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루살렘 비가.悲歌( 눅 13.31-35)

20210213b(묵상)

  

 

 

예루살렘 비가(悲歌)

Luke. 13.31-35

  

    본문 관찰

 

    그 때에 어떤 바리새인들이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오늘과 내일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제삼일에는 완전하여지리라

    그러나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나를 보지 못하리라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곧 이 때에’(31a)가 앞뒤를 자연스럽게 연결시켜 주고 있다.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예수님의 행로에 어떤 위험이 발견되고 또 예고되고 있다. 문제는 타이밍이다. 지금 주님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말씀을 계속하시는 중이시다(18-30). 더더욱 그 앞에서는 18년이나 세상(사탄)의 지배 아래 있던 한 여인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움 안으로 초대하심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을 보여주셨었다(10-17). 그런데 이 거룩한 행로에 다시금 세상 나라(헤롯)와의 충돌이 예고되고 있다. 여기에 대한 주님의 응답을 따라가 봄으로써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오고 있음)을 방해하는 세력과의 영적 대결을 어떻게 감당해야 하는가를 생각해 본다.

   

 

바리새인들의 시각(31)

 

하나님의 나라를 방해하는 세력이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주님의 행로를 위협하고 있음이 알려진다. 이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주님의 말씀이 이어지면서 사탄의 세력을 결박하고 있는 때였으며, 동시에 하나님의 나라가 주님을 통해 이 세상에 겨자씨와 누룩처럼 확장되고 있는 때였다(10-17,18-21,22-30). 바로 곧 이 때에’(31a) 누군가가 움직이기 시작한다.

호사다마(好事多魔)라고나 할까. 바리새인들의 뉴스는 여러모로 불확실하다. 어떤 이유에서 이들이 이 정보를 주님께 알려주고 있는지, 저들의 의도가 분명치 않기에 그렇다. 하지만 헤롯이 세상 나라를 지키기 위해 불필요해 보이는 예수님을 없이하려는 것만큼은 정황상 분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어떤 바리새인들은 곧 그 때에점차 확장되고 있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고 있지 못했다. 때문에 표면적으로는 주님을 걱정하고 염려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오히려 그 반대다. 지금 저들은 주님이 하시는 이 거대한 영적 파도, 즉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의 오고 있음을 가로막고 있는 것이기에 그렇다. 이유와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언제나 이런 것들이 본질을 흐리게 하는 요소들이다.

과연 헤롯이 하나님의 나라를 가로막고 그 흐름을 역류시킬 수 있을까. 어찌됐든 어떤 바리새인들은 그렇게 생각했는지도 모른다. 예수님 자신일 수도 있는 겨자씨가 지금 이스라엘에 심겨졌고, 또 이스라엘이라는 가루에 누룩처럼 오셔서 당신의 나라를 이 세상 속에서 시작하시사 완성코자 하고 계신다. 그런데 저희는 여기를 떠나소서!”(31a)라고 말한다.

마침내 두 나라의 충돌이 불가피해 보인다. 세상은 늘 달콤한 유혹을 통해서 본질을 호도하고, 할 수 만 있으면 주님에게까지도 정로(正路)를 우회하라고 속삭인다: “여기를 떠나소서 헤롯이 당신을 죽이고자 하나이다!” 물론 이 정보는 사실이다. 하지만 죽음은 이미 예고되었지 않았는가(9.22-27,43b-45). 한 알의 밀알처럼 죽음으로써 당신의 사명을 성취하시겠다는데 죽으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것이 바리새인들과 주님의 다른 차원(시각)이다.

   

 

예수님의 시각(32-35)

 

    “예수께서 승천하실 기약이 차시매

     예루살렘을 향하여 올라가기로 굳게 결심하시고.”(9.51)

 

위기다. 분명 그렇다.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시는 일을 완수하시기 위해 거룩한 행보 속에서 언행(言行)하고 계시는 곧 그 때에’(31a) 이를 방해하겠다는 세상 나라의 도전이 분명한 세력으로 등장하고 있다. 누구보다 이를 주님은 잘 아셨다. 이것이 동문서답(東問西答)처럼 보이는 본문의 대답이 갖는 위치다: “가서 저 여우에게 이르되

바리새인들이 그릇 오해하고 있는 그 때에는 주님에게는 아무도 흔들 수 없는 오늘과 내일그리고 제삼일에는으로 이어져야 할 때다: “내가 귀신을 쫓아내며 병을 낫게 하다가 완전하여지리라! 그러나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니 ”(32-33a) 귀신(사탄, 11)마저도 주님 앞에서 물러가고 있는데 감히 헤롯이(31), 동시에 예루살렘이(34) 이 도도한 십자가에로의 길을 가로막을 수 있다는 말인가. 주님은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말씀하신다. “오늘과 내일과 모레는 내가 갈 길을 가야 하리라고 말씀하실 뿐만 아니라 그대로 행하시고 또 이루신다.

예루살렘을 내려다보시는 주님의 마음과 통곡소리가 들리는 듯하다(34-35). 십자가로 가는 길은 점차 다가오고 있으나(22,33b, 9.51) 정작 예루살렘은 이를 거부하는, 바로 그 부정적 전조가 헤롯으로부터 뭉게구름처럼 일어나고 있는 바로 그 때에주님의 탄식이 터져 나오고 있다. 이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타자(예루살렘)를 위해서다: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하였도다.”(34b)

 

어쩌면 주님은 하늘 보좌를 버리고 육신을 입고 종으로 낮아지신 순간부터 오늘까지 지나온 세월들을 뒤돌아 보셨는지도 모르겠다. 사탄의 세력이 급속하게 무너지는 기적이 이루어지는 현장에 동참하였음에도 주님의 뒤를 따라 좁은 길로 들어가기를 거역하는 자들, 더 나아가 보다 적극적으로 이 일을 하지 말고 여기서 떠나소서!”(31)를 당당히 외치는 자들, 이들은 하나님이 보내신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34a)들이며, 주님의 보호하심이라는 날개 아래 들어오기를 원치 아니한 자들이다(34b).

주님은 저들의 마지막 지점을 내다보고 계신다: “너희 집이 황폐하여 버린 바 되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를 찬송하리로다 할 때까지는 나를 보지 못하리라.”(35, 64.11, 12.7). 예루살렘의 주인이 왔으나 종들인 저들은 그를 거부하였다. 인간은 이렇듯 감히 하나님과 사람의 자리를 뒤바꿨지만 하나님은 그것을 무너뜨리실 것이다. 하지만 그 누가 이 주님의 예고편에 귀 기울였단 말인가.

 

 

부스러기 묵상

 

주님의 마음과 눈물을 바라본다.

화와 분노의 정념(情念)이 아니라 측은함과 불쌍함에 따른 자비의 눈물이다. 어쩌면 자신이 가는 길에 여전히 무지한 인생들 때문에 메아리 없는 공허한 몸부림처럼 느껴지는 것에 따른 외로움이셨는지 모른다. 하여간 주님의 마음은 여러 갈래의 스펙트럼으로 분광되고 있다. 저들의 버린 바 된 상태에서의 당신과의 단절을 이미 다 알고 계셨기에 이런 비통은 더 크고 강했으리라.

언뜻 우리를 바라보시는 주님의 마음은 어떠실까를 생각해 본다. 예루살렘의 반응과 태도에 상관없이 여전히 당신은 당신의 길을 가셨듯이 나에게도 역시 그러실 것이다. 언제 주님이 나의 동의를 받고 일하신 것은 아니니까. 하지만 주님은 주님대로 일하고, 예루살렘은 예루살렘대로, 이처럼 따로따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 봐야 손해날 것은 예루살렘, 즉 내 쪽 일 뿐이다. 수틀린다고 몽니 부르다가 손해나는 쪽은 언제나 나다.

주님의 뜻과 마음을 읽고 거기에 순종하고 따라가도 될까 말까한 수준의 나 아닌가. 그런데 뭘 믿고 주님의 가시는 길을 가로막고, 그것도 모자라 주께서 가라 하신 천국대로(天國大路)라는 좁은 길을 마다하고 나도 들어가지 않고, 급기야 주님도 여기를 떠나소서!”라며 반항하고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나의 꼬락서니를 내려다보시는 주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도저히 가망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그 예루살렘을 향해 길을 나서시는 주님에게서, 동일하게 나를 찾아오시는 주님을 본다. 감사한 것은 내게도 경고의 메시지를 주신다는 점이다(34-35). 주님께서 문을 한번 닫은 후에”(25)에는 다시 기회가 없다. 때문에 모레’(33)가 되기 전에 아직 남아있는 시간만큼이 은혜의 기회다. “슬피 울며 이를 갊”(26)이라는 황폐하여 버린 바 된 주님 밖 어두운 뒷골목에서 생이 일그러지기 전에 나를 바라보시며 통곡의 눈물을 흘리시는 주님을 더 이상 실망시키지 않아야겠다. 초라한 영혼을 끌고 주님을 따라 좁은 문을 향해 두 무릎을 꿇는다. 다시, 탕자의 심정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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