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대인 vs 이방인(눅 14.15-24)

20210215(묵상)

  

 

 

유대인 vs 이방인

Luke. 14.15-24

  

    본문 관찰

 

   초대장(15-17)

      A 초대에 대한 첫 번째 반응(18-20): ‘가지 못하겠노라.’

      B 초대에 대한 두 번째 반응(21-23):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

    반응의 결과(24): 더 이상 A에게 기회는 없다.

   

 

큰 잔치 비유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b)

 

앞서 주님이 하신 이 말’(7-14)을 들은 자의 반응에서 본문은 시작된다.

그 사람은 주님과 함께 청함을 받은 자였는데 이렇게 말한다: “무릇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는 자는 복되도다!”(15) 곰곰이 생각해 보지만 그가 한 말의 정확한 의미(의도)를 잘 모르겠다. 아마도 그는 생각하기를 자신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을 수 있는 자라고 생각했는 것 같다. 마치 니고데모처럼 뭔가를 알고, 또 그것을 확신하면서 말이다(3.2,4). 하지만 누가 하나님의 나라에서 떡을 먹을 것인가? 생각할수록 만만찮은 이야기다.

   

 

일순위자들(18-20)

 

큰 잔치를 배설한 후 주인은 이미 청하였던 많은 사람들에게 종을 보내어 잔치의 준비를 알린다(16-17). 주인의 준비는 끝났고, 이 잔치를 빛낼 하객들이 다 차면 곧 잔치는 시작될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문제가 생긴다. 정작 잔치는 준비되었는데 첫 번째 초대장을 받은 유대인들이 보인 반응 때문이다: “다 일치하게 사양하여 가지 못하겠노라.”(18-20) 각각 밭을 샀으매(18),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19), 장가 들었으니(20)라는 이런저런 이유 때문이었다.

주인은 분노한다(21a). 당신과 잔치 모두가 사람들로부터 외면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유라는 것들이 이 세상의 일상적인 일들 때문이었다. 마치 노아시대에 준비된 방주를 대하던 사람들처럼 말이다: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 들고 시집 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24.37-39)

그랬다. 이미 잔치가 예고되었고, 하객들이 모집되고 있음에도, 먼저 초대를 받은 많은 사람들은 끝까지 주인의 초대를 거절한다. 이들은 누구인가. 유대인들이다. 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주인(하나님)을 잘 아는 자들이다. 그리고 주인으로부터 많은 사랑을 받았고, 또 지금도 받고 있는 자들이다: “잔치할 시각에 그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을 보내어 .”(17a)

이미 초청장을 보냈고(구약의 예언), 이제 잔치할 시간이 되어 청하였던 자들에게 종들을 보내어(선지자), 아니 구약의 예언의 성취인 메시야로서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과 같이”(2.7) 되셔서 하나님이 초대한 자들에게 이제 시작될 잔치를 알리셨다. 하지만 이미 초대장을 받은 유대인들의 반응은 싸늘했다. 모두가 다 그럴듯하지만 결국 세상(육신, 정욕)적인 이유들을 들어 주인의 잔치를 거절하였다.

   

 

이순위자들(21-23)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보라 나중 된 자로서 먼저 될 자가 있고

      먼저 된 자로서 나중 될 자도 있느니라 하시더라.”(13.29-30)

 

이쯤 되면 주인의 마음은 당연히 분노하기에 충분하다(21a). 어떤 인간이 주인(하나님)의 잔치보다 우선한 이 땅의 일들이 있단 말인가: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6.33a)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6.32)의 수준을 넘지 못하였다. 이것이 잔치에 참여하는 영광이 역전되는 이유다(13.22-30).

놀라운 것은 주인의 포기하지 않는 잔치에의 초대 때문에 잔치는 중단되지 않았고, 그 결과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나가서 가난한 자들과 몸 불편한 자들과 맹인들과 저는 자들”(21b)이 잔치 자리에 초대를 받게 된다. 이처럼 이순위자들인 나중에 초대된 이들은 다름 아닌 이방인들이다.

한편 잔치는 아직 열리지 않고 있다. 유대인들이 거부한 자리에 빨리 데려오라!”(21b)고 명한 이방인들이 채워졌음에도 말이다. 왜냐하면 아직 잔치 자리가 다 차지 않았고 주인이 명하신 대로 하였으되 아직도 자리가 있나이다!”(22)라는 종들의 보고 때문이다. 그렇다. 이미(already) 준비되어 예고되었으나 잔치 자리가 아직(not yet) 차지 않았다. 여기가 신비요, 은혜가 서는 자리다. 주님의 오심부터 채워지기 시작한 잔치 자리는 주님이 다시 오실 때까지 바로 그 오히려 자리가 있나이다!”(22b)를 채우는 은혜의 기간이다. 이 시간이 유대인과 이방인의 운명이 뒤바뀌는 자리이다(24, 13:22-30).

   

 

부스러기 묵상

 

    “전에 청하였던 그 사람은 하나도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24)

 

주인의 잔치는 중단되거나 포기되지 않는다.

비록 초대한 자들이 불손하게 언행하고 있다 할지라도 주인은 하객들 때문에 잔치를 망치는 그런 쪽으로 일을 끌고 가지 않는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주인의 체면은 말이 아니다. 잔치보다도 자기의 일에 우선순위를 두고 살아가는 허다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주인이 보인 반응은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나 같으면 그래, 잔치 하지 말지 뭐!” 그러면서 그것으로 잔치의 문을 닫아 버렸을 것 같다.

그런데 주인은 다시 하객들을 모집한다. 주인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태초에 에덴에서부터 주인의 잔치는 일그러지기 시작했고, 이 무수한 세월 동안 주인은 잔치를 준비해 오셨고(구약), 마침내 주빈(메시야)이 준비되면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 마침내 이미 청한 자들에게 다시 잔치가 예고된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17b)

실로 긴 세월이었다. 창세기부터 세례 요한을 거쳐 마침내 잔치의 주빈(主賓)이신 예수님께서 이제 잔치의 자리에 앉으려 하신다. 참으로 우여곡절(迂餘曲折)이 많았다. 창세기부터 누가복음 14장까지 오기까지의 시간들 말이다. 이날을 맞기까지 주인의 가슴은 시커멓게 타 버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분은 이 장구한 세월 동안 묵묵히 잔치를 준비하셨다. 초청장을 받기에는 아무런 가격도 권리도 없는 배은망덕한 자들(‘’)을 위해서 말이다.

주인의 열심(열정, 인내)을 배우고 싶다. 아무도 흔들 수 없는, 하객들과 상황에 따라 이리저리 춤추는 그런 줏대 없음이 아닌, 다른 사람들의 반응에 따라 결코 당신의 마음을 뒤바꾸지 않는, 그래서 아름답고 풍성하고 행복한 잔치가 되도록 여기에 모든 힘을 집중하고 있는 주인처럼 살고 싶기 때문이다. 남편의 자리에서, 아빠의 자리에서, 부모의 자리에서, 목사의 자리에서, 무엇보다 하나님의 자녀의 자리에서 내가 맞이하게 될 그날의 잔치를 주님의 마음으로 준비하고 또 맞이하고 싶다.

주인의 잔치가 곧 임박하고 있다. 나도 이 잔치에 초대장을 받은 자 아닌가. 마침내 잔치에 참여하는 그날까지 주인은 잔치를 포기하고 있지 않았듯이 나 또한 이 잔치를 위해, 잔치를 빛내는 하객으로서 그 잔치의 한 자리에 앉고 싶다. 나 같이 부족하고 못난 자에게까지 잔치에 초대해 주신 주님을 찬양한다(21b).

한 가지 재미(?)난 것은 잔치는 이미 예고되었으나 아직 열리지 않았다는 점이다. 왜 그런가. 이 점이 이 비유의 빠뜨릴 수 없는 핵심 중 하나다. 그 이유는 22-23절에 있다. 채워야 할 잔치의 자리가 아직 남아 있기 때문이다. 주인은 그 자리가 다 찰 때까지 기다리시겠다 하신다. 놀랍게도 그 기다리는 시간을 주인이 서둘러 준비하신다: “길과 산울타리 가로 나가서 사람을 강권하여 데려다가 내 집을 채우라!”(23)

수고하는 자는 잔치의 주빈이신 주인과 하객들을 불러 모으는 종들이다. 정작 잔치에 초대 받은 자들은 관심도 없고(유대인), 후에 초대 받은 자들도 넘치도록 참여하지 않았다(이방인). 그러나 저들은 자신들이 언행(言行)한 것에 대한 최종적인 책임을 피할 수가 없다(24). 기회는 언제나 오는 게 아니다.

지금 잔치를 알리는 깃발이 휘날릴 때 -마치 모세의 때에 불순종한 자들이 사망의 그늘 가운데서 죽어가다가 놋뱀을 처다 본 자들이 구원을 얻었듯이- 마지막 기회의 때를 놓치지 않아야 한다. 밭이나 소에게(물질의 행복), 결혼(세상의 행복)에게 영혼을 빼앗길 때가 아니다. 영원한 행복에 열리는 천국 잔치를 외면하고서 무엇을 찾고, 두드리고, 구하고 있는지를 곰곰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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