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나라’ 클리닉(눅 13.18-30)

20210213a(묵상)

  

 

 

하나님의 나라 클리닉

Luke. 13.18-30

  

    본문 관찰

 

    하나님의 나라(18-21)

       사람이 자기 채전에 갖다 심은 겨자씨 한 알 같으니

       여자가 가루 서 말 속에 갖자 넣어 전부 부풀게 한 누룩과 같으니라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22-30)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집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번 닫은 후에

          나는 너희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밖에 쫓겨난 것을 볼 때에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갊이 있으리라

       사람들이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하리니

  

 

하나님의 나라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를 말씀해 주신다.

주님은 겨자씨 한 알에서, 누룩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보여주신다(18-21). 그리고 이어서 그 나라를 이루는 자로 살아가는 자의 삶의 실재를 말씀하신다(22-30). 하나님의 나라는 비록 겨자씨와 누룩처럼 미약하고 보이지 않게 시작하지만 마침내 자라’(19), 부풀게’(21) 한 놀라운 모습으로 성장하고 완성된다. 동시에 이것의 시작은 좁은 문’(24)이지만 마침내 잔치’(29)로 이어진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나라라는 씨앗을 내 안에 자라게 하사 열매(잔치) 맺게 하실 주님을 바라본다.

   

 

겨자씨와 누룩(18-21)

 

   “나는 심었고 아볼로는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게 하셨나니.”(고전3.6)

 

하나님의 나라는 자신의 밭에 심은 겨자씨 한 알 같다. 그런데 새들이 깃들만큼 큰 나무로 자랐다. 처음에는 깨알보다도 작은 겨자 씨앗이 새들이 깃들 수 있을 정도로 자라나듯이 하나님의 나라가 그렇다 하신다. 과연 이 말씀은 어떤 의미가 들어있는 비유일까.

내가 내 밭에 심은 씨앗은 내가 만든 것이 아니다. 주신(받은) 씨앗을 심었더니 하나님이 자라게 하신다. 마치 육체는 영혼을 담고 있는 그릇이듯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을 품을 수 있도록 내 안에 당신의 나라 씨앗을 주셨고, 그것이 풍성한 큰 나무로 자라게까지 하신다. 나는 씨앗도 아니고, 나무도 아니다.

나는 이 하늘의 것이 자라도록 한 도구에 불과하다. 좀 더 정확하게 말하면 하나님은 나를 택하사(부르사) 당신의 나라의 거룩한 씨앗을 심어주시고, 뿐만 아니라 그것이 자라게 하시더니, 그것도 새들이 둥지를 내릴 만큼 큰 나무로 성장하게 하셨다. 이것이 내 안에 이루어진, 그리고 나를 통해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의 현존(모습)이다.

주께서 나라고 하는 밭에 당신의 나라의 씨앗을 심어주신 것이 얼마나 감사한지 . 이것은 순전히 하나님의 은혜일뿐이다. 내가 무슨 자격이 있어서 씨앗이 뿌려진 것도 아니다. 정작 나 자신은 몰랐는데 어느 날 내 안에 하나님의 나라의 씨앗이 뿌려지더니 자라고 있다는 것을 발견하였을(알아차렸을) 뿐이다.

누룩의 비유 역시 원리는 동일하다. 반죽인 밀가루가 알아서 누룩을 넣은 게 아니고 그것을 넣은 분은 따로 있다. 주님께서 누룩을 넣으시는 것으로 찾아오시자 그저 밀가루 덩어리에 불과한 상태였는데 그만 그것이 부풀어 오른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처럼 후에 가시적으로 성장한 것이 보이는 결과로 나타나며, 동시에 내면의 세계 안에서 이루어지는 역동적인 변화를 가져온다.

누룩이 들어가자 반죽이 변한 것이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내가 스스로의 힘이나 능력으로 변화를 만들어가는 그런 것이 아니다. 누룩의 비유만큼 신인협동(神人協同)과 같은 인간의 가능성이 철저하게 무능력함을 보여주는 비유는 없다. 처음에 누룩과 가루가 만났을 때는 아무런 차이가 없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자 역사가 이루어졌다. 이는 겨자씨의 비유에서도 마찬가지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시간의 흐름(진전)과 함께 차차 점진적으로 발전(progressive)한다. 성장과 변화는 눈에 보이지 않지만 놀라운 새역사를 창조한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처럼 임하여 완성되어가고 있다.

   

 

구원 클리닉(22-30)

 

하나님의 나라에 대한 주님의 가르침은 제자들로 하여금 구원에 대해 깊은 관심을 낳았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22) 아마도 주님의 전도여행을 함께 동행하면서 느낀 대목이 아닌가 싶다. 주님의 가르침 안에 이러한 생각을 하게 되었든지, 아니면 청중들의 반응에서 이를 느꼈든지 모르겠지만 어떻든 제자들의 관심이 본질적인 쪽으로 옮겨가고 있음은 분명하다.

주님의 대답에는 몇 가지 중요한 천국 로드맵이 제시되고 있다. 먼저, 구원의 문으로 들어가는 것의 주도권은 들어가기를 구하는 자에게 맡겨진 것이 아니라 들어가도록 하는 자의 몫이라 하신다(24). 결국 두 무리로 나누인다.

먼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얻지 못하는 자(24), 문 닫힌 후에 열어주기를 구하나 여전히 문 밖에 있는 사람(25), 주님과 동고동락(同苦同樂)했으나 주께서 모른다 하시는 자(26-27a), 주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여전히 행악하는 자(27b), 하나님의 나라 밖에 쫓겨난 자로 절망 가운데 하나님의 나라를 보는 자(28)가 있다.

다른 한 부류의 사람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자(24a), 하나님의 나라에 있는 자(26a), 동서남북으로부터 와서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석한 자(29)가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가 마침내 이미 먼저 간 하늘 백성을 보고 만나서 저들과 더불어 잔치에 참여하는 복으로 이어지고 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감으로 시작하였으나 마침내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 참여하는 은혜가 주어지는 자로 살고 싶다.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다: 전자(前者)의 사람들처럼 살다가 끝나지 않도록 하신 점, 후자(後者)의 사람들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기까지 인도하신 점, 더더욱 이 두 사람들의 경우를 지금 이 땅에서 보고 듣고 알도록 하심이다. 한편 문이 닫힌 다음에는 상황이 종료되고 만다. 그 이전에, 지금 이곳에서 잔치를 준비하며 살 것인가. 아니면 주와 의식주(衣食住)를 함께 하고, 가르침을 받았음에도 문 밖에서 슬피 울며 이를 갈 것인가.

지금 나는 문이 아직은 닫혀있지 않은 시간표를 따라 살아가고 있음이 감사하고 또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 주님도 나를 알고 나도 주님을 아는 그런 사이로 살아가고 싶다. 지금은 좁은 문을 통과해 하나님의 나라로 가고 있는 중이다. 노정(路程)에서 잠시 주님과 동행한 것이 아니라(26) 하나님의 나라 잔치에까지 함께 동행하며 한 길 가는 삶이기를 소망하며 기도한다. 언젠가 내게도 주어질 잔치를 꿈꾼다. 그날까지는 좁은 문을 따라 묵묵히 천국대로(天國大路)를 따라 주님 앞으로, 그분과 더불어 살아가 보자.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의 나라는 죽어서맛보는 것이 아니다.

지금 살아서보고 누릴 수 있다. 그럼 이 천국을 오늘이라는 삶에서 어떻게, 무엇으로 경험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지금 이곳에서 누리고 맛보는 천국은 어떤 모습일까. 나에게 천국은 어떤 모습으로 임하고 있고, 지금그것을 따라 살아가고 있는 것일까. 이런저런 생각이 희미하지만 하나님의 나라를 바라보도록 이끈다.

하나님의 나라는 겨자씨가 심겨질 때, 누룩이 가루에 섞일 때, 그러니까 이 나라가 임할 때는 아무도 모를 만큼 미약하다. 하지만 이 나라는 종국에 가서는 전 영역을 변화시키는 온전한 나라를 이루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발전하고 또 성장한다. 그러므로 겨자씨가 심겨짐으로, 또 누룩이 반죽되는 것으로 이 나라에 참여한 자는 반드시 이것들을 통해 영향력을 받게 되어 있다. 채전(菜田)과 가루, 그리고 겨자씨와 누룩은 따라 분리되어 각자 독립적으로 활동하지 않는다.

나무가 되어 새들이 깃들게 된 이후에나, 전부 부풀어 오른 덩어리가 완숙된 이후에나 보고 알고 느끼게 되는 것이 아니다. ‘이미’(already) 그 시작에서부터 하나님의 나라의 희미한, 그러나 아직’(not yet) 완성되지 않은 매우 역동적인 나라를 따라 완성되어가는 시간을 함께 하게 된다.

이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그 시작에서부터 그 나라를 맛본다. 이점은 매우 중요하다. 어떤 사람들의 헛된 주장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단지 죽은 다음에나 맛보고 경험하고 누리고 얻게 되는 그런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 땅에서부터 저 땅에까지 연속성을 지닌다. 그러므로 지금 이 땅에서, 그러니까 금세에서 충분히 누림으로써 하나님 아버지와의 친밀함을 향유할 수 있는 그런 나라다.

나도 모르게 시작된 내 안에 이루어져 가는 하나님의 나라의 영광스러움을 씨앗이 자라고 누룩이 부풀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그것이 새들이 깃들 만큼 자라고 완전히 숙성된 누룩 넣은 반죽이 되기까지 이 두 사이에서 무궁무진(無窮無盡)하게 펼쳐질 하나님의 나라의 무한한 영광을 누리며, 맛보며, 그러면서 더 풍성한 삶을 살아가고 싶다. 주님께서 이미 하나님의 나라를 죽음 이후에나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셨기에 자라감안에 있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함으로써 이것이 나의 삶이라는 그릇에 어떤 모습으로 담기게 될지를 가슴 조이며 따라가 보고 싶다.

 

 

제목 날짜
주님은 제자들이 만난 풍랑을 기쁨으로 바꾸신다(요 6.16-21). 2022.01.17
예수님은 ‘장차 … 보리라’의 표적(sign)이다(요 5.31-47). 2022.01.13
너희에게 평강이 있을지어다!(요 20.19-23) 2022.04.14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다 이루셨다(요 19.28-42). 2022.04.13
베드로: 안다와 모른다, 그 사이에서(요 18.10-18,25-27) 2022.04.12
예수님은 그 당할 일을 다 아셨다(요 18.1-9). 2022.04.12
기도의 파도타기는 주의 기쁨을 낳는다(요 16.16-24). 2022.04.06
가지는 포도나무 안에 거함으로 열매 맺는다(요 15.1-8). 2022.04.03
제자는 ‘지금은’과 ‘후에는’을 사랑으로 완성한다(요 13.31-38). 2022.02.14
마침내 ‘십자가행전’의 서곡이 보인다(요 11.47-57). 2022.02.01
36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영성(마 14.13-21) 2022.07.14
저희를 진리로 거룩하게 하옵소서!(요 17.14-19) 2022.04.12
도마와 빌립의 해답이 믿음임을 주님은 아신다(요 14.1-11). 2022.03.30
56 세상이 복음을 흔들 때, 그래도 십자가 곁인가?(마 22.15-33) 2023.01.21
고난 받으시는 주님을 생각한다(요 18.19-24,28-32). 2022.04.12
*46 결혼교향곡(마 19.1-12) 2022.09.13
세상으로 나를 믿게 하옵소서!(요 17.20-26) 2022.04.12
하나님께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성령님을 보내신다(요 14.15-26). 2022.03.30
주님이 목자이시니 나는 행복한 양이다(요 10.1-18). 2022.01.31
예수님이 누우셨던 무덤이 비어있다(요 20.1-10). 2022.04.1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