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가 선 곳,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요 21.1-6).

20220419a(묵상)

  

 

 

베드로가 선 곳, 그 너머의 세계가 있다.

Jn. 21.1-6

 

    본문 관찰

 

    또 제자들에게 자기를 나타내셨으니

    시몬 베드로와 디두모라 하는 도마와

    시몬 베드로가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하니

    이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지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얘들아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

  

 

제자들과의 세 번째 만남

 

의심 많은 도마가 이제는 제자들과 함께 있음이 좋아 보인다.

물론 아직도 연약한 베드로 곁에 있음이 좀 걸린다. 그러나 처음에는 아무 말 없이 주님의 부활 곁에 있다가 지금은 다시 디베랴 바다의 옛 어부로 돌아가 버린 베드로를 생각하면 다른 무엇보다 마음이 아프다. 사실 베드로 자신 역시 만감(萬感)이 교차할 것이다. 지난 몇 년을 돌아보면서 보낸 최근 얼마 기간은 더 그랬을 것이다. 누구보다 지금 바닷가에, 다시 어부의 모습으로, 이건 아니다는 것을 베드로 자신이 더 잘 알고 있었을 것이어서다.

 

 

베드로

 

고난에서 회복까지의 베드로의 생애는 반전을 거듭한다. 그런데도 그는 찾아오신 주님을 맞이하기는커녕 이번에는 옛 생활로 돌아가 버린다. 주님은 평강(‘샬롬’)으로 나타나셨으나, 하지만 베드로는 다시 바닷가로 돌아가 버렸고, 다시 주께서 베드로를 찾아오시는 일이 반복되고 있다. 베드로는 지금 극(16.16, 16.30)과 또 다른 극(18.17,25,27)을 왕복하면서 심각한 자기 딜레마에 빠져 있다(A'에서 회복된다). 이처럼 그는 이 모든 자신의 숙제를 안고 디베랴 바다에서 고기를 잡고 있다. 맘이 말이 아닐 것이다.

 

    A 3번 부인하다(18.17,25,27).

       B 3번 나타나시다(20.19,26, 21:7).

          C 3번 평강의 인사를 하시다(20.19,21,26).

       B' 3번 사랑을 물으시다(21.15,16,17).

    A' 3번 사랑을 답하다(21.15,16,17).

 

사실 이미 두 번이나 부활의 주님이 베드로와 다른 제자들을 만나 주셨었다(20.19,26). 그런데도 여러 제자들이 우리도 함께 가겠다”(3)며 베드로를 따라 디베라 바닷가로 다시 돌아가 버린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는데 제자훈련을 마친 제자들은 다시 고기를 낚는 어부로 서 있다. ‘장차 보리라’(1.42,50-51)의 꿈이 현실로 성취된 무한하신 영광을 20장까지 공유했던 제자들이 아닌가. 그런데 이처럼 다시 뱃사람(옛사람)으로 돌아와 버린 제자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참으로 혼란스럽다.

 

    “나가서 배에 올랐으나 그 날 밤에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더니”(3b)

 

베드로가 처음 부르심을 받을 때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5.1-11). 빛이 왔으나(1.5,9) 그는 어두운 이 맞도록 수고하였고, 하지만 얻은 것이 없었다. 이상하게도 주님이 세 번째 찾아오시는 그날 밤에도, 그러니까 부활의 빛되신 주님과 함께 있지 않던 그 날 밤에도 역시 아무 것도 잡지 못하였다. 빛에서 다시 어두움으로 되돌아가 버려서일까. 이렇듯 빛과 어두움이 여전히 21장에서 공존한다. 아마 4절이 이런 의미가 아닐지 모르겠다.

바로 이들에게 부활의 주님이 찾아오셨다. 벌써 세 번째다. 이쯤이면 화가 나셨을 법도 하다. 얼마나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제자들인가. 그것도 제자들이 예수이신 줄 알지 못하는”(4b) 그런 형편이다. 이처럼 무너질 수도 있을까. 어떤 제자들이었는데 , 얼마나 많은 장차 보리라’(1.42,50-51)의 영광을 친히 목도하고, 듣고, 누렸는가 말이다. 어찌 보면 이게 사람이다. 나라고 뭐 다를까. 제자들만 탓하고 있는 게 아닌 지금, 역시 나의 모습을 고발하고 있는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흥미롭게도 얘들아!”(5). 이 단어는 어린이(어린아이)를 부를 때 쓰는 말이다. 주님은 저들을 참으로 친숙하게 불러 주시는 것이기도 하지만 어쩌면 이처럼 다시 원점으로 돌아와 버린 영적 어린아이라 인정하시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빛이 아닌 어둠()에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없다는 것을 어느 누구보다 잘 아시는 주님이 아니신가.

하지만 없는 것을 확인하시는 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물을 배 오른편에 던지라 그리하면 잡으리라.”(6a) 정말 그렇다. 주님만이 잃어버린 것을 다시 얻게 하신다. 제자들 자신들의 힘으로는 고기 하나 잡을 수 없는 자들이다. 그렇지 않은가? 주님 없이 내가 발버둥치며 온 밤을 수고한다고 해서 뭘 얻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어리석은 인생들은 끝까지 주님 없이도 뭔가를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주님이 채워주시는 것을 통해 내가 할 수 없는 그 무엇이 있음을 언제나 깨닫는다. 베드로의 그물이 역시 그러하다.

 

 

부스러기 묵상

 

    “이에 던졌더니 물고기가 많아 그물을 들 수 없더라.”(6b)

 

그토록 얻고 싶은 것이라면 주님은 얻게 하신다.

하지만 거기서 주님의 이야기가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데 더 깊은 무엇이 늘 펼쳐진다. 3절과 6절의 사이에서 극명하게 대조되는 두 사람을 만난다. 예수님과 베드로다. 모든 것을 다 할 수 있으나 베드로는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18a)- 옛사람으로 돌아와 버렸고, 주님 역시 그 베드로에게 무엇이든 다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지만 그를 책망하거나, 그를 향해 분노하시거나, 뭔가를 따지시지 않으시고 그의 눈높이로 내려오셔서 그가 그토록 얻고 싶어하는 것을 일단 채워 주신다.

하지만 고기 잡는 것마저도, 그러니까 베드로가 원하는 것까지라도 주님이 도와주셔야만 가능하다면 도대체 제자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이것이 디베랴 바다에서 제자들에게 보여주고 싶어 하시는 주님의 메시지다. 사실 부활하신 주님이 뭐가 아쉬워서 이곳까지 찾아오셨을까. 그럼에도 주님은 21장 이후의 제자들을 내다보시고서 오래오래 참아 주신다:

 

    “예수께서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

    “사랑은 오래 참고 .”(고전13.4a)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寶座)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2b)

 

요즘 들어 내 마음의 창에 조용히 걸리는 말씀은 사랑은 오래 참고라는 말씀이다. 사랑이 왜 오래 참음인지, 사랑과 오래 참음이 무슨 상관이 있는지 이런저런 생각을 해 오고 있다. 주님은 아직 베드로에 대한 최종 결론을 유보(?)하고 계신다. 지금까지의 것만을 종합한다면 사실상 그는 실패자다. 하지만 주님의 생각은 다르시다. 그의 실패의 끝을 다시금 회복으로 이어갈 수 있도록 오래 참으신다. 세 번째 찾아오시기까지 참으신다. 그리고 묵묵히 베드로를 향한 거역할 수 없는 섭리의 빛을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비추신다.

감사할 뿐이다. 주님은 지금까지 무던히도 기다려주셨다. 나의 못난 부분이 끝이 되지 않도록, 나의 죄인됨이 나의 종점이 되지 않도록, 나의 범죄가 심판의 빌미가 되지 않도록, 지금 이 시간에도 나보다 나를 더 기다려 주신다. 주님도 나를 이처럼 기다리시는데 나는 얼마나 성급하고 결론이 빠른가. 주님은 결코 서두르지 않으신다. 디베랴까지 찾아오신 분이시다. 지금 나에게까지 찾아오신 주님이 아니신가. 다시 벌거벗은 모습으로 주님 앞에 서 있다. 내 모습 이대로 받아주시는 분이시기에 부끄럽지만, 하지만 황송하게도 나를 찾아오신 주님 앞으로 다시금 나아간다. 그럴 수 있는 분이시고, 그러도록 용납하시는 분이시기에 면목 없고 초라하지만, 그래도 나를 받아주시는 분이 주님이시기에 희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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