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생활을 버리라!(눅 11.37-54)

20210206(묵상)

  

 

 

이중생활을 버리라!

Luke. 11.37-54

  

    본문 관찰

 

    바리새인_ 겉푸름: “겉은 깨끗이 하나

        → 어리석은 자들아

             화 있을진저

    신앙인_ 속푸름: 깨끗

   

 

() 있을진저!

 

다시 바리새인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유대인들은 무의식적인 부정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무덤에 표시까지 했을 정도였다(19.16 참조). 그만큼 이들은 부정하다!”에 예민하고 철저했다. 그런데 주님이 이 규례를 어기는 행동을 하시는 것을 보았으니 일이 커질 수 밖에 없다.

사실 식사 전에 손을 씻는 정결행위는 구약의 율법이 명하는 계명은 아니다. 오랫동안 관습(전통)적으로 바리새인들에게 전해 내려오는 그들만의 습관이다. 지금 그렇다면 저들은 자기들의 사상과 전통의 틀 안에 예수님을 넣어 보려고 하는, 역시 자기 식대로 모든 것을 해석하고 이해하려는 자들임을 알게 된다. 이렇듯 자기 식대로 사는 사람들, 하지만 정작 보아야 할 자신들의 진짜 모습은 보지 못하고, 그래서 그것만큼 잘난 줄 알고 주님까지 안하무인(眼下無人) 격으로 대하는 바리새인들! 그런 저희를 향한 주님의 관찰과 처방을 들어보자.

   

 

겉푸름 vs 속푸름

 

    바리새인_ 겉푸름: “겉은 깨끗이 하나

       탐욕과 악독이 가득

       박하와 운향과 모든 채소의 십일조

       회당의 높은 자리

       시장에서 문안 받는 것

       평토장한 무덤

           → 어리석은 자들아

               화 있을진저

 

바리새인들의 겉푸름의 실상을 보라(#관찰). 겉이 이러하니 그 속 역시 탐욕과 악독이 가득한 것은 필연이다(39). 동시에 이처럼 속이 썩었으니 그것이 드러난 겉이야 예수님이 드러내신 모습 그대로다. 하지만 더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리새인들은 이러한 자신들의 실상을 알지도, 깨닫지도, 보지도, 인정하지도 않고 있다는 점이다.

속푸름의 은총에 붙들린 사람이 되려면 어찌해야 할까? 저들은 내면을 바꾸어야 한다. ‘구제’(41)를 실행하는 손과 마음으로 겉과 속 모두를 새롭게 해야 한다. 사람들이 보고 아는, 그래서 드러난 십일조를 행하는 것은 물론 이것뿐만 아니라 보이지 않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버리지 말아야 한다(42). 이제는 속푸름에 에너지를 써야 한다. 이것이 신() 바리새인으로 전락하지 않는 길이다.

이 시대는 겉으로 보면 그럴듯한데 그 속을 보면 세상과 다를 바 없는 21세기 바리새인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른다. 특별히 자녀들을 결혼시킬 때를 보면 부모의 신앙과, 그들이 무엇을 가장 고귀하고 가치있는 것이라고 믿고 살아가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겉으로는 예수 잘 믿는 사람이면 된다지만 속으로는 그의 배경에 걸린 스팩들을 정말 교묘하게 계산하고 있음이 그렇다.

최근 신문 광고면을 보다 깜짝 놀랄 때가 있다. 사주 관상을 보는 철학원이라는 광고 한쪽에 이런 글귀 때문이다: “기독교인 환영!” 왜 이런 광고가 가능할까? 아마도 그 철학원을 찾는 많은 고객들 중에 교회 다니는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이 아닐까. 겉푸름은 위선이고, 거짓이고, 눈속임이다. 그 속에는 생명을 살리는 능력도, 다시 소생케 하는 은혜도 없다. 보라! 바리새인들을! 저들의 한손에는 얼마나 그럴듯한 종교적인 것들이 들려있는가? 하지만 보이지 않는 내면의 좌소에는 예수님마저 비난하고 정죄하고, 그래서 어떻게 하면 메시야 사역을 무력하게 할까를 의논하는 파렴치함이 가득할 뿐이다.

사람을 살리는 것은 속푸름에서 나온 구제(41). 생명을 살리는 은혜와 능력은 공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에서 온다(42). 바리새인들이 가지고 있는 것들은 다 어리석은 것일 뿐이며(40), “화 있을진저!”(42,43,44)의 선언 앞에 서게 될 뿐이다. 예수님은 겉푸름에 헌혹되지 않으신다. 그분은 속푸름만이 생명을 살리는 길이며, 이것이 십자가를 지기 위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당신의 정체임을 분명히 하신다. 바리새인들이 그럴듯한 겉푸름으로 주님을 속이려 했지만 주님은 결코 속지 않으신다.

오늘 나에게도 마찬가지다. 나의 실상을 바라보시는 주님의 시선 앞에 서서 묵상의 은혜를 퍼 올리는 이유는 바리새인 같은 겉푸름을 버리고 주님이 요구하시는 속푸름의 그리스도인으로 새롭게 세워지고자함 때문이다. 그 은혜를 구하고, 찾고, 두드리는 묵상이다.

   

 

대립각

 

    [누가의 바리새인 텍스트]

    5.29-32    바리새인들이 그 제자들을 비방하여

    7.36-50    한 바리새인이 함께 잡수시기를 청하니

    11.37-44  한 바리새인이 점심 잡수시기를 청하니

    14.1-24    바리새인의 집에 떡 잡수시러 들어가시니

 

이런 형편없는 바리새인의 초대에 기꺼이 교제의 악수의 손을 내미시면서 그들과 식탁 교제를 나누시는 주님이 인상적이다. 이들마저도 복음을 들어야 할 대상이 아닌가. 하지만 바리새인, 저들은 누구입니까? 주님은 저들의 실상을 아셨다. 그 하나의 단면이 오늘 본문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생각해 보면 누가 누구를 평가하고 진단해야 하는가? 라는 좀 더 본질적인 것까지 엉클어진 상황이 되어 버렸다. 세상은 요지경이다. 진리를 들어야 할 사람들이 진리이신 주님께 이러쿵저러쿵 야단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식탁에까지 낮아지신다.

바리새인들은 지금 예수님을 평가하고, 정죄하고, 비난하는 자리에 앉아있다. 이것이 세상의 방식이다. 자신을 모르면 이처럼 날뛴다. 그럼에도 저들과 함께 함의 자리에 않으신다. 누구보다 바리새인들의 실상을 잘 아시는 주님이시다. 그런데 밥 한끼 먹자고 눈 딱 감고 앉아계시는 걸 상상할 수 있을까. 잘 보면 의외로 답이 쉽게 풀리는 환경이 만들어진다. 바리새인들은 손을 씻어야 한다는 자기들의 규정을 무시한 예수님을 보고 안색이 변했다.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예수님이 딱 걸린 경우라고 해도 무리는 아니다. 하지만 주님은 이 상황을 예화 삼아 바리새인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시고야 만다. 초청을 받은 자의 입장에서 쉽지 않은 결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님은 이참에 바리새들의 이중적이며, 사악하기 그지없는 두 얼굴의 야누스와 같은 저들의 영적 실상을 거침없이 드러내시고야 만다.

어찌 바리새인들에게만이겠는가? 저들은 드러난 죄인이라면 우리는 드러나지 않은 죄인이 아닌가. 저희와 다를 바 없는 죄인이지만 주님은 지금 말씀을 묵상하는 이 시간에 변함없이 묵상의 식탁에 함께 앉으시사 나를 만나주신다. 바리새인들의 죄됨과 저들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셨듯이 부끄럽고 황송하지만- 나의 못남과 알량함을 드러내사 치유하시고 클리닉해 주시기를 빈다.

 

 

부스러기 묵상

 

    “중요한 것은, 너희 말과 행동이 아니라 너희 됨됨이다.

     참된 말과 행동은

     너희의 참된 존재에서 흘러 넘치는 것이다.”(6.45, Message)

 

바리새인들이 평토장한 무덤 같다는 말은 무슨 의미일까?

평토장한 무덤이란 무덤은 무덤인데 이게 무덤인지조차 알 수 없는 평평한 땅을 두고 한 말이다. 이게 바리새인들의 실상이다. 무슨 말인가? 이중적이라는 뜻이다.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지만 겉으로 보기에는 깨끗하다. 하나님께는 모든 채소의 십일조까지 계산하여 드리는 것처럼 보이지만 사람을 향해 구제는 하지 않는다. 사람들에게 칭송을 받기를 원하면서도 하나님께 대한 사랑은 별 관심이 없다. 이 얼마나 이중적이며 위선적인가.

오늘 이 말씀 앞에 바리새인들이 서 있듯이 우리 역시 주님 앞에 서 있다. 주께서 나의 겉푸름이 어떤 것인지, 그게 얼마나 심한 중증에 걸린 말기암 같은 것인지, 결국은 하나님까지 이용해 먹으려는 싹이 노란 타락한 영혼의 몸부림인 것을 보고 계신다. 제 아무리 그럴듯한 포장으로 겉만 번지르르하게 위장하고 변장하고서 거룩한 척, 속 역시 괜찮은 모습인 양 폼잡고 있어도 주님은 아니라 하신다. 누가 감히 주님의 엄중한 경고와 클리닉을 피해갈 수 있을까.

 

   

제목 날짜
유대인 vs 이방인(눅 14.15-24) 2021.02.13
일상생활의 영성.靈性(눅 14.1-14) 2021.02.09
예루살렘 비가.悲歌( 눅 13.31-35) 2021.02.09
‘하나님의 나라’ 클리닉(눅 13.18-30) 2021.02.09
18년 동안의 고독(눅 13.10-17) 2021.02.09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망하리라(눅 13.1-9). 2021.02.08
복음(福音): 분쟁을 넘어 화해로!(눅 12.49-59) 2021.02.08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5-48) 2021.02.08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눅 12.13-34). 2021.02.04
제자대로.弟子大路(눅 12.1-12) 2021.02.04
이중생활을 버리라!(눅 11.37-54) 2021.02.04
표적을 요구하지 말고, 회개가 답이다(눅 11.29-36) 2021.02.04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라!(눅 11.14-28) 2021.02.0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눅 11.1-13) 2021.02.02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4) 2021.02.02
둘 다, 하지만 좋은 편을!(눅 10.38-42) 2021.01.29
그러면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눅 10.25-37) 2021.01.29
무엇으로 기뻐하십니까?(눅 10.17-24) 2021.01.29
복음전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눅 10.1-16). 2021.01.29
나들목에서 만난 예수님(눅 9.46-62) 2021.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