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요 18.33-40).

20220414a(묵상)

  

 

 

내 나라는 이 세상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

Jn. 18.33-40

  

    본문 관찰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네 나라 사람과 대제사장들이 너를 내게 넘겼으니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그러면 네가 왕이 아니냐?

    진리가 무엇이냐?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였노라.

    내가 유대인의 왕을 너희에게 놓아 주기를 원하느냐?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세상의 정체

 

유월절이 하루 앞으로 다가와 있다.

애굽의 포로로부터 해방된 것을 기념한 이 절기는 지금 이스라엘이 로마의 속국이라는 점과 미묘하게 얽혀있다. 온 백성은 하나 둘 예루살렘으로 모여들고 있다. 빌라도에게는 이 일을 잘 처리해야만 유대 총독으로서의 정치적 지위와 로마 황제로부터의 신임을 계속해서 보장받을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런 면에서 유대 종교지도자들과 빌라도의 정치적 계산이 절묘하게 맞아 떨어진 셈이다. 빌라도와 유대 종교 지도자들은 서로에게 정치적 안정을 미끼로 각각의 요구를 들어주어야만 하는 입장이라는 점에서 말이다.

 

 

빌라도(33-35,38-40)

 

    “나는 그에게서 아무 죄도 찾지 못하노라.”(38b)

 

무대가 관정 밖에서 안으로(28-32 33-38a) 다시 바뀐다. 그리고 다시 밖으로 바뀌기까지(38b) 빌라도는 주님을 일대일로 대면한다. 짧은 시간이지만 참으로 소중한 만남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언젠가 니고데모와의 대화(3.1- )에서처럼 뭔가 모르게 겉돌고 있다. 시작이야 어찌됐든, 그러니까 정치적인 이유 때문에 주님을 만나게 되었지만 빌라도에게는 다시 없는 기회의 때였다. 그것은 그가 던진 질문처럼 진리가 무엇이냐?”(38b) 하고 물은 것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계신, 아니 진리이신 주님(14.6)을 만났기 때문이다.

하지만 빌라도의 결정적인 문제는 주님을 알거나 믿지 못함이었다. 결국 강도’(40b) 편에 섬으로써 자신 역시 주님과 아무 상관이 없는 강도임을 스스로 자인하는 결과만 낳았을 뿐이다(10.1,8,10,12-13). 그의 질문들을 자세히 보면 그는 처음부터 진리에 대한 목마름이 아니라 단순한 사실의 진위만을 판별하는 자로 서 있다는 느낌을 받는다. 35절은 약간 비아냥거리는 투로 들리는데, 그러니까 너(예수)는 나(빌라도)의 손에 달려있다는 말로 들린다. 일면 맞다. 하지만 그는 결과적으로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에 내어 줌으로써 유대인을 포함한 온 인류가 그분을 거부한 일의 선봉에 서게 된다. 그럼에도 그는 애석하게 이것을 모른다.

첫 번째 무죄선언’(38b)이 일단 눈에 띈다. 죄가 무엇인지도 모르는 사람이 이런 소리를 하는 걸 보면 빌라도가 얼마나 영적으로 둔감하고 무지한 사람인가를 알 수 있다. 동시에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주님이 죄가 없다고 선언한 것은 주님이 죄 없으시는 분이시라는 사실에 대한 세상의 시인이라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역시 빌라도 같이 영적으로 죽어있는 사람에게도 예수님이 무죄(無罪)한 분으로 보여졌다면 유대인들의 행악(行惡)이 실로 얼마나 대단한 죄악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죄인이 의인을 판단하는 것을 보면서 역시 죄인인 나의 언행(言行)을 되돌아보게 된다.

한편, 빌라도는 주님을 놓고 유대인들과 흥정을 벌인다(39). 사실 그는 주님을 진짜 무죄하다고 생각했고, 그래서 석방하려고 했었다. 하지만 39절은 자충수(自充手)가 되어버리고 만다. 사악한 자들(종교지도자들)은 빌라도보다 더 치밀했기 때문이다(15.6-15). 그만큼 빌라도는 현실주의자였고, 실리주의자였다. 대세에 자신의 의지를 너무도 쉽게 꺾어버리고 만다. 이것이 진리에 대한 분명한 신앙고백이 되어 있지 않은 사람들의 특징이다.

 

 

예수님(36-37)

 

    “내 나라는 여기에 속한 것이 아니니라.”(36b)

 

빌라도가 주님께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33)라고 물었을 때 그 의미가 정치적이었는지, 아니면 주님의 메시야 사역에 대한 질문이었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어떻든 주님은 빌라도에게 당신을 정확하게 증거하실 필요를 느끼셨다. 주님은 36절에서 이 세상에 속한 세상 나라와 내 나라(‘하나님의 나라’)를 구분하신다. 이는 37절에서 네가 왕이 아니냐?”는 질문에 네 말과 같이 내가 왕이니라.”고 답하신 것에서 볼 때 더욱 그렇다. 이 세상 나라는 정치적으로 싸우고 지키는 것으로 얻고 유지되는 나라이지만(36) 천국(天國)은 그렇지 않다.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12.31)

    “이 세상의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그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14.30)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16.11)

 

주님은 이 세상 나라의 왕으로, 또 그 왕이 되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다. 이처럼 세상에 대한 주님의 말씀들을 다시 기억해 보면 좀 더 분명해진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나라의 왕이시다는 말씀은 진리다. 왜냐하면 주님 자신이 진리의 주(Lord, 14.6)이시기 때문이다. 이렇듯 메시야되심을 증언하려고 태어나셨으며, 세상에 오셨다. 그리고 이어지는 말씀이 가장 결정적이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b)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나라의 진리를 믿고 그 나라에 속한 자가 분명히 있다는 점이다. 바로 그 사람이 주님의 복음을 듣고, 알고, 믿고, 본다. 불행하게도 빌라도는 진리가 무엇이냐?”(38a) 묻는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는 이 진리와 상관없는 자임을 스스로 시인한 꼴이 되고 말았다. 진리에 대한 질문을 갖는 것은 대단히 중요하고 복되다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 해답이 바로 자신 앞에 서 계시고, 말씀하시고 계심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거나 믿지 못하고 말았으니 말이다.

진리에 속한 자는 이 세상이 아니라 내 나라에 속한 자다. 주님은 지금 이 나라를 회복하고, 그 나라의 백성으로 진리에 속한 자들을 모으시기 위해서 오셨다. 주님의 말씀에 의하면 지금 세상에는 이 두 나라의 백성이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님은 어둠’(1.5)의 세상으로부터 장차 보리라”(1.42,50-51)의 영광 안에 이 진리의 주님을 영접하는 믿음의 사람들을 불러 모으신다. 그래서 요한은 줄기차게 믿는 사람과 주님을 거부한 불신의 사람들을 극명하게 대조하면서 주님의 행적을 지금 빌라도 앞에까지 기록해 오고 있는 중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들이 또 소리 질러 이르되

      이 사람이 아니라 바라바라 하니 바라바는 강도였더라.”(40)

 

격세지감(隔世之感)이란 게 이런 경우를 두고 하는 말일까.

불과 몇 일 전 주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 그들’(40, 12.12-13)이 보인 반응은 이랬다: “그 이튿날에는 명절에 온 큰 무리가 예수께서 예루살렘으로 오신다는 것을 듣고, 종려나무 가지를 가지고 맞으러 나가 외치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하더라.” 그런데 이번에는 40절처럼 외치고 만다. 그리고 19장에 가서는 십자가에 못박으소서!”(6)라고 돌아설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다.

참으로 안타까운 것은 이 세상에 속한자들은 선한 목자이신 주님을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40, 10). 그리고 선한 목자와 반대편에 서 있는 강도’(10.1,8,10,12-13)를 선택한다. 이게 세상이다. 역시 빌라도 뿐만 아니라 소리 지르는 그들역시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음성을 듣느니라.”(37b)는 말씀 밖에, 이 진리의 말씀 반대쪽에 서 있다. 온 세상이 다 마찬가지다. 나라고 예외는 아니다(2.1- ). 바로 거기서부터 부르심을 받은 자 되었다. 여기에 나의 무슨 공로나 자격이나 선행이 들어있을 수 있으랴. 어쩌면 그래서 주님이 오셨다. 그리하여 사탄의 지배 하에 있는 이 세상을 구원하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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