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 안에도 환난은 있다(요 16.1-6).

20220406a(묵상)

  

 

 

성령 안에도 환난은 있다.

Jn. 16.1-6

  

    본문 관찰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3)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4-6)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1a)

    “오직 너희에게 이 말을 한 것은 .”(4a)

 

15장의 환난 예고(18-25) 성령님 예고(26-27)16장에서 다시 교차한다.

성령님은 환난 그 이후를 주목하게 만든다. 단지 고난과 어려움만이 아니기에 그렇다. 출교와 죽음(2)의 환난은 그것으로 끝이 아니다. 그러나 이 일을 당하기도 전에 근심이 가득하여 있다. 이게 천국로를 따르는 자들이다. 과연 희망이 있는가.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3)

 

주님은 지금 미래를 내다보고 계신다. 하지만 이 앞으로의 시간이라는 게 장밋빛 같은 희망이 아니기에 그것을 대비시키고자 하시는 섬세한 주님의 손길이 느껴진다: “너희로 실족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1b) 주께서 이것을, 그러니까 앞서 1518절 이하의 말씀을 한 것은 이 때문이었다 하신다. 고난과 환난이 와도 넘어지지 않기를 기대하시는 주님을 만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고난과 환난 그 자체가 없게 하려고 하시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혹자들은 예수를 믿으면 고난과 고통과 고생이 없다고, 아니 없어야 한다고 기대한다. 그것도 잘 믿는 만큼, 그러니까 자신의 믿음과 비례해서 이것들이 있고 없고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믿음의 목적이 하나님의 영광이 아니라 자신의 인생에서 고통과 어려움을 만나지 않는 것이 되어 있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이 말씀하신 믿음이 아니다. 믿음은 나의 어려움을 없애주는 아스피린(만병통치약)이 아니며, 믿음은 내가 이 세상을 좀 더 편리하게 사는 데 필요한 요술방망이(수단)가 아니다.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실족(失足)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하시니라.”(11.6)

 

주님은 환난(15.18- ) 때문에 실족할 위험이 있음을 미리 하셨다. 그것도 메시야로서의 사역이 성취되고 있음을 말씀하시면서(11.2-6) 이어서 하신 말씀에서 실족함의 문제를 다루고 계신다는 점을 쉽게 지나칠 수 없을 것 같다. 어떻든 실족하지 않게 하시려는 주님의 깊은 마음쓰심이 느껴진다. 실족의 변수는 여기서도 제시된다. 그것은 먼저 출교(출회, 2a) 당함이다. 유대 공동체(회당)에서 내쫓음을 당한다는 것은 삶 전부가 위협을 받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아들이 눈을 뜬 것을 알면서도 두려운 나머지 진실을 얼버무린 부모의 대답에서 이것이 갖는 중압감을 느낀 바 있다(9.22).

또한 복음으로 산다는 것은 이미 그 안에 죽음(순교, 2b)을 각오하는 삶이다. 정말이다. 주님을 믿고 산다는 것은 결코 쉽게 떠올리는 축복과 같은 그런 것만을 누리며 사는 것은 아니다. 주님을 따른다는 것은 이미 자기를 부인(否認)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16.24) 가는 삶이며, 이것은 주를 위해 자기 목숨을 잃는 것을 포함한다(16.25). 이것이 진짜 사는 길이며, 복음이 갖는 역설이다.

이것을 모르니까, 즉 이 일을 계획하시고 이루시는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알지 못하니까(3), 믿음 안에서의 삶을 실족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생각하는 영적 무지에 빠지는 것이다(2):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이라 하리라.” 주님은 이 때가 올 것이라 하신다. 그리고 이것이 믿음으로 사는 사람들을 실족시키려고 할 것을 미리 예고하신다. 이러한 심각한 영적 왜곡이 팽배하게 되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모르는 영적 무지에서 비롯된다 하신다(3).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4-6)

 

주님은 다시금 환난 예고(15.18- )의 이유를 하나 더 밝히신다. 그것은 내가 너희에게 말한 이것을 기억나게 하려 함이요”(4a)라 하신다. 사실 요한이 요한복음을 기록하던 AD 1세기 말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단 하나의 이유 때문에 이미 핍박과 환난이 태풍처럼 밀려와 있는 시기였다. 이미 흩어지는 환난과 핍박의 시대(8.1- )의 연속선상에서 로마 황제 네로의 박해(AD 65)와 예루살렘 성전 파괴(AD 70)를 경험하면서 이것들은 우연히, 하나님 몰래, 주님과 아무 상관 없이 돌아가는 일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기억해야만 했다.

그런데도 제자들은 이 위기의 오고 있음을 아직 눈치채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5). 물론 베드로가 앞서 주여 어디로 가시나이까”(13.36a) 물었다지만 이것은 주님이 왜 이 말씀을 계속하시고 있는지 알지 못하고서 한 말이었으리라. 그러니 5절과 같은 말을 듣고 있는 것 아닌가. 그러니 그것만큼 주님과 초점(눈높이)을 맞추지 못할 수 밖에.

 

    “도리어 내가 이 말을 하므로 너희 마음에 근심이 가득하였도다.”(6)

 

이렇게 밖에 반응하지 못하는 제자들의 모습, 아직은 미래의 예고편임에도 단지 그것을 들었다는 단 하나의 이유만으로도 벌써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제자들, 어쩜 이게 나의 모습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럼에도 여전히 희망은 그럴수록 더 분명히 제시된다. 그것은 성령님의 오심이라는 약속이다(15.26-27, 16.7- ). 환난이 예고되면 곧바로 성령님이 약속으로 주어진다. 이 그림이 환난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이요, 일하심이다. 미처 이를 알지 못하면서, 그래 출교와 핍박하는 저희들처럼 영적 무지의 늪에 빠져 있는, 핍박과 환난이 끝이 아님을 기억조차 못하고서 근심이 가득한 제자들, 이들 무리 가운데 우리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고 어찌 장담할 수 있으랴.

 

 

부스러기 묵상

 

예고편(15.18- )에서부터 근심에 쌓인 제자들이 아른거린다.

제자들에게 투영된 나를 보면서,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를 더 생각해 본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봄은 봄이다.

4월이 오는 길목에도 눈싸라기가 내리는 차가운 날씨일지라도 봄의 옴을 막을 순 없나 보다.

거리마다 목련이 가득 피어났음을 볼 때 더 그러하다.

저녁 11시 무렵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이걸 볼 수 있었고, 그래 봄이지 하는 마음이 좋았다.

좀 피곤하고 힘들었어도 그냥 좋았다.

어떻게 지났는지도 모르게 벌써 한 주간이 지나버렸다 싶다.

 

복음의 열정을 회복하기 위해 몸부림치는 교회들을 만났다.

그러면서 하나님이 어떻게 이 복음 안에서 역사하시는가를 역시 주목하며 지냈다.

모두가 다 수고했고, 역시 다함께 감사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사랑하심과 은혜 때문이다.

이 모든 큰 일을 이루신 하나님께 영광과 찬양을 드린다.

 

종종 나는 이런 질문을 스스로 던진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힘든 하루하루를 틈틈이 씨름하면서 보냈다.

나는 지금 하나님이 주시는 바로 그 사람의 본분을 좇아 사는가?

지웠다, 그렸다, 덮어 씌웠다, 스케치를 했다, 뭐 그러면서 여기까지 왔다.

언제쯤이면 그럴듯한 그림이 그려질 지,

그래 이 그림이 천국 겔러리(Gallery)에 걸리는 날을 소망하면서 이왕이면 답게 살아야겠다.

 

피어나는 봄의 꽃향을 언제나 마음에 간직하며 살아보자.

내 영혼의 살아있음을 느끼며 사는 것, 이 생명이 계속해서 율동하기를 소망한다.

이 향기가 복음 안에서 내 안에서도 자라고 있음이 그냥 즐겁고 좋다.

언젠가부터 목회에로의 삶이 조금은 안단테(andante)임이 안심이다.

성급함이나 욕심이 앞서지 않도록 내 영혼의 창 앞에 조용히 서 본다.

봄은 봄이다.

이 봄이 좋다.

나는 무엇으로 사는가?

다시금 말씀 앞에 무릎을 꿇는다. 그것만이 희망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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