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생활의 영성.靈性(눅 14.1-14)

20210214(묵상)

  

 

 

일상생활의 영성(靈性)

Luke. 14.1-14

  

    본문 관찰

 

    세 번째 안식일 논쟁(1-6)

    청함을 받은 자의 태도(7-11)

    청한 자의 자세(12-14)

   

 

너 자신을 알라!

 

주님의 일하심을 순수하게 보지 않으려는 세력(무리, )이 부상한다.

율법사들과 바리새인들인데 이들은 보다 적극적으로 자신들의 기준에 따라 주님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을 증거 삼으려고 이제는 더 적극적으로 주님을 엿보고’(1) 있다. 정작 안식일을 지키지도 못하고, 무엇보다 안식일을 누리지도 못하고, 그러니 누가 안식일을 범하는가라는 꼬투리를 찾기 위해 안식일을 보내고 있는 측은한 사람들의 몰골이 너무나 불쌍해 보인다.

한편 잔치에 청함을 받은 사람과 청한 자 모두가 단순히 먹고 마시는 자리가 아닌, 잔치를 통해서 그것까지도 좀 더 자신들을 돌아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야 함을 교훈해 주신다. 사람은 언제나 이 둘의 사이에 서 있다. , 청함을 받은 사람과 청하는 사람으로다.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만들어지는 일상생활의 영성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가를 돌아보는 묵상이다.

   

 

세 번째 안식일 논쟁(1-7)

 

    첫 번째 논쟁(6.1-11)

    두 번째 논쟁(13.10-17)

 

셋 다 안식일에 병을 고친 것과 관련되어 있는데, 먼저는 주님을 어떻게 할까를 의논하게 했고(6.11), 그 다음은 병 고치는 것 자체를 금지했고(13.14), 이번에는 주님이 먼저 사람 중심의 안식일을 말씀하신 후에 병을 고치시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바리새인들은 뭔가를 금(제한, 부정)하는 쪽에서 접근하고, 주님은 뭔가를 하시는 쪽에서 보다 적극(긍정)적으로 안식일을 대하신다.

() 치유, () 말씀의 구조가 이번에는 역전된다. 앞에서는 먼저 고쳐주시고 그것을 시비하는 자들에게 말씀해 주셨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님이 보다 적극적으로 공세를 취하신다. 안식일에 병을 고치는 것은 합당한데(3) 그 이유는 아들이나 소나 우물에 빠졌으면 안식일에라도 곧 끌어내”(5)어 문제를 해결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지금 주님을 시비하는 자들도 자신들의 삶에서 일반적으로 경험하는 것들이다. 그런데 자신들이 하면 문제가 없고, 예수님이 하면 안식일을 범하는 것이라니 어이가 없다. 보통의 경우 자신에는 관대하고 남에게는 엄격한 경향이 있는데 당대 최고의 성경학자를 자처하던 율법사라는 사람들이, 그리고 하나님을 가장 잘 섬긴다고 뻐기던 바리새인들이 한 일이란 [마녀(魔女)사냥] 식으로 주님을 곤경에 빠뜨리고자 혈안이 되어 있다.

자신에게 말씀을 적용하며 말씀대로 살아보려고 해도 부족할 텐데 어찌된 게 다른 사람에게, 그것도 그를 공격하고 무너뜨리고 죄를 덮어씌우기 위해 안식일과 율법 앞에 서 있다. 그럼 나는 어떤가. 내가 아는 성경 지식으로 다른 사람을 곤경에 빠지도록 하는 것으로 밖에 사용하고 있지 못하다면 나 또한 율법사(바리새인)와 하등 다를 바가 없다.

주님의 메시야 사역을 무력화하기 위해 온 시선이 주님께 집중되어 있을 바로 그때 한 사람이 온 몸이 퉁퉁 부어오른 수종병(고창병, dropsy, 2)으로 신음하고 있었다. 주님께는 그의 고통이 보였다. 옳고 그름의 칼날을 번뜩이던 바리새인(율법사)들은 이 사람이 보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보았을지라도 그 사람의 눈물과 아픔을 해결해 줄 아무런 능력이 없었다. 그럼에도 말은 많고, 고창병에 든 사람과 주님을 두 번 죽이는 일에 그렇게도 애지중지하는 안식일을 사용하고 있다.

나의 안식일을 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주님처럼 건강해야 다른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 줄 수 있다. 바른 생각과 바른 신학(신앙)이 내 안에 자리를 잡을 때 나도 건강하고 너도 건강하게 되도록 섬길 수 있으리라. 삶에서 만나는 문제를 주님처럼 보고, 접근하고, 해결할 수 있는 영성(靈性)을 꿈꾼다.

   

 

자기관리(7-14)

 

갑자기 이 본문이 끼어드는지(?) 그 이유를 잘 모르겠다. 어떻든 본문만을 똑 떼어 놓고 볼 때 안식일은 물론 평일의 삶을 어떻게 보내며 살아야 할까를 생각하게 한다. 일상생활의 영성이 눈에 들어온다. 먼저 혼인잔치에 청함을 받았을 때나는 나를 스스로 어떤 사람으로 생각하고 있고(다른 사람들과 관련하여), 또한 다른 사람 앞에 어떤 사람으로 드러내고 싶은가.

자기 스스로 나 정도면 잔치의 높은 자리에 앉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이것은 그만큼 다른 사람들보다 자기 자신을 스스로 우월하다고 생각한 것이고, 그것이 잔치 자리에 앉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 것이다. 무릇 사람은 무엇을 생각하느냐가 그대로 행동으로 나타나게 되어 있다.

하지만 내가 나를 생각(평가)하는 것과 남이 나를 바라보는 것과는 언제나 일치하는 것은 아니다. 나에 대한 평가는 내가 내릴 수는 있지만 그러나 그것이 언제나 긍정적인 결과만을 낳는 것 역시 아니다. 잔치를 배설한 자의 생각은 나와 다를 수 있고, 또 누가 보아도 나보다 더 상좌에 앉아야 할 사람은 있는 법이다.

 

    “무릇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자기를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11)

 

이 말씀은 단순히 처세술을 말씀하시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이 중요한 말씀 안에, 그것도 전후 문맥과 상관없는 그런 대인관계의 기술을 가르친 것이 아니라면 그럼 이것은 무엇을 가르치고 싶으셔서 주님께서 단단히 집고 넘어가시는 것일까. 아마도 잔치의 상석에 앉았던 자들은 그 당시 여러 면에서 고위관직에 있거나, 특별히 유대 사회에서 볼 때 종교지도자들이었을 것 같다.

이렇듯 하나님의 율법을 받아 그것을 따라 살아간다는 자들이 하고 있는 일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안식일을 범한다고 시비를 걸지 않나(13.10-17),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주님께 여기를 떠나소서!”(13.31)라며 메시야 사역을 딴지 걸고 있지 않나, 예루살렘의 황무함은 깊어만 가는데(13.34-35) 하고 있는 꼴이라는 게 잔치의 상석이나 탐하면서 스스로 자신을 높이는 일에만 골몰하고 있으니, 주님의 3년 공생애 사역과 현실의 이 건널 수 없는 간격을 어찌해야 할까.

잔치를 청한 자 역시 마찬가지다(13-14). 이는 안식일이라며 병 고치는 일을 금하지만 그럼 안식일이 아닌 평일에 너희들은 과연 가난하고 헐벗고 굶주린 자들을 위해 하나님의 이름으로 뭘 하고 지냈는가에 대한 통렬한 외침인 셈이다. 가난하고 병든 자들은 영적으로도, 육적으로도 변방에서 남모르게 눈물 흘리며 쓸쓸하게 생을 연명해 가고 있음을, 어쩌면 이제 십자가를 져야 할 순간 앞에 서 있지만 세상은 여전히 달라진 게 없이 전혀 세속적이고 인간적인 것들이 난무하는 것, 그래서 영원한 것을 보지 못하는 것에 대한 아쉬움이랄까(14), 주님은 지금 이러한 세상의 현실을 종교적 귀족들에게 직시하도록 하고 계신지도 모르겠다.

   

 

부스러기 묵상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와 가치를 알지 못하면 고창병에 든 사람과 주님을 두 번 죽이는 일이 발생한다. 율법사(바리새인)라 하면서 이 정도로 살고 있었으니(1-6), 율법이 이루어져야 할 세상(field)은 무질서로 넘쳐나고 있을 수 밖에!(7-14). 어찌된 게 안식일다움은 없고, 또 잔치다움도 없다. 그저 모두가 다 자기 기준을 따라 자기 생각에 옳은 대로 언행하며 살아가고 있다. 이게 지금 이스라엘의 모습이다. 주님께서 3년이나 하늘의 진리를 가르치셨음에도 달라진 게 없으니 주님의 마음은 오죽이나 답답하고 씁쓸하셨을까.

예루살렘으로 가는 길목 길목이 다 이처럼 죄행(罪行)들로 가득 넘쳐 도대체 온전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어 보인다. 하지만 세상이 어두울수록 빛은 밝히 드러나듯이, 어쩌면 그러기 때문에 더더욱 주님의 예루살렘은 이런 희망의 빛을 잃은 유대(세상, )의 유일한 소망인 셈이다.

그분은 지금 안식일에 죽어가는 사람보다 소나 나귀를 구하고 그것들에게 물을 먹이는 것이 더 중요한(5, 13.15), 잔치를 열고 거기의 상좌나 밝히며 소일하는 자들과 더불어 함께 교제하고 있지 않을뿐더러 그런 자들에게서 희망은 접으신 지 오래다. 주님의 눈에는 저들이 보지 못하는 자들이 하나 둘 들어온다(2,13, 13.11). 그리고 저들의 친구가 되어 주시며, 저들의 문제를 해결해 주시면서 좁은 문의 선두에 서서 당당하게 예루살렘(십자가) 앞으로 올라가신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소모적이고 찰나적인 것에 목숨 걸고 사는 불쌍한 사람들이 내 시야에도 들어온다(8-9,12, 13.14,17a,24-18,31,34-35). 그리고 놀랍게도 이런 혼미스러운 광장에서도 주님의 뒤를 따라 광명의 세계로 첫 발을 내딛는 자들이 있다(4, 13.13,17b,24,29). 주님이 앞서가시니 걱정 없다. 그러니 힘을 내자! 세상을 거꾸로 사는 법을 가르치시며, 먼저 당신 스스로 모범을 보여주신 것을 기억하자(11, 2:5-11). 세상의 희망은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아멘하게 하는 말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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