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 이후의 삶에도 환난은 있다(요 16.25-33).

20220408(묵상)

  

 

 

믿음 이후의 삶에도 환난은 있다.

Jn. 16.25-33

  

    본문 관찰

 

    그 날에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26a)

    이는 너희가 나를 사랑하고 믿었으므로(27)

    우리가 믿사옵나이다(30b)

    이제는 너희가 믿느냐(31)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32a)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33a)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b)

  

 

믿음과 환난이 만나면

 

성도에게도 환난은 있다.

더 적극적으로 말하면 주님은 예수를 믿는 믿음 때문에 그에게도 환난을 만날 것이라고 말씀한다. 그러나 이 환난은 유한하다. 환난은 그리스도인들의 최종 종점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를 평안 가운데로 부르셨다. 그러므로 환난은 하나의 정거장에 불과하다. 지나가는 소낙비와 같다. 1년 동안 비오는 경우는 없다. 비가 오다 맑기도 하고, 그러다가 바람도 불고, 또 가뭄이 들거나, 태풍이 휘몰아치기도 하고,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푸른 하늘의 청청함이 계속 이어진다. 우리네 신앙 여정도 그렇다. 그렇다면 우리가 환난을 이기고 그리스도의 평안 가운데로 나아가려면 어떠한 신앙적 자세가 요구될까?

 

 

믿음이란?

 

믿음은 살아있는 유기체다. 믿음은 참으로 신비스러운 것이다. 믿음은 생명이요 생물(生物)이다. 그래서 믿음에는 호흡이 있고, 느낌이 있고, 숨을 쉬고, 성장하고, 발전한다. 16장에 이르러서야 제자들은 이 믿음을 고백하기 시작한다(30). 그들은 자연인(어부)의 자리에서 부르심을 받았다. 거기서부터 마침내 신앙을 고백하는 자리까지 자란 것이다. 믿음 또한 생명이기에 자란다. 따라서 성장이 멈춘 모든 것은 죽은 것이나 다름없다. 만약 우리 몸 가운데 어느 한 기관이 혹시 성장이 멈춘다면 어떻게 될까?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우리의 믿음은 자라고 있는가, 아니면 믿음이 성장하기를 멈춘 것은 아닐까.’ 제자들의 긴 방황(13.22,36,37, 14.5,8,22, 16.17-18)이 끝나고 믿음의 씨앗이 자라는 것을 보면서 든 생각들이다.

한편, 이 믿음의 제자들임에도 예수님을 버리고 떠날 것이 예고된다(32). 30절의 믿음 이후라는 점이 얼른 동의하기에 좀 그렇다. 그렇다면 이들의 믿음은 아직도 여전히 불완전한 믿음이다. 세상은 언제나 우리로 하여금 믿음 안에서 순탄하게 사는 것으로 그냥 놔두지 않는다. 믿음으로 산다고 하지만 사실은 순간순간 위험한 돌발사태를 만난다. 이것이 믿음의 길이다: “보라 너희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32a)

그렇다면 이와 같은 환경 앞에서 어떻게 신앙을 유지할 것인가? 휘청거릴 수 밖에 없는 노출된 신앙생활 속에서 건강한 영적 균형(자존감)을 유지한다는 것은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이어지는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자. 이처럼 언행이 일치하지 못한 믿음이지만 주님은 그럼에도 결국 평안이 이루어질 것을 약속하신다. 30절의 믿음을 격려하신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함이라.”(33a)

 

이 말은 믿음이란 궁극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는 것을 포함한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내가 믿음의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평안을 맛보지 못한다면 고장난 믿음이라는 뜻 아닌가. 주님은 내 믿음이 당신 안에서 평안을 누릴 수 있도록 앞에서 이미 평안을 약속하셨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14.27) 결국 지금 14장의 평안을 다시 확증하고 계신다고 볼 수 있다. 32절로 서 있음에도 말이다.

그렇다면 과연 누가 평안을 누릴 수 있는가? 30절을 믿는 성령 안에 살아가는 자다. 앞에서는 기도하는 자가 기쁨을 얻는다고 말하였고(22-24), 25절에서도 때가 이르면”, 그러니까 성령이 오시면 너희가 내 이름으로 구할 것이요”(26a)처럼 직접 아버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환난 가운데서도 기쁨을 빼앗기지 않을 것을 말씀한다. 이처럼 주님은 환난을 기도로 이겨내도록 하신다. 이는 17장에서 더 분명해진다.

 

 

환난이란?

 

이처럼 환난은 우리를 무너뜨리지 못한다. 이것이 오늘 말씀의 묘미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우리 주님이 다 이겨 놓으셨기 때문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33b) 환난을 만나지 않거나, 예수님이 아예 환난을 다 제거해 주시거나 하지 않으신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한다 하신다. 이게 정상이다.

 

    “다만 이뿐 아니라 우리가 환난 중에도 즐거워하나니

      이는 환난은 인내를,

      인내는 연단을

      연단은 소망을 이루는 줄 앎이로다.”(5.3-4)

 

환난이 어디까지 자라나는가. 당장은 무너질 것 같고, 회생의 여망이 사라진 것 같을지 모르지만, 그러나 안심이다. 주께서 우리를 소망의 자리까지 안내하실 것이기 때문이다. 창세기 22장에서 아브라함의 환난이 떠오른다. 독자(獨子) 이삭을 제물로 드리라는 하나님의 요구는 분명 환난이었다(1-2). 그러나 그는 3일 길을 인내하며 지시하시는 곳으로 간다(3-4). 그리하여 마침내 여호와 이레라는 큰 은총을 맛보는 자리까지 나아간다(5-14).

그렇다. 환난은 더 큰 은혜와 축복을 더하시기 위한 시작(서곡)이다. 갈보리 십자가의 고난의 길은 마침내 부활의 영광의 아침을 잉태한다. 그러므로 당장 눈앞의 어떤 사건(결과)만을 보지 말아야겠다. 지금은 슬퍼도 때가 되면 그것이 더 기쁨이 될 일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반대로, 지금은 나빠 보여도 가까운 훗날 그것이 변하여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의 큰 계획을 맛보게 된다(8.28).

 

 

부스러기 묵상

 

    “형통한 날에는 기뻐하고 곤고한 날에는 생각하라

      하나님이 이 두 가지를 병행하게 하사

      사람으로 그 장래 일을 능히 헤아려 알지 못하게 하셨느니라.”(7.14)

 

나는 지금 평안한가.

무엇 때문에, 무엇으로 말미암은 평안인가. 주님이 주신 평안으로 무엇을 하고 있는가? 시련의 언덕을 믿음으로 통과해가지만 믿음으로 가는 길에도 환난이 그치지 않는다. 주님은 이를 이미 아셨다. 그래서 담대하라 명하신다. 그 이유는 세상을 이기신 주님이시기에 그렇다. 환난은 이기라고 주신 것이라는 생각을 붙든다. 주께서 이긴다고, 이길 수 있다고, 이기게 하신다고 하시니 안심이다. 삶은 여전히 많은 숙제와 인생의 파도를 통과해 가지만 그러나 믿음을 주시고, 기도하게 하시고, 성령님 안에서 이기게 하시고, 말씀으로 늘 격려하시니 결코 외롭지 않다.

환난은 승리를 주시기 위한 예비고사와 같은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다면 환난은 또 다른 이름의 축복의 사인(sign)이다. 나로부터 나오는 무엇으로 이것을 이겨내는 것이 아니라 주께서 주시는 것으로부터, 말씀으로부터 환난의 해법이 주어진다는 게 얼마나 큰 복인가. 그리스도 안에도 환난이 있으나, 그러나 주님은 이 환난을 이기게 하시며, 그것을 만날 때마다 담대하라 하시니 얼마나 다행인가. 주님이 먼저 이기신 그 길을 나 홀로가 아닌 주님과 함께, 성령으로 더불어 가고 있음이 참 좋다. 이제부터는 환난만을 보지 않기로 하자. 환난과 함께 하시는 주님을 보며, 성령님의 도우심을 받아 살아가 보자. 이처럼 환난에서 주님이 보이니 안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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