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福音): 분쟁을 넘어 화해로!(눅 12.49-59)

20210210(묵상)

  

 

 

복음(福音): 분쟁을 넘어 화해로!

Luke. 12.49-59

  

    본문 관찰

 

    예수께서 오신 목적(49-53): 분쟁

       불을 던지러 왔노니

       분쟁 분쟁 분쟁

    화해가 복음이다(54-59).

       징조(54-56)

       화해(57-59)

   

 

화평 vs 분쟁

 

조금은 지금까지와 분위기가 다른 느낌이다.

내용 또한 좀 어렵다. 예수님께서 세상에 오신 목적이 세례분쟁이라는 단어를 통해 소개된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이 세상과 분쟁하게 될 것이라는 점에서 무엇인가 임박한 결정이 오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생명과 죽음이 갈리는 엄청난 소용돌이가 예고되고 있는 때이기에 영적 나침반의 시그널을 분별하는 것이 무엇보다 요구된다.

   

 

복음, 그 양면성(49-53)

 

     “화평하게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임이요.”(5.9)

     “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려고 온 줄로 아느냐 아니라”(51a)

 

먼저 예수님은 ’, 곧 하나님의 말씀(20.9)을 세상에 던지러 오셨다.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의 불이 마침내 온 세상에 붙어 점점 확장될 것이 제시되고 있다. 이와 반대로 어둠과 죄와 사탄이 역사하는 세상 나라는 그만큼 점점 축소되고 작아질 것이다. 예수님은 여자의 후손’(3.15)으로서 이 일을 이루실 것이다.

그런데 이 복음의 불길은 세례’, 곧 십자가의 죽음(10.38-39)으로 성취된다. 이로써 십자가로 가는 길이 점점 임박하고 있음에 대한 깊은 고뇌가 느껴진다. 그럼에도 이 답답함이란 두려움, 공포, 이를 피하고 싶은 마음을 뜻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이를 이루기 위해 묵묵히 기다리시며, 동시에 그 앞으로 점점 당당하게 나아가고 있음을 선언하는 의미이다. 하지만 공생애가 거의 마무리 되는 시점(9.51)과는 달리 이를 받아들이는 제자들의 영적 분별력(통찰력)은 아직 희미하다(56).

그럼에도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또한 무엇인가. 예수님은 분쟁과 대립(51,52,53)을 일으키러 오셨다. 한편 이로써 시므온의 예언이 성취되다(2.34). 복음은 무덤덤하거나, 실상이 드러나지 않거나, 희미하게 식어버리지 않는다. 그게 앞서 의 이미지다.

물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은 화평이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슬쩍 덮어놓은 게 아니라 분쟁까지 포함한다. 세상이 만들어 놓은 가치관과 질서와 구조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면 그 불길이 퍼지고 뚫고 들어가 분쟁과 갈등을 비롯한 변화가 일어나게 되어 있어서다. 그리하여 죄라는 견고한 옛 질서는 무너지고, 이어 세상 나라는 쇠하게 되고, 결국 사탄의 지배는 힘을 잃게 된다. 그야말로 창조 질서의 회복이 모든 영역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 가운데 사람과 사람의 심령과 마음과 영혼을 침노하는 복음의 놀라운 역사가 예고되고 있음이 흥미롭다.

   

 

화해가 복음이다(54-59).

 

천지의 기상을 분간하는 것과 이 시대의 영적(靈的) 기상을 분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영역이다. 전자는 후자를 알게 하거나 깨닫게 하지 못한다. 전혀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이를 분간하지 못함이 가지고 오는 결과, 즉 파멸이 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이를 피하거나 되돌릴 수 없음은 당연하다(58-59).

예고된 종말(58-59), 그 집행 이전의 결정이 집행 이후의 상황을 피할 수 있게 한다. 지금이 이처럼 분별할 수 있는 기회의 때다. 놀라운 것은 분명히 불이 1차적으로 가져다주는 것은 다름 아닌 분쟁이다. 문제는, 그렇다면 그것으로 끝인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불을 통해 이 시대를 분간함으로써 화해에 이르고(58), 그래서 최종적인 심판을 피해야 한다. 이것이 분쟁으로 끝나지 않는 복음의 능력이다. 결국 분쟁은 화해에 이르는 하나의 다리인 셈이다. 이는 복음이어서 가능하다.

이 얼마나 놀라운 복음의 능력인가. 분명 ’(49)세례’(50) 곧 십자가 사건은 분쟁’(51-53)을 가져왔다. 그런데 복음은 이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데 그것이 무엇인가. ‘화해’(58). 복음은 화해라는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는 길을 밝히 보여준다(58-59). 모든 것이 소멸되고 심판이 집행되기 이전에 하나님과의 화해하는 것이 예수님이 이 세상에 던지신 의 목적인 셈이다. 겉은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과 다 소멸해 버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속은 이처럼 사랑과 용서와 화해와 평화다. 그렇다. 이것이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지고 오신 하나님의 나라요 그 나라의 복음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불을 땅에 던지러 왔노니 ”(49a)

     “어찌 이 시대는 분간하지 못하느냐?”(56b)

 

세상의 돌아가는 사정과 상황을 훤히 들여다보고 있다(54-55).

하지만 두 가지, 정말 결정적인 것들에 대해서는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다. 첫째는 이 시대요(56b), 둘째는 옳은 것이다(57). 그러니 세례분쟁을 통해 화해라는 선을 이루어내시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복음의 역사하심이 놀라우리만큼 역전을 이루어내시는 것 아니겠는가. 그렇기에 분쟁은 마치 수술과도 같은 것이다. 서로 맞서듯 갈등하고 아파하는 소용돌이를 지나겠지만, -마치 해산의 수고를 지나야 젖 먹이는 복과 태의 열매를 받아드는 것처럼- 복음은 이 모든 것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도록 한다.

복음이 불의 단계에 있는 곳이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역시 분쟁과 갈등이라는 푹풍 속을 지나는 상황이거나 관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복음 안에서 이를 분간할 수 있다면 분명 이 선행(先行)된 눈물과 고통과 그것에 따른 오랜 인내를 통과해 마침내 회해하기’(58)에 이르는 복음의 영광과 열매를 맛보게 될 것이다. 58절의 어느 단계에서 나에게 화해가 일어났다면, 그렇다면 너에게도 이 놀라운 화해의 복음이 역사하도록 용서 받은 자로서 또 누군가를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복음이 나를 그리해 주셨다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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