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드로: 안다와 모른다, 그 사이에서(요 18.10-18,25-27)

20220412(묵상)

  

 

 

베드로: 안다와 모른다, 그 사이에서

Jn. 18.10-18,25-27

  

    본문 관찰

 

    베드로가 칼을 가졌는데(10-14)

    베드로가 말하되 나는 아니라하고(15-18,25-27)

 

 

부끄러운 이야기

 

    “아버지께서 주신 잔을 내가 마시지 아니하겠느냐?”(11)

 

베드로의 과 아버지께서 주신 이 묘한 대조를 이룬다.

베드로는 그것을 가지고 있었고(10), 주님은 그것이 아버지께서 주신 것이다(11). 이것이 고난을 맞이하는 전혀 다른 그림이다. 베드로는 지금 두 가지를 가지고 있다. 하나는 이고, 다른 하나는 믿음’(16.30)이다. 그것도 믿음 이후에 칼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이 둘을 통해 11절을 대항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이 인간적인, 너무나 인간적인 사람 베드로의 모습이다.

 

 

칼을 가졌는데(10-14)

 

그는 칼을 준비하고 있었다. 칼과 십자가는 아무리 양보해도 전혀 이질적이다. 그것만큼 혈기와 인간적인 생각을 앞세웠다는 뜻이다. 지금 주님이 가시는 길은 아버지께서 주신길이다. 하나님 아버지께로부터 받은 사명에 순종으로 가는 길이다. 그런데 베드로는 이 섭리의 길을 칼로 막아보려고, 막을 수 있는 일쯤으로 생각한 모양이다. 종종 베드로는 결정적인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가 진행되는 것을 자기 생각, 자기 방식, 자기 수준에서 판단하고 행동한다. 그만큼 아직 그는 옛 성품이 완전히 해결하지 않았다.

마태복음 16장이 아마도 가장 강력한 증거가 아닌가 싶다. 그는 위대한 신앙고백(16)을 한다. 이에 주님은 그의 신앙고백 위에 교회를 세우실 것을 말씀하시고(17-19), 마침내 첫 번째 수난예고를 제자들에게 하신다(21).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베드로가 주여 그리 마옵소서!”(22)라고 거부한다. 결국 이 일로 베드로는 주님께 이런 책망을 받는다.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23)

 

지금 겟세마네 동산에서 만나는 베드로가 그렇다. 이미 마태복음 1616절과 요한복음 1630절을 통과한 이후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이것이 스승(예수님)을 위한 제자(베드로, )의 역할에 대해서 잘못 생각한 사람들의 모습이다. 하지만 예수님은 지금 오직 하나님께 모든 초점을 맞추고 계신다. 본문에 등장하는 그 누구도 -베드로, 군대, 천부장, 유대인의 하속들, 대제사장, 안나스, 가야바, 가룟 유다- ‘하나님의 일을 막을 수 없다.

 

 

나는 아니라’(15-18,25-27)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는지라.”(16a)

 

을 가지고 있을 때는 용감했으나 어찌된 일인지 예수님을 따르기는 하는 것 같은데(15) 대제사장의 집 뜰에는 들어가지도 못하고 문 밖에 서 있다(16a). 지금 예수님은 결박되어 끌려가 계신다는 것을 모를 리 없는 베드로가 말이다. 마가의 증언에 의하면 다 버릴지라도 나는 그리하지 않겠나이다. 내가 주와 함께 죽을지언정 주를 부인하지 않겠나이다.”(14.29,31) 장담했던 그였다.

 

    “너도 이 사람의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17)

    “너도 그 제자 중 하나가 아니냐?”(25)

    “네가 그 사람과 함께 동산에 있던 것을 내가 보지 아니하였느냐?”(26)

 

세상은 나를 이처럼 이해하고 있을까. 세상이 나에게도 베드로에게처럼 물어주었으면 좋겠다. 세상도 -문 지키는 여종, 사람들, 대제사장의 종- 베드로를 예수님의 제자로, 예수님과 함께 있는 사람으로 알아보는 게 새롭다. 세상의 미력한 종들도 이처럼 당당하게 자기 주인 편이 되어 언행(言行)하고 있는데 예수님의 종(제자)이라는 사람이 저 모양 이 꼴이니 부끄러울 뿐이다. 그는 이미 믿음의 사람이다(16.30). 그런데 그만 나는 아니라!”(17b,25b,27)며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하고 만다. 오직 자신만이 예수의 사람이 아니라고 말하고 있다. 세상이 다 알고, 유다마저도 이 사실을 아는데 베드로만 저주하며 맹세하며 아니라고 말한다: “나는 너희의 말하는 이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14.71) 그리고서 후에 또 울기는 왜 울었을까(14.72b) 도대체 왜 그랬을까?

 

 

부스러기 묵상

 

조금 다른 맥락이지만 사람들은 자신이 성도로 드러나는 것을 원치 않는다.

예수님을 부인하면서 산다는 얘기는 아니다. 거기까지는 아닐지라도 뭔가 정상적이지는 않다는 생각이 든다. 얼마 전에 들으니까 모 직장에서 이런 대화가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고 한다: “! 부장님, 교회 집사래? 교회에서도 무슨 부장이래요!” 대기업 부장이면 모르긴 해도 아마 15년 이상은 근무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껏 어떻게 살아왔으면 그럴까 싶었다.

뭐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 그럴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아마 교회 다니는 것을 몰랐다는 것보다는 그런 직분을 맡은 분이 그럴 수 있나 하는 뭐 그런 뜻이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요즘 더 문제가 되는 것은 교회에서까지 이처럼 소위 익명성을 누리려는 사람들이 많아지는 것 같다는 점이다. 옛날에는 교회 나와도 나를 몰라준다며 이 교회는 사랑이 없다!”사랑타령이 유행했는데 이제는 내 신앙 내가 알아서 하고 있는데 왜 자꾸 귀찮게 구느냐!”며 야단들이다. 뭔가 잘못 가고 있는 것이 분명하다. 주차장에서 한참 싸운 사람을 교회에서 만났다는 얘기는 이제 별 이상한 얘기가 아닌 모양이다.

베드로의 부끄러운 이야기는 재미있자고 자꾸 들추는 게 아니다. 나는 그에게서 나를 본다. 말만 앞세우는 나, 아직 신앙이 삶으로 뿌리내리지 못한 나, 알고 믿는 것만큼 살지 못하는 나, 내게 불리하면 신앙도 잠시 정지시키는 나, 성장한 만큼 아직 성숙하지 못한 나, 아는 것과 믿는 것이 하나가 되지 못한 나, 금방 후회하고 죄책감에 빠질 것을 알면서도 그릇 언행(言行)하는 나, 겉과 속이 다른 나, 하나님과 사람에게 비추어진 모습이 다른 나, 아는 사람과 모르는 사람에게 하는 게 다른 나, 힘있는 사람과 힘없는 사람에게 뭔가 달라도 다른 나, 베드로처럼 아침 다르고 저녁 다른 나, 이처럼 나에게도 이중성과 익성명이 교묘하게 섞여서 살아가는 모습이 여지없이 노출된다. 베드로를 향하던 손가락 끝이 나에게로 구부러진다.

누가의 증언에 보면 참 재미난(?) 부분을 읽을 수 있다: “곧 닭이 울었다. 주께서 돌아서서 똑바로 베드로를 보셨다.”(22.60b-61a, 표준새번역) 베드로가 세 번이나 주님을 부인한 이후, 베드로와 주님의 눈이 순간 마주쳤다. 주님은 그런 베드로를 돌아 보셨다. 그냥 돌아서서 보시고 계신다. 나 역시 주님께 늘 뭔가 들킨 기분으로 살 때가 많다. 그럴 때마다 주님은 말없이 그냥 나를 지켜보신다. 뭐가 말씀을 해 주시면 더 시원하고 분명할텐데도 말이다. 정말 그런 것 같다.

주님은 지금 이 순간에도 내 마음과 심령을 살피시고 계신다. 그래, 지금은 내 부끄러운 이야기가 다 노출되어야 할 때다. 지금은 공사중이고, 지금은 수리중이다. 베드로 역시 벌거숭이로 주님 앞에 서 있다. 이제 내 것으로는 살 수 없고, 주께서 친히 가죽옷을 지어 입혀주셔야만 한다. 아담과 하와를 위해 이름 모를 동물을 죽여 그 가죽으로 옷을 만들어 입히시던 주님의 모습이 자꾸만 어른거린다. 내 부끄러운 모습이 희망일 수 밖에 없는 복음의 역설, 이 묵상이 마음을 타고 기도의 액체가 된다. 그래도 주님은 베드로의 주님이시다. 동시에 나의 주님이시다. 감사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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