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9 이방 여인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들(마 15.21-39)

20220807(양무리교회)

  

 

 

이방 여인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들

Matt. 15.21-39

  

 

    본문 관찰

 

    두로와 시돈(21-28) -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들렸나이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데가볼리(28-39)

       치 유(28-31) - 큰 무리가 와서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니라

       칠병이어(七餠二魚, 32-39)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이방행전(異邦行傳): 천국은 믿음으로 세웁니다.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3.29)

 

주님은 두로와 시돈 지방으로 들어가시는 길에 가나안 여인을 만나신다.

이방인인 가나안 여인에게는 흉악하게 귀신 들린 딸이 있다. 어머니는 예수님 앞으로 나아왔지만, 그러나 딸은 여전히 귀신의 지배 아래 놓여있다. 때문에 사탄의 지배권으로부터 딸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그녀는 주님께 간구한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계속해서 묵살되었다. 또한 오히려 주님으로부터는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26)는 모욕적인 말을 듣게 될 지경이다. 하지만 여인은 흔들림이 없고, 주를 떠나지도 않는다.

 

 

가나안 이방 여인(21-28): 네 믿음이 크도다!

 

주님의 소식은 온 땅을 뒤덮고 있다. 헤롯에게도(14.1), 예루살렘에도(15.1), 그리고 헬라인이요 수로보니게 족속인 한 가나안 이방 여인에게도(22, 7.25-26) 이미 복음의 빛은 비춰지고 있다. 하지만 사랑하는 딸은 이 복된 소식 밖에서 괴로워하는 중이다. 어느 때 어느 곳이든 주의 복음에 대해서 받아들이던지, 아니면 이를 거부하던지, 이처럼 크게 두 가지 반응으로 나누어진다. 15장에서도 앞서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은 이미 거부했고(1-20), 이어서 이방인들은 받아들인다(21- ). 한쪽은 기적을 경험해도 거부하고 있고, 다른 한쪽은 모욕과 핍박 중에도 복음과 주님을 받아들인다(26).

사랑하는 어린 딸이 귀신에 들려 괴로워하고 있으니, 어머니의 고통은 이루 말 할 수 없이 컷을 것이다. 대신 해 줄 수도 없고, 해결해 줄 수도 없는 것, 그러면서 괴로워하는 딸을 그저 지켜볼 수 밖에 없는 어미의 심정은 실로 참담하기 그지 없었을 것 같다. 그러던 어느 날 예수의 소식을 복음의 소식을 타고 수로보니게 여인이 살고 있는 동네에까지 전해졌다. 마치 여리고성의 기생 라합에게서처럼 말이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여인은 주님이 지나가시는 곳에서 예수님을 향해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22a)라고 외친다. 여기 다윗의 자손이란 구약의 예언의 성취로 오시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그렇다면 여인은 지금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그러니까 메시야라는 고백이 입에서 나오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놀라운 신앙고백이 아닐 수 없다.

당시 종교 지도자라는 사람들이 마음에 있는 것들을 입을 통해 나오게 하는 것들은 무엇이었는가? 온통 사람을 더럽게 하는 것이었다(17-20). 그런데 한 이방 여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은 복음(福音)이었으니, 참으로 기막힌 대조가 아닐 수 없다. 무엇보다도 자신을 가리켜 주님으로부터 불쌍히 여김을 받아야 할 사람이라며 주님 무릎 아래로 자기를 낮춘다. 주님을 향한 신앙고백과 거기에 걸맞은 태도가 어떤 상황에서도 변함이 없고, 그대로 일치하는 모습이 너무나 좋아 보이기만 하다.

여인은 드디어 자신의 문제를 입에서 나오게 한다(22b): 주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자기 자녀를 자랑하는 것은 쉽지만 그러나 반대로 부끄러운 모습과 허물을 입 밖으로 표현한다는 것은 말처럼 간단한 것이 아니다. 가능하면 감추고 싶고, 아무 문제가 없는 척하며 살아가고들 싶어한다. 그러나 여인은 그렇게 위장하며 사는, 그래서 사탄의 지배 아래 살아가는 오늘보다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그 사슬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새로운 내일을 선택한다. 이 일을 오직 주님께 간구함으로써 더 이상 귀신의 지배를 받고 사는 어둠과 죄의 눌림을 거부한다.

그런데 왠일인가. 주님의 반응은 예상 밖이었다(23a,24,26). 그럼에도 여인은 끈질기게 자신의 문제를 주께 외친다(23b,25,27). 그럼에도 돌아온 답변은 이방에는 관심 없다는 주님의 냉정함이요(24), 이방을 개 취급해 버리시는 냉혹스러운 비정함이다. 이 대목이 어렵고 또 이상하다. 왜 그러셨을까. 진정으로 여인을 무시한 언행이셨을까. ‘자녀답지 않은 유대 이스라엘에 대해서는 이렇게도 관용적이시면서 비록 취급을 받고 있긴 하나 자녀다운 이방 가나안에 대해서 이처럼 각()을 세우시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일까.

어떻든 점차 강도가 좀 더 더해지는 주님의 차가운 언행(言行)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여인의 언행은, 그러니까 그녀의 마음에서부터 입을 통해 나오는 것은 앞서 바리새인들의 그것과 전혀 달랐다. 어떤 소리를 들어도, 어떤 취급을 당해도, 어떤 수모와 멸시와 천대를 받는다 할지라도 주님을 향한 여인으로부터 나오는 언행심사(言行心事)는 복음, 치유, 회복, 사탄의 권세로부터의 놓임, 기쁨, 변화된 삶을 향한 주님의 은혜를 구하는 간구였습다.

부스러기라도 감지덕지(感之德之)하겠단다.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라도 먹을 수만 있다면 자신이 가 된들 그게 무슨 문제이겠냐고 소리친다. 부스러기라도 받아먹을 수 있다면, 그리하여 어린 딸이 흉악한 귀신의 지배로부터 자유하게 될 수만 있다면... 이처럼 주님 앞에 완전히 엎드려 버린다. 이런 간절함과 절박함, 생명을 건 처절한 외침, 어쩌면 이것을 주님이 듣고 싶으셨는지도 모른다.

마침내 주님으로부터 놀라운 축복이 임한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28a) 여인에게서 나오는 이 모든 언행이 큰 믿음이다는 인정을 받는 순간이다. 주님을 향한 전적인 신뢰에서 나온 믿음이 아니었으면 여인은 아마도 자존심이 상하다고, 기분 나쁘다고, 인격적인 모독을 못 참겠다고, “뭐 이런 사람(목사, 교회)이 다 있어!” 하면서 그만 돌아서 버렸을 것이다. 믿음은 이렇듯 자신을 의지하지 않고 주님을 신뢰하는 것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진리이신 그리스도와 거짓인 귀신이, 그리고 그에 따른 결과가 판가름이 난다.

 

 

칠병이어(七餠二魚, 32-39): 광야의 식탁

 

    “내가 무리를 불쌍히 여기노라

      그들이 나와 함께 있은 지 이미 사흘이매 먹을 것이 없도다

      길에서 기진할까 하여 굶겨 보내지 못하겠노라.”(32)

 

치유 기적(29-31)과 칠병이어(七餠二魚, 32-39)가 벌어지는 곳은 이방 땅 데가볼리 지경이다(29, 7.31). 마침내 가나안 여인을 통해 이방을 향한 문이 열리자 큰 무리’(30a)가 주님께로 나아왔다. 그리고 주님께서 이루신 기적을 보고 놀랍게 여겨 이스라엘의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31b)는 응답을 한다. 그럼에도 장로들의 유전과 전통을 율법과 말씀보다 더 중요시하며, 주님마저도 자신들의 전통의 빛에 비춰 평가하고 비난하는 유대인들이다(1-20).

인간이 얼마나 악한가를 생각한다. 뻔히 보는 앞에서 기적이 일어나고, “가르치시는 것이 권세 있는 자와 같고 저희 서기관들과 같지 아니함”(7.29)을 누구보다도 더 잘 알았을 법도 하건만 어찌된 게 갈수록 태산이다. 주 앞으로 나아온 이방의 새신자들(22,29-31) 앞에서 부끄럽지도 않은가 보다. 그렇다. “가나안 여자 하나가 그 지경에서 나와서, 큰 무리가 와서”(22, 30) 주께서 이루신 기적들을 보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31)는 이 아름다운 만남 속에 오늘 우리도 한 은혜와 예배의 자리 쪽에 있다 생각하니 마음이 따뜻해진다.

이렇듯 유대 밖 이방의 땅에서 [데가볼리 특별집회]가 벌써 3일째다(32). 주님의 눈에는 저들이 여전히 가엾어 보이기만 하다. 어떻게든 이번에도 저들의 필요를 채워주고 싶어하시는 주님의 사랑이 느껴진다. 사실 앞에서 5천명을 먹이셨을 때 일어난 일을 기억하고 있다. 그럼에도 말씀 앞에 나아온 큰 무리의 필요를 외면하지 않으신다. 진리는, 진실은, 복음은,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는 것은 오해와 불신과 편견과 고통이 있더라도 포기되거나 멈춰질 수 없음을 다시금 생각해 보게 된다.

 

 

부스러기 묵상

 

나 한 사람이 바른 믿음으로 서면 너를 살린다.

이것은 이미 백부장에게서(8.5-13), 무엇보다 마태복음이 일관되게 전하고 있는 중요한 영적 통찰이다. 어머니의 진실하고도 눈물겨운 믿음은 귀신 들려 괴로워하는 딸을 살리는 은총으로 이어진다. 나 한 사람이 바르고 건강하게 믿음의 뿌리를 내리는 것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가를 다시금 생각해 본다. 한 사람이 믿음에 바로 서면 이를 통해서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새로운 삶을 살게 될까, 생각만 해도 가슴이 뛰지 않는가.

때문에 우리 가정에 오늘 이 가나안 여자’(22a)와 같은 사람 하나만 있으면 그 가정이 산다. 그런 한 가정이 있으면 목장이 살아나고, 그런 목장이 있으면 교회가 살아나고, 그 교회를 통해 교회가 세워진 마을이 살아난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의 법칙이다. 나 때문에 다른 사람인 네가 복을 받는 그런 삶이 오늘 여인의 믿음이다. 동시에 저와 여러분 모두의 믿음이 되시기를 축복한다.

귀신 들린 어린 딸은 자신의 믿음이나 어떤 언행으로 나음을 얻는 게 아니다. 엄마의 언행이 주님으로부터 믿음으로 인정받는 순간, 그리고 그 믿음이 바라는 것의 실상이 되는 순간, 엄마의 믿음 때문에 딸이 치유를 받게 된다. 이것이 중보적(仲保的) 삶이 아닐까.

가나안 여인의 딸을 괴롭히던 귀신을 좇아낸 것(21-28), 데가볼리 지역을 중심으로 한 치유 기적(29-31), 동시에 칠병이어(七餠二魚, 32-39) 이적은 모두가 다 이방인들에게도 동일한 메시야 사역을 통한 은총이 나누어지고 있음을 보여주신 사건이다. 하나님은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의 하나님이시다(3.29).

오늘 우리에게도 여전히 복음의 이방이 있다. 그런데 이 복음이 주님을 통해 이방의 땅에 복음의 빛이 임한다. 엄마의 믿음을 통해 귀신의 지배 아래 있었던 사랑하는 딸에게 복음과 치유의 빛이 임한 것이 그렇다. 한 이방 여인의 믿음에서 나오는 것들을 보는가. 이제 다음은 나다. 이 일이 나와 우리와 교회의 사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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