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도의 파도타기는 주의 기쁨을 낳는다(요 16.16-24).

20220407(묵상)

  

 

 

기도의 파도타기는 주의 기쁨을 낳는다.

Jn. 16.16-24

  

    본문 관찰

 

    무슨 말씀이냐16-18)

    서로 문의하느냐(19-22)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3-24)

  

 

슬픔이 기쁨으로

 

예수님의 말씀(16)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17-18)이다.

이 반응에 대한 이어지는 말씀(19-24), 이와같이 요한은 계속해서 이 방식을 즐겨 사용한다. 그러나 문제는 십자가를 앞두고서 시작된 예루살렘 입성(12.12- ) 때부터 살펴보아도 제자들의 반응이 지금껏 의문과 영적 무지 일색이라는 점이다. 특별히 이때부터 십자가의 죽음이 집중적으로 선언되고 있는데도, 그러니까 공생애의 마지막 부분임에도 제자들의 언행이 그렇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그럼에도 주님은 계속해서 말씀하신다.

 

 

제자들: 무슨 말씀이냐?(17-18)

 

12장은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온 무리들과의 만남과 대화다. 여기에도 무수한 의문과 영적 무지가 표출되었다(19,29,34,37-43). 한편 13장부터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는 청중이 제자들이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듣고 또 거기에 대해 반응하는데, 그러면 주님이 다시 말씀하시는 방식으로 진행되어 왔다. 그런데 문제는 하나 같이 다들 예수님의 말뜻을 이해하거나 알지 못하였다는데 있다.

 

    “제자들은 처음에 이 일을 깨닫지 못하였다가 .”(12.16)

    “내가 하는 것을 네가 지금은 알지 못하나 이후에는 알리라.”(13.7)

    “제자들이 서로 보며 누구에게 대하여 말씀하시는지 의심하더라.”(13.22)

    “이 말씀을 무슨 뜻으로 하셨는지 그 앉은 자 중에 아는 이가 없고”(13.28)

    “시몬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a)

    “베드로가 이르되 주여 내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

    “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14.5)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14.8a)

    “가룟인 아닌 유다가 이르되 주여 어찌하여 .”(14.22)

    “제자 중에서 서로 말하되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16.17-18)

 

위의 제자들의 질문(의문, 불신) 사이사이에 예수님의 대답이 계속되어 왔다. 하지만 문제는, 제자들은 지금 예수님의 말씀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다. 이것이 제자들의 영적 상태다. 심각하다. 제자훈련이 거의 마무리되어 갈 즈음이 아닌가. 그리스도(메시야)3중 사역에 따른, 그 많은 말씀들과 표적(기적)들을 직접 목도하고 들었던 자들이 아닌가. 한편, 다른 각도에서 보자면 제자들은 참 솔직하다. 모르고 의문이 나고, 알쏭달쏭한 것들을 그대로 표현한다. 그러나 이것은 바리새인들의 질문과 근본적으로 다른 시각이며, 가룟 유다와도 다른(12.4-6), 주의 말씀을 듣고 난 이후의 반응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16절의 말씀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 역시 마찬가지다. 주님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한 말씀은 여기가 처음이 아니다. 하나님은 예수님을 통해 요한복음 1장에서부터 이미 십자가의 구속 사역에 대해서는 점진적으로(progressive) 계시하셨다. 이를 제자들이 지금 깨닫지 못하고 있을 뿐이다: “장차 보리라!”(1.42,50-51)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1.14a)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이로다.”(1.29)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3.14)

    “예수께서 이르시되 네게 말하는 내가 그라 하시니라.”(4.26)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6.51b, 6)

    “내가 너희와 함께 조금 더 있다가 나를 보내신 이에게로 돌아가겠노라.

      너희가 나를 찾아도 만나지 못할 터이요 나 있는 곳에 오지도 못하리라.”

    (7.33-34, *참조/ 8.21, 12.8, 13.33,36, 14.2-3,12,19,28-29, 16.5-7,16)

 

 

예수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19-25)

 

    “너희는 곡하고 애통하겠으나 세상은 기뻐하리라

      너희는 근심하겠으나 너희 근심이 도리어 기쁨이 되리라.”(20)

    “지금은 너희가 근심하나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

      너희 마음이 기쁠 것이요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

 

이처럼 예수님에 대해서 무지한만큼 곡하고, 애통하고, 근심한다. 어쩌면 이러한 진단은 이미 예고된 답안인지도 모른다. 예수님은 지금 정확하게 제자들의 심령 상태를 보고 계신다. 사실 많은 근심이 이렇게 시작되고 진행된다. 그만큼 주님 따로, 나 따로이기 때문이다. 그처럼 무수한 말씀들을 듣고, 예수님의 행적을 보았음에도 불구하고 무엇을 말씀하시는지 알지 못하노라.”(18b) 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영적으로 성장이 더디거나, 아예 성장이 멈추어 버린 것 같은 사람들을 만날 때다. 도무지 거룩하고 영적인 것에 대해서 관심이 없고, 또 둔감하고 깨닫지 못하며, 바르게 반응하지 못하는 영적인 어린아이들이다. 이들이 하는 일이란 오히려 세상으로 하여금 기뻐하도록 만드는 역할뿐이다. 세상은 예나 지금이나 이처럼 함량미달인 그리스도인들을 보고 기뻐하고, 예수님을 조롱하고, 복음을 우습게 여긴다. 언제나 나의 이 추한 꼴이 끝날까.

그러나 주님은 죽으심과 부활하심을 통해서 이 세상의 구도를 일거에 바꾸신다. 내가 다시 너희를 보리니”(22a), 그러니까 예수님의 부활이 오직 이 일을 성취하신다. 허물과 죄로 죽었던 나를 십자가의 보혈로 씻어 정결케 하시는 구속하심만이 인생의 모든 근심을 중지시킨다. 주님만이 이 일을 성취하신다. 이 일에 인생이 한 일이란 아무 것도 없다. 인간이 근심으로부터 기쁨으로 옮겨가는 일을 위해 지불한 대가는 전무(全無)하다. 오직 주님만이 예루살렘 입성을 즈음하여 더욱 근심과 긴장으로 치닫는 제자들의 삶을 기쁨과 희망으로 돌려 놓으실 수 있다: “너희 기쁨을 빼앗을 자가 없으리라.”(22b)

 

 

부스러기 묵상

 

    “지금까지는 너희가 내 이름으로 아무 것도 구하지 아니하였으나

      구하라 그리하면 받으리니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

 

참으로 놀라운 약속이 주어진다.

여기 그 날에는’(23a)은 주님이 부활하신 이후의 날이다. 이를 통해 영원한 생명의 기쁨과 행복이 시작된 날이다. 그날이 오면 제자들은 지금까지의 우문(愚問)을 묻지 않을 것이다(23a). 그날이 오면 오직 부활의 기쁨이 기도를 통해서 날마다 재현될 것이다. 단순한 기도 응답의 약속만이 아니다. 부활하심을 통하여 근심이 물러가고 기쁨이 온 것은 전적으로 주님께서 하신 일이다. 그런데 기도는 내가 구하는 것 아닌가. 문제는 그 기도를 통해서 너희 기쁨이 충만하리라”(24b) 약속하신다는데 있다.

정리하면, 20절과 22절의 기쁨은 하나님이 하신다. 그러나 23-24절의 기쁨은 주의 이름으로 기도하는 우리도 여기에 참여한다. 놀랍지 않은가. 주님이 이루신 기쁨을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도 맛본다는 것, 이것은 기적이다. 주님은 여기까지 우리를 이끄신다. 그렇다면 기도는 단순히 사람의 욕망과 필요를 채우는 수단이 아니라는 뜻을 포함한다.

기도는 주님이 이루신 일의 눈높이에서 세상을 보며, 우리를 보며, 주님을 보는 거룩한 행위이다. 거기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싶어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슬픔이 기쁨으로 변하는 그 일에 중심에 오직 주님이 서 계신다. 제자들은 여전히 근심에 쌓여있다. 주님은 이 문제를 해결하시기 위해 조금 있으면십자가를 지실 것이며, 조금 있으면근심이 변하여 기쁨이 된 영원한 기쁨과 구원을 노래하는 공동체를 이루실 것이다.

그날에는의 바로 그 날은 이미 와 있다. 주님은 이 기쁨을 우리의 기도를 통해서 지금도 체험하며, 누리며 살아가기를 기대하신다. 이 기도 앞에만 서면 난 행복하다. 주님이 이루신 기쁨을 기도의 파도타기를 통해서 언제나, 어느 때나, 어디에서 다시 맛볼 수 있다는 이 축복을 누구에게도 빼앗기고 싶지 않다. 기도 속에서 익어가는 기쁨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 다시 기도의 무릎을 깊게 끓어야 할 때, 그 때가 바로 지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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