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으로 나를 믿게 하옵소서!(요 17.20-26)

20220410(묵상)

  

 

 

세상으로 나를 믿게 하옵소서!

Jn. 17.20-26

  

    본문 관찰

 

    그들의 말로 말미암아 나를 믿는 사람들(20)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21-23)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24-26)

  

 

교회를 위한 기도

 

    “나는 이 사람들을 위해서만 비는 것이 아니고,

      이 사람들의 말을 듣고

      나를 믿는 사람들을 위해서도 빕니다.”(20, 표준새번역)

 

(예수님) 이 사람들(제자들) 나를 믿는 사람들(교회)

복음(선교)이라는 그림이 그려진다. 주님은 세상을 이기심으로써(16.33) ‘믿사옵나이다’(16.30)의 제자들에게 내 양을 먹이라!”(21.15- )의 복음의 품에 미래 교회(‘나를 믿는 사람들’, 20)를 맡기신다. 예수님은 이를 기도 안에 품으신다. 역시 나를 믿는 사람들’(교회)이 사람들’(제자, 전도자)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믿은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미래 교회는 예수님의 기도의 성취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로 구성된다. 주님은 지금 기도를 통해서 이미 시작되었으나 아직 완성되지 않은 종말론적 미래를 축복하고 계신다. 이것이 궁극적으로 성취될 예수님의 영광’(24)이다. 주님은 십자가를 앞에 두고 이걸 보고 계신다.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21-23)

 

    “그들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옵소서.”(21)

    “내게 주신 영광을 내가 그들에게 주었사오니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이니이다.”(22)

    “내가 그들 안에 (있는 것은) 그들로 온전함을 이루어 하나가 되게 하려 함은

      아버지께서 그들도 사랑하신 것을 세상으로 알게 하려 함이로소이다.”(23)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 예수님이 하나이듯이(11, 10.30) 제자들도 하나가 되게 하시기를 아버지께 기도하셨다(11). 그런데 지금은 제자들을 뛰어 넘어 미래 교회의 백성들 역시 하나가 되기를 기도하신다(21).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 안에 교회를 두시겠다는 의미이다. 교회(‘나를 믿는 사람들’)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다: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4.3) 이를 위해 이번에는 주께서 교회 안에 계실 것을 말씀한다(23a). 이것은 저희로 온전히 하나가 되게 하려 하심이다. 이처럼 교회가 하나되는 것을 위해 주님은 아버지께서 당신에게 주신 영광을 나를 믿는 사람들’(교회)에게 주셨다(22a).

그런데 하나되게 하신 이유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다분히 세상’(21b,23b)을 겨냥하고 있다. 먼저,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보내셨다는 것을 세상이 믿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하신다(21). 또한 여기에서 끝나지 않고 아버지께서 예수님을 사랑하신 것과 같이 교회(‘그들’)를 사랑하셨다는 것을 세상이 알게 하려는 것이라 기도하신다(23). 우리가 하나되면 세상이 이를 안다는 것이다. 어떤 세상인가? 15장부터 줄기차게 이야기해 온 바로 그 세상, 그러니까 미워하고 핍박하는 죄를 범하고(15.18-25), 16장에서는 출교하고 죽이는 것을 통해 근심과 애통과 환난을 주는 바로 그 세상이다.

이처럼 세상은 그랬지만 주님은 반대로 그들을 사랑하신다(3.16). 그래서 육신을 입고 오셨고, 그리고 죽으신다. 세상이 이를 믿기를, 15-16장처럼 사는 사람들 가운데 나를 믿는 사람들’(그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을 또한 세상이 알게 되기를 기도하신다. 참으로 놀라운 주님의 사랑이다. 세상은 결코 대가(代價) 없이 그냥 주님과 그 주님이 하신 일을 믿거나 알지 않는다. 이를 위해서는 주님이 그걸 지불하셨고, 이제는 우리가 하나됨으로서 세상이 주님과 교회를 믿고 아는 일이 남아있다. 종말론적인 교회는 이러한 선교적 사명을 부여받고 있다. 한 사람 그리스도인이 바르게 살면 세상이 그를 통해 주님과 교회를 믿고 알게 된다는 사실 앞에 다시금 허리 굽혀 아멘이다.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24-26)

 

    “내게 주신 자도 나 있는 곳에 나와 함께 있어

      내게 주신 나의 영광을 그들로 보게 하시기를 원하옵나이다.”(24)

    “그들도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 알았사옵나이다.”(25)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그들에게 알게 하였고

      이는 나를 사랑하신 사랑이 그들 안에 있고

      나도 그들 안에 있게 하려 함이니이다.”(26)

 

나 있는 곳’(24a, 12.26, 14.3)에 미래의 교회인 내게 주신 자도 함께 있게 하여 주시기를 아버지께 간구하신다(24a). 이렇게 해서 창세 전부터의 영광을 그들(‘내게 주신 자’ = ‘나를 믿는 자’)로 보게 하여 주시기를 이어 기도하신다(25b). 주님은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에게 미래의 영광을 약속하신다. 주님은 창세 전부터 종말론적인 영광을 보는 자리까지, 바로 그 안에 제자들과, 십자가의 구속 이후 이들을 통해서 추수하게 될 내게 주신 자들’(교회)을 담으실 것이다. 아무리 세상이 핍박과 환난으로 몰아 넣는다 할지라도 보혜사 성령님 안에서 환난(슬픔)은 마침내 승리(기쁨)로 역전될 것이다. 주님은 기도 속에서 이를 우리에게 알리시면서, 우리로 하여금 동일한 비전과 꿈을 따라 살아가도록 초청하신다.

하지만 세상은 이를 이루신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25a). 그러나 제자들과 종말론적 교회 공동체는 아버지께서 주님을 보내신 것을 알고 있다(25b)는 점을 하나님께 알리신다. 이 일은 주님이 하신 일이고, 또 성령님께서 앞으로도 계속해서 알리실 것이다(26a). 주님은 지금 여기서 삼위일체 하나님의 사역을 그리신다. 그러니까 교회와 함께 하시는 하나님을 약속하신다. 성령님은 아들을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이 그들’(제자들과 내게 주신 자들) 안에 있게 하실 것이며, 예수님도 종말론적 교회 안에 거하실 것이다. 이를 위해 삼위일체 하나님은 세상 속에 있으나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 그러니까 나를 믿는 자들’(그들)에게 당신을 알리시며, 믿게 하시며, 하나되게 하시며, 그리하여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게 하신 그 은혜 안에 거하도록 하실 것이다. 이미 시작된 이 일을 주님은 기도를 통해서 더욱 분명히 하신다.

 

 

부스러기 묵상

 

주님의 기도를 읽고, 함께 따라 드리며, 말씀 묵상을 계속하고 있다.

그런데 이 기도를 묵상할수록 왜 그리 나는 작아 보이는지 모르겠다. 당장 필요하고, 눈에 보이는 무엇을 구하는 일에 익숙해져 있는 나, 하나님께 예수님의 이름으로 결국은 내가 원하고 바라고 기대하고 소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기도하는 나, 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야 할 것들을 생각해 내고 또 그것을 찾고 두드리는 행위에만 급급한 나, 그러다가도 내가 기대한 것이 주어지지 않으면 다시 기도를 동원해서 섭섭함을 토로하고, 그것도 여의치 않으면 온갖 수단과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동원하여 아양을 떠는 나, 이처럼 내 기도의 색깔은 온통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6.32a)과 하등 차별적이지 못하다.

생각해 보면 나의 기도는 세속적인 부분이 많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세상 사람들이 이런 것들을 자기 힘과 노력으로 얻으려 하고, 가짜 사이비 종교에서 그 답을 얻으려고 하는 것이나, 내가 결국은 썩어질 것을 구하는 것이나 대상만 다를 뿐 욕망과 욕심은 동일한 것이 아닌가 말이다. 하나님과 또 그분이 주신 거룩한 기도를 이처럼 취급하고 산 나의 연약함과 볼품없음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다. 주님의 기도는 이처럼 나를 참으로 부끄럽고 가난하게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창세 전부터의 영광을 오늘의 ’(그들, ‘내게 주신 자’ = ‘나를 믿는 자’)로 보게 하여 주시기를 기도(25b)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이처럼 사악하고 세속의 파편들로 가득찬 나임을 아시면서도 주님은 저 위대한 소망으로 나를 품으신다. 그리하여 거기까지 당신의 영광을 찬송하며 살도록 하시겠다 하신다. 바로 이것을 세상으로 하여금 알도록 하시기 위해 나를 부르시고, 당신을 알리시고, 진리를 믿게 하시고, 급기야 저 영광스런 종말론적 교회의 백성됨으로 나를 인도하신다. 주님은 기도 속에서 이 일을 계획하시고, 진행하시며, 또 성령께서 이 일을 완수하실 것을 바라보신다.

이제는 기도의 패러다임(paradigm)이 바뀌어야 할 때다. 주님 기도의 눈높이에 나의 영적 수준을 맞추도록 17장의 뜨락을 밟게 하신 주님! 언제쯤이면 주님처럼 기도하는 성숙한 자로 설 것인가도 중요하겠지만 지금부터 마치 구구단을 연습하는 마음으로 내 기도의 신앙부터 새롭게 바꾸어가야겠음을 새롭게 붙든다. 거지처럼 이것저것만을 구하는 자리에서 일어나야겠다. 이제는 가난한 과부, 두 렙돈 밖에 없지만 거지처럼 구하지 않고 그것마저도 주님께 아낌없이 드리는 헌신을 회복해야 할 때다.

단순히 능력만을 구하지 말고(4.13) 자족함과 일체의 비결(4.11-12)을 먼저 나 안에 채워보자. 이것이 영적으로 살아도 역시 괴로움’(4.14)인 바울의 비밀을 바울에게만 맡길 수 없는 내가 불러야 할 노래요 드려야 할 기도요 행해야 할 삶이 아닐까. 주님이 먼저 십자가의 괴로움 앞에서 능력 있게 살아가는 일체의 비결을 선행(先行)하셨다. 오늘따라 빌립보서 413절이 전후(前後) 구절보다 더 작아 보인다. 이처럼 14절을 나의 무엇을 위해 붙들지 않을 때 비로소 주님의 기도가 서서히 열리는 것 같다. 능력 있는 기도도 필요하지만 지금은 바른 기도를 회복해야 한다. 이 둘이 합력할 수 있음을 희미하게 발견해감이 기쁘다. 서서히 나의 기도생활이 중심을 잡아가는 것 같다. 주님의 기도는 이를 더 분명히 나를 깨우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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