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요 20.11-18)

20220417b(묵상)

  

 

 

마리아야! 내 형제들에게 가서 전하여라!

Jn. 20.11-18

  

    본문 관찰

 

    마리아는 울면서무덤 안을 들여다보니

    예수의 서 계신 것을 보았으나알지못하더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여자여 어찌하여 울며 누구를 찾느냐?

    마리아는 그가 동산지기인 줄 알고

    이르되 옮겨갔거든 내가 가져가리이다

    예수께서 마리아야하시거늘

    마리아가 돌이켜 히브리말로 랍오니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를 붙들지 말라

    너는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부활공동체

 

마리아는 다시 무덤 앞에 서 있다.

그녀는 이미 안식 후 첫날 일찍이”(1a) 무덤을 찾았고, 돌이 옮겨가고 주님의 시체-반드시 죽어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보이지 않자 베드로와 요한에게 달려가서 이 사실을 알리고서(2) 다시 그 무덤을 찾아와 밖에 서서 울고 있다(11). 그러다가 영광스럽게도 부활의 주님을 처음으로 만난다.

 

 

울다, 보다, 알다(11-15).

 

마리아의 울음은 주님의 장사지낸 시체가 없어졌다는 것 때문이다(2,13,15). 처음에는 스스로 이런 생각을 하였고, 다음에는 천사들의 물음에 이렇게 답했으며, 그 다음에는 부활의 주님이 질문하셨는데도 이처럼 응답했다. 모든 경우가 다 주님은 이미 부활하신 이후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이미’(already) 부활하셨으나 마리아에게는 모든 것이 아직’(not yet)이다. 그러니 부활하신 빈 무덤 앞에서 고작 하고 있는 일이 울고 울면서”(11) ‘아직도 여전히 죽어있다고 생각하는 시체를 찾고 있다. 이미 시체가 아닌 부활하신 주님이심에도 불구하고 아직 시체여야 하고, 그런데 그 시체를 아직 만나지 못한 것 때문에 울고 있다. 부활이 사실이어서가 아니다. 부활은 이미 역사적 사실이다. 그런데 그걸 모르고,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믿지 못하고, 경험하지 못하니까 살아 계신 주님이 아닌 죽어 계신 주님을 찾고, 그리고 그럴 수 없다고 생각하자 그만 울고있는 것이다.

이게 어찌 마리아 한 사람의 문제일까. 그러니 보아도, 들어도, 만나도, 함께 있어도, 찾아오셨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알지 못하고 믿지 못하는 것 아닌가. 즉 무덤이 왜 비어있고, 주님이 어떻게 되셨는지(13), 예수님을 보고도 알지 못하고(14), 주님을 동산지기인 줄 안다(15). 마리아가 너무 많이 울어서도 아니다. 그녀가 정신이 어떻게 된 것도 아니다. 천사를 보아도, 주님을 보고 만나도 이 모든 것을 알지 못한다. 그것만큼 딴소리하는 것 아닌가. 사실 더 깊게 들어가 보면 보지 못한 것이 아니라 보여지지 않는 것이고,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알게 되지 못함이요, 그러니까 이 모든 것은 마리아가 주님께로가 아니라 주님이 마리아에게 오셔야만 하는 것 아닌가.

 

 

마리아야!(16)

내 형제들에게(17-18)

 

지금까지는 마리아가 주님을 찾았지만, 그것도 무덤에 아직 여전히 누워 계셔야만 하는 주님을 울면서 -이건 지극히 한국적인 종교적 열심과 비슷하다.- 찾았지만 그랬기에 보기는 보아도, 만났기는 만났어도, 듣기는 들었어도 아무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그런데 예수께서 마리아야 하시거늘”(16a)에서 부활의 주님이 마리아에게 알려지고 있다. 중요한 것은 죽어있던 주님이 지금 이때에야 살아나셨던 것이 아니다. 울고 있는 마리아, 시체를 찾고 있는 마리아, 부활 신앙과 반대편에 서 있는 마리아, 신약을 살면서 아직도 구약 신앙을 붙들고 있는 마리아, 부활 이후를 살면서 부활 이전에서 아직 깨어나지 못한 마리아에게 부활의 주님으로 친히 현현(顯現)하시자 비로소 이 모든 연약함으로부터 마리아가 깨어난다.

주님은 화를 내시거나, 얼굴을 찌뿌리시지도 않으신다. “마리아야!” 부르시는 주님의 음성은 충분히 짐작이 간다. 아마 평소에 그녀를 부르시던 바로 그 인자하신 사랑의 음성이었으리라. ‘여자여!’(15)에서 마리아야!’(16)로 이름을 불러 주신다. 얼마나 듣고 싶고, 이처럼 주님 앞에 서 보고 싶은 만남인가.

부활의 주님이 나에게도 이처럼 찾아오셨다. 언제나 충만아!’ 부르신다. 내가 처음 인격적으로 주님을 내 구주, 내 하나님으로 고백하던 고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말씀을 묵상(QT)하던 어느 날 나 같이 부족한 자도 주의 복음을 위해 부르시나이까?” 했을 때 인자하게 웃으시며 당신의 가슴에 나를 받아주시면서 그래, 나를 위해 살겠느냐!”고 내 이름을 불러 주신 분, 이렇게 부활의 주님은 나에게도 찾아오셨다. 마리아는 죽어 누워 계신 주님의 무덤을 찾아갔지만 주님은 부활하신 영광의 주님으로 마리아에게, 그리고 나에게 뿐만 아니라 오늘 주님을 구주로 고백하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찾아오셨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17)

 

참으로 놀랍다. 빈 무덤만을 성지순례하고 돌아가 버린 제자들(3-10), 아니 그 이전에 주님을 버리고 뿔뿔이 흩어져버린 제자들, 배은망덕(背恩忘德)한 제자들을 어떻게 부르시는가? 여전히 형제들이다. 정말 눈물이 핑 돈다. 부활을 믿지 못하고, 알지 못하고, 아직 깨닫지 못한(9) 연약한, 인간적인 지극히 인간적인 제자들임에도 불구하고 저들을 여전히 내 형제들이라 부르신다. 그리고 그들에게 부활의 주님을 전하라 하신다. 그것도 너희 아버지’, ‘너희 하나님이라 일러주신다(17b). 참으로 기가 막히는 은혜요, 형언할 수 없는 감동이다. 그분이 내가 영원토록 섬기며, 생명 다하여 사랑하며 살고자 하는 나의 주님이시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주를 보았다. 주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18)

 

마리아는 이제 빈 무덤을 전하는 자가 아니라 부활을 전하는 자로 바뀐다.

부활의 주님을 만났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명을 받았기 때문이다: “너는 내 형제들에게 가서 이르되 하라.”(17) 이제 마리아는 탄 소리 하지 않는다. 더 이상 내가 무덤을 보았다를 전하는 전도자가 아니다. 부활의 증인이자 내가 주를 보았다!”는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전도자로 서 있다. 이제 마리아의 눈에서 눈물이 그친다. 20장에서 바뀐 것이란 마리아가 빈 무덤에서 죽은 주님을 찾던 자리에서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다. 마리아도 그대로고, 빈 무덤도 그대로고, 주님도 부활하신 그대로다. 그녀가 울고 있을 때는 주님이 아직 무덤에 계신 때였는 게 아니다. 오직 바뀐 것 하나, 그것은 마리아가 부활의 주님을 만난 것이다. 정리하자면 부활하신 주님께서 마리아를 찾아오사 그녀를 만나주심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다.

빈 무덤을 자주 찾는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운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고, 동산지기를 붙들고 애걸복걸(哀乞伏乞)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고, 이른 새벽부터라는 열심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해결의 열쇠(KEY)는 오직 부활하신 주님이시다. 그렇다면 장차 보리라’(1:42,50-51)의 영광은 주님으로부터 말미암아 주님에 의해서 성취되는, 이 꿈이 현실로 되는 일은 주님이 하시고 우리()는 그것을 은혜로 받는 자들이다. 부활하신 주님이 막달라 마리아를 -그녀는 지금껏 뭔가를 정말 막달라고 한 여인이다.- 찾아오사 그녀를 만나주시고, 교제해 주신 것처럼 나에게도, 부활의 주님이 필요한 아직도 여전히 울고있는 많은 사람들에게 찾아오시기를 기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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