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신은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함이다(요 12.36b-43).

20220213(묵상)

 

 

 

불신은 사람의 영광을 더 사랑함이다.

Jn. 12.36b-43

 

    본문 관찰

 

    믿지 못하는 이유(36b-41)

    믿음을 방해하는 자들(42-43)

  

 

사람의 영광, 하나님의 영광

 

표적은 믿음을 갖는데 꼭 거쳐야 하는 필수(必修) 과목인가?

흔히들 체험이 확신을 낳는 출구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런 사람일수록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얼마나 큰 기적인가를 우선해서 생각하지 못하거나, 또는 그것을 알지 못한다. 이렇듯 표적을 의존하는 그것만큼 말씀을 믿지 못하게 된다. 예를 들어서, 하나님을 친히 경험하며 살았던 에덴, 그 많은 기적을 몸소 체험하며 가나안에 입성했던 이스라엘, 그리고 오늘 본문 뿐 아니라 요한복음의 사람들 역시 저희 앞에서 표적이 행해졌으나 그것을 통해 예수님을 믿지는 않았다(37). 결국 구원을 얻는 은혜가 예수님이 아니고 우리가 만드는 어떤 확신(경험)에서 비롯된다면, 이것보다 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능력을 약화시키는 것이 또 있겠는가?

   

 

예수님을 믿지 못하는 이유(36b-41)

 

요한을 이것을 밝히기 위해 이사야의 설교를 예로 든다(6.10): “너는 이 백성의 마음을 둔하게 하여라. 그 귀가 막히고, 그 눈을 감기게 하여라. 그리하여 그들이 볼 수 없고, 들을 수 없고, 또 마음으로 깨달을 수 없게 하여라. 그들이 보고 듣고 깨달았다가는 내게로 돌이켜서 고침을 받게 될까 걱정이다.”(표준새번역)

왜 이렇게 하셨을까? 하나의 실마리는 이사야의 글을 우리 주님이 인용한 본문으로 가 보는 것이다(13.10-16). “이 백성들의 마음이 완악하여져서 그 귀는 듣기에 둔하고, 눈은 감았으니 .”(15a) 이유인즉 바로 때문이다. 그러니까 죄를 해결하지 않고는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키는 회개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사야의 예언이 그들에게 이루어졌으니 일렀으되,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14)는 말씀처럼 여전히 영적인 캄캄함 속에 있는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감추어진 비밀이다(1.26a): “이 비밀은 만세와 만대로부터 감추어졌던 것인데 .” 인간은 죄인이면서, 그 결과 이 죄를 스스로 해결할 수 없는 전적 타락에 빠져있는 비참한 존재다. 때문에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죄의 문제를 해결하시는데도 죄 아래 있음으로 이를 인정하지도, 알지도 못한다. 또한 보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고, 회개하지 않는다. 그래서 예수님을 거부하고, 그를 죽이려고 하는 것 아닌가. 이처럼 의 문제를 해결하지도 못하고서 어떻게 주님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래서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할 것이요, 보기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13.14)는 말씀처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길을 막으신 것이다. 결국 이사야의 글이 성취된 것이다. 요한은 이 점을 분명히 통찰하고 있다: “이사야가 이렇게 말한 것은 주의 영광을 보고 주를 가리켜 말한 것이라.”(41) 결국 12장만 보더라도 4-6,10,19,29,34절처럼 언행하는 것은 믿지 아니함 때문이고(37-38), 그 이유는 40절 때문이다. 그러니까 요한은 이런 결과가 전혀 예상하지 못했거나, 이해되지 않거나, 주님이 뭔가 예측을 잘못하신 것이 아니라 순전히 죄인에게서 인과(因果)된 문제라고 통찰하고 있는 셈이다. 지극히 옳은 관찰이다.

 

 

믿음을 방해하는 자들(42-43)

 

믿음의 길 밖에 서 있는 자들은 누구인가? 이 방해꾼들이야말로 철저하게 그리스도의 십자가(은혜) 밖에 있는 자들이다. 영적 진단을 해 본다면 다른 선(line)에 선 자들이다. 길과 진리와 생명의 편이 아니라는 뜻이다. 그런 자는 오직 하나 뿐이다. 거짓 영, 즉 마귀다. 사탄은 미혹하는 자다: “거짓 그리스도들과 거짓 선지자들이 일어나 큰 표적과 기사를 보여 할 수만 있으면 택하신 자들도 미혹하리라.”(24.24) 결국 요한이 이 복음서를 쓴 목적(20.31)에서 분명히 밝히고 있듯이 이들은 믿음과 영생과 아무 관계가 없는 자들이다. 그럼 이들은 누구인가?

먼저 바리새인들이다. 이 친구들은 상습범으로서 율법의 의로는 흠이 없는 자들이다.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키기 위해서 수 백 개에 해당하는 조문(규칙)을 만들어 놓고 지켰다. 일주일에 2일씩 금식하며, 거의 금욕에 가까운 종교생활을 한 종파다. 그러나 이들은 믿음 밖에 있는 자들이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천국 문을 사람들 앞에서 닫고 너희도 들어가지 않고 들어가려 하는 자도 들어가지 못하게 하는도다.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너희는 교인 한 사람을 얻기 위하여 바다와 육지를 두루 다니다가 생기면 너희보다 배나 더 지옥 자식이 되게 하는도다.”(23.13,15)

또한 회당에서 쫓겨날까 하는 두려워하는 자들이다(42). 당시 회당은 종교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의 모든 생활의 중심이었다. 따라서 이 공동체로부터 추방당한다는 것은 마치 무인도(無人島)에서 홀로 모든 삶으로부터 고립되는 것과 같다. 그래서 적당하게 타협하는 것이다. 무엇보다 하나님과 사람을 혼돈할 정도의 연약함이 더 결정적인 것이다. 사람의 영광을 하나님의 영광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다. ‘중심은 이처럼 언제나 하나님을 뒷전(차선)으로 밀리게 한다. 이해 관계나, 손익(損益)의 문제에 봉착하면 이 사람은 언제나 하나님을 버린다. ‘하나님중심의 삶과는 철저하게 분리된 사람이기 때문이다(1.10, 고전7.32-35).

 

 

부스러기 묵상

 

이러한 방해물들을 넘어서지 못하면 그리스도 안에서 누리는 풍성한 삶은 불가능하다.

516절에서 바늘구멍처럼 틈이 벌어지면서 두 그룹으로 나누어지더니 급기야 돌아올 수 없는 강을 건너 버렸다. 불신(不信)이다. 바로 그때부터 지금껏 물과 기름처럼 위험한 동거를 해 왔다. 그럼에도 주께서는 끝까지 포기하지 않으시고 십자가를 얼마 앞둔 이 시간까지 말씀으로, 표적으로, 친히 하늘 양식을 이들에게까지 나누어 주셨다. 하지만 그러나, 그럼에도, 왜로 이어지는 의문만 남겼던 사탄의 후예들의 정체가 성경 앞에 노출되었을 뿐이다. 이것이 이사야의 예언을 따라 대제사장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선언된 죄의 정체다.

여전히 의문은 남는다. 그렇게 말씀을 듣고, 표적을 보고, 예수님을 친히 만났으면서도 이럴 수 있을까. 인간이란 도대체 어떤 존재일까. 왜 끝까지 믿음 밖에서 예수님을 적대하는 세력으로 남아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악과 사탄의 편에 서는 것일까. 율법이 있고, 성전이 있고, 제사가 있고, 대제사장이 있고, 전통과 역사와 혈통적 계보가 있어도 다 소용 없다. 아브라함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다고 해도 결과는 마찬가지다. 다시 출발선을 기억한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

      그러나 그를 맞아들인 사람들, 곧 그 이름을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그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욕망으로 나지 않고,

      하나님께로부터 났다.”(1.11-13, 표준새번역)

 

그래도 주님은 십자가로 나아가신다. 죄인도 죄인이지만 요한과 더불어 예수행전을 산책하면서 더없이 놀라고 흥분하는 것은 바로 이 주님 때문이다. 나 같으면 수 십 번도 판을 뒤집었을 것이다. 나를 본다. 내가 만약 바리새인들처럼 철면피일 때 기다렸다는 듯이 결론을 내리셨다면 나는 그것으로 끝이었을 것이다. 오늘 그래도 이 모양 요 꼴로라도 이처럼 말씀 앞에 서 있는 것도 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과 값없이 주신 무한하신 은혜 때문이다. 내가 나를 봐도 희망 없음’(시계 제로)인데, 그래서 바리새인을 보면서 역설적이게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의 따뜻함을 맛본다. 주님의 가슴은 언제나 포근한 향기로 가득하다.

주님도 나에 대한 최종 결론을 재림 이후로 미루셨다면 나 역시 그래야 할 것 같다. 세상을 보는 눈을, 사람을 보는 눈을, 교회를 보는 마음을, 성도를 보는 영성을 주님의 빛깔로 바꾸어야겠다. 생각의 속도만큼이나 급변하는 세상에서 바르게 생존하기 위해서라도 영성의 질과 깊이와 넓이를 유연하고 탄력 있고 건강하게 바로 세워나가야 할 때를 살아가고 있다. 언젠가 주님 앞에 섰을 때 사탄 때문에, 인간 장애물들 때문에, 환경 때문에, 이런저런 이유들 때문에 신앙다운 믿음생활을 하지 못했노라고 해봐야 한마디로 웃기는 얘기에 불과할 뿐이다. 어차피 잔치 문이 닫히고 난 후에 밖에서 소리지르고 통곡하고 문을 두드려도 다 소용없는 일 아닌가.

주님이 미리 말씀해주신 장애물들을 잊지 않아야겠다는 생각을 줍는다. 어차피 장애물 경주인데 이것을 무시하고, 부정하고, 내 마음대로 달려봐야 손해는 내 쪽이다. 믿음의 길에는 장애물이 있다. 지금 할 일을 이것들을 어떻게 넘어서 주님이 기다리시는 골(Goal)인 저 천국에 이르느냐가 아닐까. 아직 갈 길은 멀다. 먼길을 떠나는 나그네는 사소한 것에 목숨을 걸지 않는다. 지금 나에게는 이런 지혜가 필요하다. 오늘 아침은 이 부스러기 하나 주워먹고 다시 구두끈을 단단히 묶어본다. 불신이라는 조그만 모래가 신발 안에 남아있는 건 아닌지 살피는 것, 이게 번쩍 내 머리를 스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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