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요 18.1-9).

20220411(묵상)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

Jn. 18.1-9

  

    본문 관찰

 

    예수께서 그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1-2a)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2b)

       유다가 그리로 오는지라(3)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4a)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4b)

    내가 그니라(‘I AM’, 5,8)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5b)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을 용납하라(8b)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 중에서 하나도 잃지 아니하였사옵나이다(9)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

 

    “일어나라 여기를 떠나자!”(14.31b)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저편으로 나가시니”(1a)

 

마침내 예수님은 십자가로 향하신다(4.14-5.11).

17장에서 그 선지자의 기도(Prophetic intercession)를 드리신 주님은 이제 십자가를 지는 것을 영광의 때라 하신다(17.1,5,24). 고난마저도 하나님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것이기에 그것을 영광으로 받아들이시는 주님, 그래서인지는 몰라도 요한은 복음서가 공히 전해주는 겟세마네 기도(26.36-46, 14.32-42, 22.39-46)를 기록할 여유도 없이 곧바로 고난의 영광 앞으로 나아가 버렸는지도 모른다.

 

 

예수님

 

주님은 여전히 제자들과 함께”(1) 겟세마네 동산으로 가셨다.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 오나니 벌써 왔도다”(16.32a)라는 환난을 당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고난이 시작되는 현장으로 저들과 함께 가시는 주님의 마음을 생각해 본다. 이곳은 제자들과 함께 종종(자주) 모이는 곳이었다(2a). 지금까지는 기도하시기 위해서, 제자들과 교제하시고, 그들과 더불어 목회수업을 통해서 사도행전(ACTS) 시대를 준비하시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달랐다. 고난과 죽음을 앞두고서 당당하게 고난 앞으로 나아가신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자기가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돌아가실 때가 이른 줄 아시고 .”(13.1a)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4a)

 

주님은 죽으시기 위해서 오셨고,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서 이곳에 와 계신다. 그리고 친히 자신을 찾는 무리들 앞으로 나아가신다: “너희가 누구를 찾느냐?”(4,7) 그리고 내가 그니라”(‘I AM’, 5,8) 하시며 메시야이심을 밝히 드러내신다. 그러니까 메시야로서 인류의 죄를 구속하시기 위해서 지금 이곳에 와 있다는 사실을 숨기시지 않으신다. 그리고 그 거룩한 사명 앞으로 당당하게 나아가신다. 사실 이 일이란 영광의 고난이다(17.1,5,24). 이것이 고난 앞에 서신 주님의 모습이자 그 뒤를 따르는 나에게 역시 요구하시는 거룩한 부르심이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膽大)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16.33b)

나는 이처럼 나의 삶의 시간표들을 순리를 따라 걸어가고 있는가. 고난에 대한 나의 태도는 어떤가. 무엇이 고난 앞에서 나를 두렵게 만드는가. 다시금 주님에게서 배운다. 죽음마저도 사명을 거역토록 하지 못하고, 유다마저도 주님이 가시는 길을 막을 수 없다. 그 누가, 어떤 세력이 하나님이 하시는 일을 그르칠 수 있단 말인가. 주님은 믿음밖에 있는 유다는 네 하는 일을 속히 하라!”(13.27b)하시고, ‘믿음안에 있는 제자들(16.30)에게는 실족하지 않도록(16.1), ‘근심에 머물러 있지 않고 기쁨앞으로 나아오도록(16.20-22), 그리하여 평안을 누리게 하려고 친히 기도해 주셨다(17).

마침내 이러한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 저들을 보호하신다: “나를 찾거든 이 사람들이 가는 것은 용납하라!”(8b) 정말 기도가 그대로 이루어지는 순간이다(9, 17.12). 환난으로부터 유다와 같이 취급됨을 원치 않으신 주님, 그럼에도 이들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16.32a) 말 것이다. 주님은 이 모든 것을 다 아시고 계심에도 제자들에게 겟세마네 동산 자체를 만나지 않도록 하시지는 않으신다. 세상에서는 환난을 당하는 것, 그것이 순리다.

 

 

가룟 유다

 

1330절에서 182절까지 유다는 어디서 무엇을 하였을까? 다른 제자들은 예수님과 함께 -“그가 나간 후에”(13.31- )- 다락방에 모여 앞으로 올 십자가 죽음과 그 이후에 맞이할 성령 시대를 위한 귀한 말씀을 들었다. 하지만 유다는 주님과 말씀과 제자로서의 직무를 버리고 제 곳으로”(1.25b) 가고 말았다. 불행한 인생이 아닐 수 없다. 요한복음 13장부터는 예수님의 공생애 마지막 1주일을 기록하고 있는 것을 볼 때, 유다는 최소한 3년 이상을 주님으로부터 직접 제자훈련을 받았다.

육신을 입으신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 숨 쉬시며 걸어 다니시는 하나님과 더불어 동거동락(同居同樂)하며 이 책에 기록되지 아니한 다른 표적”(表蹟, 20.30)과 요한의 후기처럼 예수의 행하신 일이 이외에도 많으니 낱낱이 기록된다면 이 세상이라도 이 기록된 책을 두기에 부족할 줄 아노라.”(21.25)는 말씀이신 그리스도(1.1)와 함께 지냈으면서도 그는 멸망의 자식’(17.12)으로 추락하고 만다.

13장에서 보았듯이 마귀가 벌써 마음에 예수를 팔려는 생각을 넣었더니.”(2), 그리고 다시 이어지는 주님(말씀)과의 교제라는 기회의 시간들을 허비하다가 결국 조각을 받은 후 곧 사단이 그 속에 들어간지라.”(27a) 그리고 나서 유다가 그 조각을 받고 곧 나가니 밤이러라.”(30)는 말씀으로 주님과 또한 말씀과의 만남이 이것으로 끝난다. 하나님과 단절된 인생, 말씀을 공급받는 일을 거부한 인생, 주님과 결별하고 사탄의 노예가 되는 길을 선택한 인생의 비극적 종말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서 18장에서 다시 무대에 등장한다. 겟세마네 동산, 그곳은 유다를 포함하여 주님과 제자들이 자주’ -개역성경에는 가끔으로 번역되어 있다- 가던 곳이었다. 요한은 이를 이렇게 증거한다: “유다도 그곳을 알더라.”(2b) 어찌 장소만 알았을까. 그는 자기가 아는 것을 어떻게 사용하고 있는지를 주목해 본다. 참으로 씁쓸하다. 그는 군대와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서 얻은 아랫사람들을 데리고 등과 횃불과 무기를 가지고”(3) 주님 계신 곳으로 왔다. 그는 지금 믿음밖에 있다(16.30).

그가 아는 것이란 단순한 지식적인 것들이다. 역시 그에게 마귀가 들어갔기에(13.2,27) 사탄이 아는 것과 동일한 것을 알고 있을 뿐이다. 사탄도 주님을 알기 때문에 그렇다(8.29, 2.19). 놀랍게도 그는 자신이 아는 것을 예수님을 팔아먹고, 십자가에 죽이는 것으로 밖에 사용할 줄 몰랐다.

예수 없는 지식인의 몰골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언제나 예수님을 잘못 알고, 오해한 사람들이 토해내는 소리로 가득하다. 종종 이들의 소리가 옳은 것처럼 행세되기도 한다. 기독교적인 사람들은 주님과 말씀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이기도 하지만, 자신은 성경에 대해서 뭔가를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일 경우가 더 많다. 요즘 시정잡배(市井雜輩)들이 아우성치는 종교화된 기독교에 대한 발언들이 다 이 부류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이들은 자신들의 언행(言行)이 몰고 올 돌이킬 수 없는 심판과 내세가 있음을 알거나 믿지 못한다. 이것이 유한한 세상 지식의 한계다.

 

 

부스러기 묵상

 

    “예수를 파는 유다도 그 곳을 알더라.”(2b)

    “예수께서 그 당할 일을 다 아시고 나아가 .”(4a)

 

요한복음에서 안다라는 단어가 여기만큼 극적인 곳이 또 있을까.

그러나 유다는 이 두 편 가운데 불행한 쪽에 서 있다: “그를 파는 유다도 그들과 함께 섰더라.”(5b) 그 역시 제자다. 하지만 그는 전혀 다른 것을 알고 있고, 그것만큼 다른 곳에 서 있다. 겟세마네 동산이라는 그림을 그려볼 때 그의 선 자리는 매우 이질적이다. 이처럼 그는 그가 아는 것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를 지금 서 있는 자리에서 증거하고 있다. 타락한 지식인, 진리의 길을 떠나 죄악의 편에 선 멸망의 자식’(17.12)의 초라한 종말을 연민의 마음으로 지켜보고 있다.

주님은 유다도 아시고, 제자들도 아시고, 황송하게도 나도 아시며, 자신이 친히 만나게 되는 그 당할 일또한 다 아시는 분이시다. 주님은 십자가를 지실 것을 아시고, 겟세마네 동산에 서 계신다. 오늘에서야 비로소 자신 앞에 어른거리는 죽음의 그림자를 깨달은 것이 아니다. 주님은 처음부터 죽기 위해서 이 땅에 오셨다. 마침내 그 때가 차매”(4.4)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영광의 고난 앞에 친히 서신 것이다.

주님 자신도 고난 안에 있으시면서 제자들의 환난을 염려해 주시며, 피할 길을 주시는 주님에게서 진정한 사랑을 만난다. 나의 일에만 급급한 나, 그럼에도 내 것 하나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는 나, 언제 나도 옆을 돌아보고, 고난 속에 있는 누군가를 주님의 마음으로 품을 수 있을까. 내 영혼 하나 끌고 다니기에도 낑낑거리며 버거워 새벽마다 항복해 내지만 아직 갈 길이 멀기만 하다. ‘제자들과 함께’(1) 계신 주님에게서 나와 함께 있는 사람들을 보게 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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