나이다

    예수님의 대답1(22-28a):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하나님의 응답(28b): 내가 이미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

    무리의 반응(29): 천둥이 울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

    예수님의 대답2(30-33): 내가 땅에서 들리면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겠노라

    무리의 반응(34): 이 인자는 누구냐

    예수님의 대답3(35-36): 빛을 믿으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

 

 

영광의 죽으심

 

이방인(헬라인, 20-21)의 등장은 하나의 사인이다.

아마도 이 헬라인들은 19절과 20절 사이에 있었던 복음서의 증언, 이방인의 뜰에서 발생한 성전청결 사건(19.45-46)을 목도한 모양이다. 유월절을 지키기 위해 예루살렘에 올 정도였다면 이들은 하나님에 대해서 깊은 관심과 애정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이들이 이번에는 예수님을 만나고 싶어했다. 요한은 이 일을 평범하게 지나가지 않고 예수님의 십자가 구속사역을 통해 이방인들 역시 24,32절의 열매로서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에 참여하게 될 것을 내다보고 있다. 이것은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특별히 이방인이 주께로 오는 것을 보시고 하신 23-28a절 말씀에서 그 빛을 발한다.

   

 

죽음, 영광으로 가는 길(23-28a)

 

주님은 이제껏 ’(23)에 대해서 전혀 다른 쪽이셨다(2.4, 4.21,23, 7.6,30, 8.20). 그런데 이방인이 등장하는 대목에서 이렇게 대답하신다: “인자가 영광을 얻을 때가 왔도다.”(23) 그리고 곧바로 죽음을 말씀하신다(24-27). 동시에 이 일이 아버지의 영광이라 하신다(28). 주님은 이방인을 포함한 온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1.29)으로서 십자가 이후를 지금 미리 보고 계신다. 주님은 세상의 구주시다(3.16-17, 4.42, 6.14,33,51, 11.27). 문제는 23절이 24절을 통해서 성취되며, 이것이 곧 28절이라는 말씀이다. 그래서 어렵다.

마침내 공생애의 절정인 때가 지금 예루살렘을 무대로 점점 다가오고 있다. 이 때가 주님이 영광을 받으실 때인데, 그러나 이 영광이 무엇을 통해서 성취되느냐 하면 한 알의 밀처럼 죽을 때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고 말씀하신다. 영광은 역설적이게도 죽음에서 시작된다는 뜻이다. 성전을 청결케 하는 운동가(종교인)로서도 아니고, 오병이어를 통해서 빈민을 구제하는 사회복지(빵통령)를 통해서도 아니고(6.15), 유대인들이 기다리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해방할 정치적인 메시야(혁명가)로서도 아니다. 영광은 십자가에서 갈릴리에서 시작되고 십자가에서 완성된다는 뜻이다.

이것은 예수님에게만이 아니다. 이게 25-26절의 의미다. 나 역시 죽어야 영생하도록 보존된다(25). 그런데 이 죽음은 26절에서 구체적으로 적용된다: “나를 섬기려면 나를 따르라 내 아버지께서 그를 귀히 여기시리라.” 예수님을 따르는 길이 곧 죽음의 길이자 영생하는 길이라는 말씀이다. 주님이 갈보리에서 끝이 아니셨듯이 나 역시 주님을 따르는 것이 종점이 아니라 영생의 문에 들어서는 시작이라신다.

죽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고통스러운 것일까. 27절의 주님에게서 이를 희미하게 본다: “지금 내 마음이 괴로우니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나를 구원하여 이 때를 면하게 하여 주옵소서.” 이는 주님의 겟세마네 기도(14.32-36)를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그저 통과의례가 아니다. 하나님이 육신을 입고, 갖은 멸시와 천대를 받으시고, 급기야 십자가에서 죽는다는 것, 이것을 히브리서 기자의 표현을 능가할 재주가 없기에 다시 기억해 본다.

 

    “그는 육체에 계실 때에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

      그의 경외하심으로 말미암아 들으심을 얻었느니라.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에게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고,

      하나님께 멜기세덱의 반차를 따른 대제사장이라 칭하심을 받으셨느니라.”(5.7-10)

 

문제는 그러나로 이어지는 다음 말씀이다: “그러나 내가 이를 위하여 이 때에 왔나이다. 아버지여, 아버지의 이름을 영광스럽게 하옵소서.”(27b-28a) 주님은 이처럼 십자가에서 죽으심으로서 자신뿐만 아니라 아버지의 영광이 이루어짐을 보고 계신다. 거기까지 순종하시며, 낮아지시며, 충성하시며, 헌신하신다. 그렇다, “고난 속에 정답이 있다.”는 말씀이 정말 그렇구나 싶다. 십자가 죽음이라는 고난 속에 영광이라는 정답이 있다는 생각, 정말 아멘이다.

   

 

죽음의 신학(30-33)

 

예수님은 처음부터 죽으시기 위해서 성육신(Incarnation)하셨다. 주님은 자신의 죽으심이 영광이 된다는 말씀에 대한 하나님 아버지의 동의(28b)를 받으시고서, 곧바로 다음 몇 가지의 말씀하심을 통해서 자기가 어떠한 죽음으로 죽을 것을 보이”(33)신다. 그게 31-32절이다.

첫째, 이 세상의 심판이 이르렀다(31a). 죄와 사망에 대한 심판이다. 둘째, 이 세상 임금이 쫓겨날 것이다(31b): “내가 또 들으니 하늘에 큰 음성이 있어 이르되 이제 우리 형제들을 참소하던 자 곧 우리 하나님 앞에서 밤낮 참소하던 자가 쫓겨났고”(12.10) 셋째, 내가 땅에서 들릴 것이다(32a, 3.14, 8.28). 넷째, 모든 사람을 내게로 이끌 것이다(32b).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이 현실로 가까이 온 것이 지금 주님이 말씀하시는 의 옴이고, 그것이 죽으심으로 이루어지는 영광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이미 영광스럽게 하였고 또다시 영광스럽게 하리라.”(28b)

         -

    천둥이 울었다, 천사가 그에게 말하였다.”(29)

    “우리는 율법에서 그리스도가 영원히 계신다 함을 들었거늘

      너는 어찌하여 인자가 들려야 하리라 하느냐

      이 인자는 누구냐?”(34)

 

전혀 상반되는 예수님 이해를 만난다.

이것이 요한이 고발하는 인간의 실존이다. 사람은 그렇게 똑똑하지도, 하나님의 말씀을 금방 알아차리지도, 말씀하셨다고 그냥 곧바로 믿고 알고 깨닫지도 못하는 그런 존재다. 이것을 다 아시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시려고 예수님께서 친히 십자가에 들리실 것을 말씀하신다. 바로 그 때가 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9,34절이다. 그래서 답답하다. 내가 그러니 주님은 오죽하셨을까.

그래도 주님은 계속 말씀하신다: “아직 잠시 동안 빛이 너희 중에 있으니 너희에게 아직 빛이 있을 동안에 빛을 믿으라 그리하면 빛의 아들이 되리라.”(35-36a) 그렇다. 아직(not yet) ‘는 남아 있다. 그것도 잠시 동안이다. 언제까지나 이 기회의 시간이 남아있는 것이 아니다(7.33-34, 8.21). 바로 이 가 왔다.

예루살렘의 입성은 이것의 신호탄이며, “호산나!”를 연호하는 무리들은 이 를 알리는 나팔이다. 그 소리가 지금 내 귀와 마음과 심령에까지 전달되는 말씀이다. 겨울이 깊어갈수록 봄은 어김없이 온다. 지금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이라는 십자가의 때가 깊어갈수록 최후 승리를 알리는 부활의 영광의 빛은 점점 밝아오고 있다. 죽어야 산다는 이 진리를 마침 다시 묵상하게 하신 주님을 찬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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