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라!(눅 11.14-28)

20210204(묵상)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라!

Luke. 11.14-28

  

    본문 관찰

 

    예수님(14) - 귀신을 쫓아내시니 귀신이 나가다.

       비난1(15) 그가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

       비난2(16) 하늘로부터 오는 표적을 보이라.

          예수님의 대답1(17-26)

       한 여자의 화답(27) 당신을 밴 태와 당신을 먹인 젖이 복이 있나이다.

          예수님의 대답2(28)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축사논쟁, 그리고 귀신론 강의

 

예수님께서 귀신을 쫓아내신다(14).

하지만 이번에도 아니나 다를까 이를 본 무리들의 전방위적 공격이 시작된다. 하나는, 귀신의 왕 바알세불의 힘을 빌어서 한 것이다(15). 그리도 다른 하나는, 귀신을 쫓아낸 것이 하나님께로서 난 것이라는 증거를 보이라고 몰아붙인다(16). 여기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이 이어진다(17-26). 이미 천국, 즉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나라를 거부하고, 어떻게 해서든 방해하려는 자들의 헛된 모습이 어처구니 없을 뿐만 아니라 또한 무익한 언행이 여지없이 드러나고 있다. 이에 반해 이런 상황에서도 예수님의 변증의 형식에 담아낸 <귀신론 강의>는 참으로 눈부시다.

   

 

사탄끼리의 전쟁이란 말이냐(17-19).

 

말 못하게 하는 귀신을 쫓아내셔서 말 못하는 사람이 말을 하는 기적을 보면서도 딴소리다(14). 그것도 모자라 예수님을 귀신공동체의 일원이라며 소위 귀신몰이로 몰고간다(15). 예수께서 그들의 생각을 아셨다. 그리고 놀라운 말씀을 하신다: “스스로 분쟁하는 나라마다 황폐하여지며 스스로 분쟁하는 집은 무너지느니라.”(17) 이 말을 왜 하셨을까. 이어지는 논점에서 드러난다: “만일 사탄이 스스로 분쟁하면 그의 나라가 어떻게 서겠느냐.”(18b) 그러니까 바알세불과 예수님이 저들이 말하는 대로 한 편이라면 어찌 이처럼 분쟁하며 귀신을 쫓아내겠느냐는 얘기다. 무슨 말인가. 유감스럽지만 귀신(사탄)과 예수님은 같은 편이 아니라는 말이다.

귀신이 귀신을 몰아내는 게 이치에 맞지 않다는 얘기다. 맞다. 같은 편끼리는 총을 겨누지 않는다. 그렇다면 예수님이 귀신을 쫓아냈으니 결국 예수님은 귀신(마귀, 사탄)과 싸우신 것이고, 예수께서 귀신들끼리 싸웠고, 이때 귀신의 왕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 것이라는 주장은 헛소리가 되어 버렸다.

   

 

귀신이 물러가는 것은 이미 하나님의 나라가 임한 것이다(20).

귀신론 강의(21-26)

 

그렇다면 귀신의 왕 바알세불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을 힘입어 뒤신을 쫓아낸다면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너희에게 임하였으니라.”(20)는 말씀보다 예수님이 하늘로부터 오신 분이라는 더 분명한 표적이 있을까. 결코 그럴 수 없다. 진리이기에 거침이 없다. 하나님을 대적한 타락한 천사인 사탄의 정체를 정확하게 아시는 주님이시기에 이번 기회에 귀신론에 대한 강의를 자연스럽게 이어가신다.

비록 사탄이 강한 자이지만 더 강한 자인 메시야 앞에서는 무기력하다(21-22). 사탄과 그를 편드는 자들은 결코 그리스도(진리) 편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저들은 주님을 반대하고, 진리를 헤치는 자들이다(23). 무슨 말인가. 지금 예수님을 따르지 않는 자들은 다 마귀의 자식들이다는 말씀이다.

이처럼 교묘하게 저항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귀신은 생각보다 강하다. 결국 마귀(사탄)를 쫓아내어 새롭게 되었다면 더 이상 귀신이 지배하에 떨어지지 않도록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새로운 삶을 살아야 한다. 그리해야 더 악한 귀신이 들어가서 다시 귀신의 지배 아래로 추락하지 않게 된다. 결국 예수 그리스도를 따라 사는 것이 귀신의 지배권에서 빠져나오는 길이다. 아직 사탄의 때는 끝나지 않았기에 이쯤에서 단도리하시는 것도 포함되는 말씀이다.

   

 

부스러기 묵상

 

예수님께서 행하신 귀신을 쫓아낸 것에 대한 그 전말이 드러난다.

사탄의 나라가 점차 몰락해가는 것과 비례해서 하나님의 나라가 이미 임한 것을 말씀하심으로써 이 이적의 의미가 하나님의 나라와 연결되었다. 이로써 이 이적 역시 단지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이 하나 더 추가되고 이어진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를 마치 비유에 이어서 그 비유를 해석해 주시는 것처럼, 귀신을 쫓아내신 것을 통해 귀신론 강의를 해 주신 것에서 분명해진다.

그러자 이번에는 앞서 비난과는 다른 한 여자의 고백이 화답송처럼 울려 퍼진다(27). 이것은 또 뭐지? 그런데 이번에도 주님은 놀라운 지혜로 여인의 말의 의미를 밝히신다. 놀랍다는 말 밖에 나오지 않는다. 사실 여인은 이러한 기적을 행하는 것을 가능하게 한 이 사람을 낳은 자, 그가 한 어떤 특별한 체험을 부러워하며 그것을 이라고 외친다. 마리아, 그녀가 몹시 부러웠을까. 감탄이라고 볼 때 그렇다.

하지만 이 한 여자의 관심은 세상과 육에 머물러 있다. 거기서 복을 찾고, 그 복에 눈높이를 맞춘다. 기적 자체에 매료되었거나, 그런 능력을 행하는 것이 부러웠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럼에도 세속적이며, 세상적이며, 육신적이며, 욕망에 찬 시각이 아니라 할 수 없다. 어떻든 마리아는 메시야 사역에서 중심이 아닌 것은 분명하다.

여기서 예수님은 단지 세상의 값싼 칭찬과 찬사에 흔들리지 않으심을 보여주신다. 초점이 하나님께 맞춰줘 있기 때문이다(28): “오히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키는 자가 복이 있느니라.” 세상은 여전히 예수님을 비난하거나, 세상과 육신에 초점을 맞추고 있을 뿐이다. 만일 이럴 때 주님처럼이 아니라 초점을 잃어버린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아찔하다. 여인의 고백 수준에서 찰싹꺼리고 있어서는 진리의 눈높이에 이를 수 없다. 때문에 언제나 그렇지만 주님의 말씀에 귀 기울여야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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