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세례 요한의 장례식(마 14.1-12)

20220713(묵상)

  

 

 

세례 요한의 장례식

Matt. 14.1-12

  

 

    본문 관찰

 

    주님과 헤롯(1-2)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세례 요한과 헤롯(3-12)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

       요한을 죽이려 하되 민중을 두려워하더니

       딸이 헤롯을 기쁘게 하니 왕이 근심하나

  

 

세례 요한 vs 헤롯

 

요한은 헤롯의 죄를 지적하다가 옥에 갇혔다(3, 11.2).

그때 그는 오실 그이가 당신이오니이까 우리가 다른 이를 기다리오리이까”(11.3)라고 말할 만큼 흔들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주님은 흔들림 없이 천국 복음을 증거하시는 일을 계속하신다. 한편 이 와중에 요한은 순교한다. 예수님이 고향에서까지 배척을 받으시고 계실 때 말이다(13.53-58). (, 요한)이 악(, 헤롯)에 의해 무참하게 짓밟힌다. 그리고 승리한 것 같아 보인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헤롯 이야기

 

복음은 헤롯의 귀에까지 확장된다(1). 죄악이 물결치는 곳에까지 복음은 찾아간다. 헤롯이 아무리 악을 선으로 이기려 한다고 해도, 그래서 그가 더 깊은 죄인의 자리로 추락한다 할지라도 복음은 그를 포기하지 않는다: “그 때에 분봉왕 헤롯이 예수의 소문을 듣고”(1) 참으로 놀라는 대목이다. 헤롯은 간음죄를 범함으로써 그의 왕궁이 죄악의 피로 뒤덮였다. 이게 다 사탄의 장난이고 노림수다. 그럼에도 주의 복음은 헤롯의 왕궁까지 찾아간다.

그럼 헤롯의 죄는 어떤 모습일까. 그는 이복 동생 빌립의 아내를 부인으로 취하였고(3a, 근친상간), 이것 때문에 요한으로부터 당신이 그 여자를 취한 것이 옳지 않다”(4, 18.16)라는 충고를 듣게 되었다. 그렇다면 그는 여기서 돌아섰어야 했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요한을 감옥에 집어넣는다(3b). 진리의 소리를 물리적인 힘(세상 권력)으로 막아버릴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이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가 가지고 있는 힘으로 죄를 덮을 수 있다고 생각하며 살아가는지 모른다.

헤롯의 비극은 요한을 죽이려 하면서도 두려워하더니”(5b)기쁘게 하니”(6b), 그리고 다시 근심하나”(9a)라는 여전히 극과 극으로 치닫는 모습으로 일그러져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영적 감각이 없자 모든 것을 다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죄악을 향한 두려움과 근심으로 벌벌 떤다. 그러니 찰나적이고 감각적인 것에 의존하여 거짓 기쁨으로 위장하며 사는 것 아닌가.

참으로 불행한 인생이다. 그는 모든 것을 다 소유했다. 정말 인간적으로 볼 때에는 부끄러울 것이 없는 소위 성공한 사람(CEO)이다. 그런데 죄의 삯인 두려움과 근심을 해결해 보려고 깨낸 것이 주색잡기(酒色雜技, 6)였으니 참으로 가련한 인생이다. 하지만 이런 거짓은 여전히 권좌(權座)에 머물러 있고, 오히려 참은 목 베어 죽음을 당함으로써 마태복음의 무대에서 퇴장한다(10-11).

그런데 주님은 복음으로 그런 헤롯을 찾아가신다(1). , 이 얼마나 놀랍고 가슴 떨리는 일인가. 평범하게 읽곤 했던 1절이 이처럼 내 가슴을 파고든다. 다시금 주님은 어떤 분이신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헤롯은 자신에게 옳은 길을 제시한 주의 종 요한을 죽였지만 주님은 그런 헤롯을 찾아가신다. 복음은 이처럼 강렬한 반대 세력에도 불구하고 바로 그 적대자의 귀에까지 전파된다.

그럼에도 헤롯은 한심한 몰골로 예수의 소문에 응답한다: “이는 세례 요한이라 저가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났으니 그러므로 이런 권능이 그 속에서 운동하는도다.”(2) 이것으로 봐서 헤롯은 소위 요한 사건때문에 편하지 않는 시간들을 지내온 모양이다. 그는 귀동냥으로 주워들은 진리의 조각들을 자기 마음대로 맞추어 버린다. 이렇게 해서 자신의 지난 모든 것을 다 청산할 수 있는 기회는 점점 그의 곁을 떠나고 있다. 어쩌면 헤롯 이야기는 우리시대 사람들의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부스러기 묵상

 

    “헤롯이 예수를 보고 심히 기뻐하니 이는 그의 소문을 들었으므로

      보고자 한 지 오래였고 또한 무엇이나 이적 행하심을 볼까 바랐던 연고러라.

      여러 말로 물으나 아무 말도 대답지 아니하시니,

      헤롯이 그 군병들과 함께 예수를 업신여기며 희롱하고

      빛난 옷을 입혀 빌라도에게 도로 보내니,

      헤롯과 빌라도가 전에는 원수이었으나

      당일에 서로 친구가 되니라.”(23.8-9,11-12)

 

헤롯 이야기를 읽으면서 그를 줄 곳 생각한다.

그는 끝내 주님의 고난과 죽으심 앞에서까지 빛으로 나아오는 것을 거부한다. 한심하게도 주님을 무슨 마술사로 보고 있다. 또한 예수님과 친구되기를 거부하고 빌라도와 친구가 된다. 이게 죄인의 모습이다. 헤롯은 주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기 직전까지 자신에게 주어진 기회의 시간을 선택하지 못한다. 그는 변화되지 않은 것이다.

요한은 죽음으로 마태복음의 무대에서 퇴장한다. 그러나 헤롯은 모든 부귀영광(富貴榮光)을 온 몸으로 받고 당당하게 서 있다. 그렇지만 누가 잘 산 것이고, 누가 승리자이며, 진정으로 행복한 사람인가. 하나님도 요한의 죽음을 막아주지(?) 않으셨다. 여인이 낳은 자 중에 가장 큰 자요(11.11a) 주님의 뒤에 서서 묵묵히 섬겼던 요한은 목이 베임을 당하여 죽었다. 그런데 이 일을 행한 죄인 헤롯에게 주님은 찾아가신다(1).

나와 헤롯은 죄인이라는 근본에 있어서는 다를 바 없다. 내가 죄인 되었을 때에 주께서 십자가에서 나를 향한 하나님의 사랑을 확증해 주셨을 때, 그리하여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라고 주님 앞으로 나아간 것뿐이다. 나 역시 헤롯처럼 살고 있을 때 주께서 나를 찾아오셨다. 때문에 헤롯의 후예로 살아가는 모든 사람들에게도 주님은 필요하다. 오늘도 헤롯처럼 살아가는 죄인들을 찾아오시는 일을 계속하시는 주님을 바라본다. 그것만이 희망이다!

세례 요한의 장례식을 묵상해 본다. 그는 죽었으나 영생을 얻었다는, 하지만 반대로 헤롯은 살아있으나 영적으로는 죽어있는 전혀 다른 그림을 보게 된다. 누구를 위해서 슬퍼해야 하는지도 조금은 알 것 같다. 혹 요한처럼 피다가 지는 꽃일지라도 그것이 내가 맡은 배역이라면 기꺼이 감당해야겠다는 생각도 해 본다. 더 없이 측은해 보이는 헤롯이다. 그러기에 어떻게 살아야할지, 무엇으로 살아야할지, 요한의 메시지를 내 가슴에 장사지내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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