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님 이후가 성령님 안에 그려진다(요 16.7-15).

20220406b(묵상)

  

 

 

예수님 이후가 성령님 안에 그려진다.

Jn. 16.7-15

  

    본문 관찰

 

    보혜사가 세상을 책망하시리라(7-11)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12-15)

 

 

 

보혜사(保惠師)

 

환난 예고(15.18-25, 16.1-6) 오실 성령(15.26-27, 본문)의 구조가 반복된다.

역시 성령 시대에 대한 하나의 예고편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이후 세상은 환난과 밀접하며, ‘그러나’(7a,13a) 그 이후를 성령님께서 함께 하신다고 언약하신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믿음의 여정이 환난일지라도 상관없다. 그 이유는 성령님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기 때문이다. 다시 성령님 앞으로 나아간다.

 

 

보혜사(7-11)

진리의 성령(12-15)

 

    “그러나 사실은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하다.

      내가 떠나가지 않으면 보호자가 너희에게 오시지 않을 것이다.

      내가 가면 그분을 너희에게 보내겠다.”(7)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분이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것이다.

      그분은 자기 생각대로 말씀하시지 않고 들은 것만 말씀하실 것이며

      앞으로 일어날 일도 너희에게 말씀해 주실 것이다.”(13, 현대인의성경)

 

출교(출회)와 죽음이라는 다가올 미래의 환난 때문에 마음에 근심이 가득한 제자들(1-6), ‘그러나’ (7,13)이 문제는 보혜사가 오심으로써 역전될 것이다. 그러나 환난 그 자체가 없어지거나, 성령을 통해서 미래가 평화만으로 채워질 것을 말씀하시는 것은 아니다. 성령님은 내 마음의 근심을 변호, 위로, 상담을 통해 보호하시며 격려하신다. 이것이 환난의 때를 이김으로 살아갈 수 있고, 넉넉히 감당할 수 있는 이유다.

아버지께로부터 나오시는 진리의 성령”(15.26)은 예수님께서 보내시는데(7b, 15.26a) 이를 통해 성령 안에 살아가는 자가 유익을 얻는다. 잘 보면, 십자가 이후임에도 -“다 이루었다!- 여전히 하나님의 평화를 위협하며 핍박과 고난으로 세상의 흐름을 끌고 가려는 악(사탄)의 세력을 삼위일체 하나님이 주목하시는 장면이 본문에 그려지고 있다. 이처럼 세상 끝날까지 항상 함께 계심(28.20)에도 불구하고 세상은 여전히 불협화음 안에 놓여 있다(15.18- )는 점을 주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이러한 혼돈을 결코 방치하지 않으신다. 이어지는 성령님의 사역이 이를 말한다(8-11).

그럼,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성령님의 사역은 무엇일까? 먼저, 성령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은 죄 때문에 악이 득세(15.18- , 16.1-6)하도록 하는 세상의 잘못을 깨우치실 것이다. 믿음 없는 세상이 하는 일, 그것은 죄이며, 성령님은 이를 책망하신다. 성령님은 무엇이 죄인가를 분명히 하신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지 않는 것, 그것 때문에 세상이 믿는 자를 핍박하고 죽이는 것, 이것이 죄다. 결국 성령님의 깨우쳐주심이 아니면 인생은 결코 죄 인식(인정, 고백)에 이를 수 없음 아닌가. 그것만큼 세상이 이처럼 영적으로 혼돈하고 휘청거리는 것 아닐까 싶다.

또한 성령님은 아버지께로 가시는 예수님을 다시 보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의()를 핍박과 고난으로 바꿔버린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10).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은 하나님의 의를 가장 잘 드러내는 사건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을 거부하기 위한 세상(사람)의 이유들과 명분들이 얼마나 하나님의 의()와 상관없는 것들인가를 성령께서 드러내신다는 것은 그것만큼 인간의 의()의 기준이 무너지는 것 아닌가. 성령께서 우리의 알량한 의의 기준들과 생각들을 여지없이 무너뜨리시기를 기대한다.

성령님은 계속해서 이 세상 임금인 사탄이 이미 심판을 받았기 때문에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11). ‘여자의 후손’(3.15)으로 오신 예수님을 통해 사탄은 이미 심판을 받았고(12.9), 성령님은 계속해서 세상을 향한 사탄의 그릇된 생각을 꾸짖어 바로잡아 주실 것이다. 심판 아래로 추락하는 인생들이 누구인가를 계속해서 말씀해 주심으로써 성령 안에 살아가는 자들을 보호하신다. 성령은 이처럼 우리 마음에 내주하사 영적인 자각을 갖게 하시며, 심판에 대한 메시지를 계속 해 주심으로써 사탄의 실패를 기억(확증)하게 하신다.

동일하신 성령님의 사역에 대한 예수님의 예고는 미래를 바라보도록 이끈다(13-15). 예수님은 일단 많은 말씀들을 성령님의 사역으로 말씀하심으로써 성령님을 주목하도록 하신다(12). 이처럼 성령님은 우리가 예수님이 계획하신 일들을 이해하고 감당하도록 하시며, 예수님의 사람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신다: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13b) 성령님이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 안에서 예수님은 변함없이 우리와 함께 하시며 하나님 아버지 안에 있는 예수님의 것을 받아서 우리에게 알리신다. 이처럼 성령님은 아버지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나에게 알려 주신다.

 

 

부스러기 묵상

 

환난과 고난의 예고편 안에 성령님이 계신다.

성령님이 오신다. 아니, 이미 오셨다, 우리 마음에도. 그래 안심이다. 이 험난한 삶의 터널을 나 홀로 걸어가지 않음 때문에, 성령님이 함께 더불어 동행하심 때문에,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심 때문에, 우리가 걸어가야 할 장래의 일을 알리심 때문에, 예수님의 영광을 나타나시고 우리에게도 이 일을 알리심 때문에,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서 세상을 책망하심으로 우리를 이 책망으로부터 보호하심 때문에, 이 모든 일을 이루시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시기에 황홀하고 행복하다.

주님은 오늘도 성령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가도록 이끄신다. 더 없이 넓고 깊고 높은, 그러시면서 동시에 우리 안에도 좌정(坐定)하시는 성령님을 찬양한다. 무한하신 하나님이 유한하고 볼품없으며 초라하디 초라한 죄인에게도 임하셨다니 이게 기적이요 우리가 누리는 최대의 영광스러움 아닌가. 성령님이 우리 안에 계심으로서 우리는 이미 성령님이 거하시는 성전이 된 것 아닌가. 세상을 책망하시듯 우리 안에 남아있는 세상의 쓴뿌리들을 보시고서 우리를 여지없이 책망하시는 분, 우리가 미처 감당하지 못하는 은혜를 가장 적절한 것으로 인도하시는 분, 이것이 이루어지는 미래를 자꾸 은총의 빛 아래서 알도록 이끄시는 분, 이분이 바로 우리가 사모하며 사랑하며 섬기는 성령님이시다.

예수님이 지금도 성령 안에서 우리와 함께 하심이 얼마나 고귀하고 복된 일인가. 우리 안에 계신 성령님을 순간순간 기억하며 살아야겠다. 우리에게 유익이 되는 일이라면 이 세상을 떠나 아버지께로 가시는 일을 기꺼이 하시는 예수님(7), 성령님 안에서 장래 일을 가장 적절한 때에 알리시는 분(13), 이 예수님을 사랑한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온전하신 협력을 바라보면서, 부족한 우리에게도 이 무한한 진리를 알리시면서 거기에 동참토록 하시는 하나님의 세밀하심을 온 몸으로 느끼게 된다. 예수님이 시작하신 장차 보리라’(1.42,50-51)의 그림이 성령님 안에서 계속됨을 보면서 다시금 성령님을 묵상한다.

 

   

제목 날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요 19.28-42). 2022.04.13
가지는 나무의 사랑, 그게 희망이다(요 15.9-17). 2022.04.03
주님은 제자들이 만난 풍랑을 기쁨으로 바꾸신다(요 6.16-21). 2022.01.17
예수님은 ‘장차 … 보리라’의 표적(sign)이다(요 5.31-47). 2022.01.13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23) 2022.04.14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거함으로 열매 맺는다(요 15.1-8). 2022.04.03
베드로: 안다와 모른다, 그 사이에서(요 18.10-18,25-27) 2022.04.12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요 18.1-9). 2022.04.12
기도의 파도타기는 주의 기쁨을 낳는다(요 16.16-24). 2022.04.06
도마와 빌립의 해답이 믿음임을 주님은 아신다(요 14.1-11). 2022.03.30
제자는 ‘지금은’과 ‘후에는’을 사랑으로 완성한다(요 13.31-38). 2022.02.14
마침내 ‘십자가행전’의 서곡이 보인다(요 11.47-57). 2022.02.01
36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영성(마 14.13-21) 2022.07.14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4-19) 2022.04.12
56 세상이 복음을 흔들 때, 그래도 십자가 곁인가?(마 22.15-33) 2023.01.21
고난 받으시는 주님을 생각한다(요 18.19-24,28-32). 2022.04.12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보내신다(요 14.15-26). 2022.03.30
이 사람이 저보다 의롭다!(눅 18.9-17) 2021.03.10
*46 결혼교향곡(마 19.1-12) 2022.09.13
세상으로 나를 믿게 하옵소서!(요 17.20-26) 2022.04.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