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은 미래로 가는 길을 활짝 연다(요 21.15-25).

20220420(묵상)

  

 

 

사랑은 미래로 가는 길을 활짝 연다.

Jn. 21.15-25

  

    본문 관찰

 

    Q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A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 내 어린 양을 먹이라!

    Q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A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내 양을 치라!

    Q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A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

       → 내 양을 먹이라!

       → 18

       → 나를 따르라!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13.1, 표준새번역)

 

사랑하기에 그 사랑을 숨 쉬게 하시며 확인하시는 것일까.

식사 교제를 마치신 후에 주님은 베드로와 대화를 시작하신다. 3번의 질문과 3번의 대답에서 마침내 3번 주님을 부인한 것 때문에 사랑의 열병을 앓고 있는 베드로의 영혼은 회복된다. 주님은 이 모든 일을 사랑으로, 그것도 끝까지 사랑하시는 모습으로 치르신다. 베드로는 결국 주님의 사랑 앞에 무릎을 꿇고 주님을 부인(저주)했던 지난 날의 어두운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낸다. 이어지는 베드로를 향한 주님의 계획하심이 한 눈에 들어온다.

 

 

베드로

 

주님은 베드로의 이름을 3번이나 부르신다(15,16,17): “요한의 아들 시몬아!” 어떤 말투와 표정이셨을까? 그리고 이를 듣는 베드로는 또 어떠했을까. 사실 장차 보리라!’(1.42,50-51)의 약속 안에서 복된 출발을 했던 그였다. 아래의 대표적인 고백처럼 성장과 성숙을 제자훈련을 통해서 일구어내던 제자중의 제자였다. 하지만 그에게도 영적 좌절이 찾아왔다. 돌이킬 수 없는 패배감과 무력감에 빠져 모든 것을 버려두고 주님을 좇던 헌신에서, 역설적이게도 그 모든 것을 다시 버려두고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3a)는 말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가 버린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16)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6.68-69)

    “주여 내가 지금은 어찌하여 따라갈 수 없나이까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

 

        → 13.38 18.15-27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을 주님께서 아시나이다.”(15,16,17)

 

        → 내 양을 먹이라!(15,16,17)

        → 21.18 - “젊어서는 늙어서는

        → 나를 따르라(19)

 

예수님이 받으실 고난의 잔, 그러니까 아버지께서 주신 잔’(18.11)을 받아야 하는 영광의 고난 앞에서 베드로의 방황은 시작되었다. 하지만 이미 그는 분명한 신앙고백을 여러 차례 해 왔었다(2.11, 6.68-69, 16.30). 그런데 주님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했다는 것, 과연 이것을 어떻게 자기 스스로 정리하고 받아들여야 할 것인가, 문제는 여기에 있다. 아마도 베드로는 이 두 사이에 끼어 있는 자신의 연약함 때문에 절망과 통곡으로 아파했을 것이다(7.18-25). 오직 자기 하나 살자고 믿음까지, 주님까지 버린 자신의 정체(identity)에 대한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있는 셈이다.

부활하신 주님은 바로 그런 베드로를 다시 찾아오신다. 오셔서 첫사랑을 기억하게 하셨으며(1-6, 5.1-11), 식사 교제를 위해 귀중한 시간을 내셨고(7-14), 이제 그를 회복시키는 일을 통해 베드로의 나아가야 할 길(18)을 밝히 보이신다. 회복의 복음은 '사랑'으로 그 길을 연다: “네가 이 사람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15a) 당신을 부인하고 저주까지 한 베드로에게 사랑을 고백하게 하심으로서 무너진 그를 다시 건축하시며, 주님 이후의 복음의 역사를 이어가게 하시기 위한 거대한 계획을 3번에 걸쳐 밝히신다.

하지만 이제 베드로는 앞서 보였던 저돌적인 자신감에서 나오는 성급한 맹세를 앞세우지 않는다. 어쩌면 자신의 생()이지만 이것 역시 자신이 이끌어가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첫 숯불’(18.18) 앞에서의 무너짐을 통하여 비로소 발견했는지도 모른다. 신앙이란 목소리 큰 싸움이 아니며, 그래서 자기 맹세의 굳셈이라는 심리적인 것도 아니고, 말을 앞세우는 성급함도 아니며, 무엇보다 생각의 속도만큼이나 행함의 속도도 중요하다는 것을 실패와 좌절의 쓰라린 경험에서 체득하지 않았나 싶다. 이제야 베드로는 자신의 힘으로 자기를 지켜가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능력과 은총의 포로가 되는 것만이 이 험한 영적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것을 서서히 깨닫고 있는 것 같다.

이것이 주님과의 관계 속에서 물음에 답하는 베드로의 마음이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15,16,17) 주님께 이제와서 무엇을 또, 그리도 더 속일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 세 번째 대답을 할 때에는 베드로가 근심하여 이르되 주님 모든 것을 아시오매”(17)라고 토를 달고 있지 않은가. 이제야 비로소 주님도 베드로에게 본질적인 사명을 주신다.

 

 

미래로 가는 길(18)

 

    “시몬아, 시몬아, 보라 사탄이 너희를 밀 까부르듯 하려고 청구(請求)하였으나

      그러나 내가 너를 위하여 네 믿음이 떨어지지 않기를 기도하였노니

      너는 돌이킨 후에 네 형제를 굳게 하라.”(22.31-32)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3.13b-14)

 

    “내 어린 양()을 먹이라!”

    “내 양을 치라!”

    “내 양을 먹이라!”

 

이로써 10장의 그림이 완성을 향하여 깃발을 들기 시작한다. 베드로의 양이 아니며, 베드로가 스스로 충성을 맹세하여 만들어내는 그런 것도 아니다. 주님으로부터 주어지는 사명이다. ‘(), 그러니까 주님의 양이다. 오직 당신 자신의 피 값으로 사신 양(교회)이다.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사 당신의 친백성을 삼으신 하나님의 자녀들을 먹이고 치는 것, 이것이 베드로가 앞으로 감당해야 할 사명이다. 마침내 미래로 가는 길이 열리기 시작한다. 주님은 지난 과거의 족쇄로부터 베드로를 해방하신다. 저 열려있는 미래의 교회를 향하여 달려가기를 격려한다(17.20-26).

주님은 베드로의 세 번의 실패를 역시 세 번의 애가(愛歌)를 통해서 청결하게 하시고, 그것으로 어둡던 과거로의 길을 굳게 막으신다: “이 말씀을 하시고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나를 따르라 하시니”(19b) 이것이 21장 이후에 베드로가 담당해야 할 십자가다. 지금까지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18a), 그 결과 이곳 디베랴 바닷가까지 떠내려왔다.

하지만 이제부터는 다르다. 주님은 베드로로 하여금 다시는 옛사람으로 추락하는 것을 원하지 않으신다: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하지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18b) 이것이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19a)는 말씀의 뜻이다. 주님은 이처럼 실패 이후의 베드로를 더 주목하고 계신다(22.31-32).

위의 누가복음 말씀은 요한복음과 연결해 보면,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내 목숨을 버리겠나이다”(13.37b)를 말하기 바로 직전에 하신 말씀이다. 그러니까, 주님은 베드로가 돌이킨 후까지를 이미 내다보고 계셨다.

따지고 보면 나의 약함이나 죄가 하나님이 하시고자 하시는 일을 방해하지 못한다. 한편 베드로는 강력한 다짐이나 칼을 들고 있을 때 쓰이는 것이 아니라 만신창이가 된 모습에서 다시 부르심을 받는다. 그는 자기 스스로 재기하는 것이 아니라 주님에 의해서 회복된다. 자기 힘이나 능력으로 사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주시는 것으로 산다는 것을 친히 경험할 뿐만 아니라 그의 뒤를 잇는 모든 복음의 일꾼들로 하여금 이를 깨닫도록 하는 하나의 사인(sign)이 된다.

 

 

부스러기 묵상

 

이제 좀 옆이 보이는 것일까.

자신을 넘어 다른 사람을 궁금해 하는 것을 볼 때 그렇게 느껴진다. 베드로는 사도 요한 걱정을 한다(20-24): “주님 이 사람은 어떻게 되겠사옵나이까.”(21) 자신이 18절이라면 요한은 그럼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이다. 요한은 그에게 주어진 길을 가고, 베드로는 역시 자신에게 주어진 길을 걸어간다. 모든 사람이 다 베드로는 아니며, 또한 모든 사람이 다 요한이 아니다. 내가 베드로라면 내게 주어진 길을 걸어가면 된다. 남의 손에 있는 떡이 커 보이고, 남의 집 연탄불에 신경 쓰다가는 정작 내가 맡은 일의 초점을 잃어버릴 수 있다.

주님 곁에서 친히 하신 말씀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서도 이처럼 오해가 생기는데(23) 말 많은 세상에 오죽할까. 갈 길이 멀고 바쁜데 이처럼 불필요한 언행들이 어느 때나 있는 모양이다. 요한은 왜 이 부분을 말미(末尾)에 슬쩍 집어넣었을까? 사실 성경은 종종 잘못 오해되곤 한다(23a). 그러나 잘못 오해된 말씀을 다름 아닌 말씀으로 바로잡는다.

이렇듯 성경은 성경으로 풀어야 한다는 것을 새삼스럽게 생각해 본다. 불필요한 언쟁이 문제다. 주님의 말씀보다 내가 생각하고 확신하는 인간적이고 세상적인 것을 더 앞세우는 것에서 오해가 생긴다. 요한은 이 경우(case)를 성경에 집어넣음으로써 구전(口傳)에 의한 소모적인 갑론을박(甲論乙駁)의 무익함을 교훈하고 싶어하는 것 같다.

성경만이 유일한 증거요 기준이다. 나는 이 진리를 믿는다. 형제들(23) 제자들(24, 15.27, 19.35) 예수님의 말씀으로 이어지는 말씀의 권위의 경사도가 인상적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가장 바른 신앙의 지표임을 명심하면서 살아가야만 23절과 같은 오해(오류)를 면할 수 있다. 23절 같은 문제가 내 안에 찾아와도 말씀으로 넘어서야겠다. 아직 남아있는 장차 보리라!’(1.42,50-51)의 여백을 이처럼 채워가기 위해 베드로처럼 미래로 가는 길 앞에 선다. 넘치는 은혜의 바다가 미래로 가는 가장 가까이에서 열리고 있다. 이처럼 21장 이후 앞에 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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