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영성(마 14.13-21)

20220717(양무리교회)

  

 

 

오병이어(五餠二魚)의 영성

Matt. 14.13-21

  

 

    본문 관찰

 

    빈 들에 가시니 무리가 듣고 따라간지라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사 그 중에 있는 병자를 고쳐 주시니라

    저녁이 되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

    여기 우리에게 있는 것은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뿐이니이다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주시매 다 배불리 먹고

  

 

하늘을 우러러 축사하시고

 

    “예수께서 나오사 큰 무리를 보시고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6.34)

    “무리가 알고 따라왔거늘 예수께서 저희를 영접하사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며 병 고칠 자들은 고치시더라.”(9.11)

 

예수님께로 사람들은 몰려들었고, 때는 저녁이다(13,15a).

장소는 빈 들이고, 거기에 모인 사람들은 남자들만 5천명이다(21). 그런데 먹을 수 있는 것이라고는 고작 한 어린이의 도시락인 오병이어(五餠二魚, 17)가 전부다. 이때 주님은 이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신다. 그렇지만 저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을까(16).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단지 배고픔을 해결하는 음식을 주라는 것이면 200 데나리온으로 가능하다는 계산이 맞다. 하지만 오병이어(五餠二魚)는 겉그림이다. 표적(기적)을 통해 주어지는 일용할 양식이 말해 주고자 하는 메시지, 이것이 진짜 말하고 보여주고자 하는 메시지라는 뜻이다. 과연 그것이 무엇일까. 이를 구약과 신약에서 대표적인 사건을 통해서 살펴보겠다.

 

 

구약의 빵 - 만나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같이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으니라.”(고전10.1-5)

 

출애굽을 한 이스라엘 백성은 유아 외에 보행하는 장정만 60만 가량이요, 수많은 잡족과”, 그리고 여자들과 노인들까지 하면 족히 200만 명이라는 민족이다. 그래서 이들이 먹을 것 타령을 한 것은 어쩔 수 없는 현실이기도 하다. 이를 좀 정리해 보자.

 

[출애굽 둘째 달 15] - 신광야

이스라엘 자손 온 회중이 그 광야에서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여, 이스라엘 자손이 그들에게 이르되 우리가 애굽 땅에서 고기 가마 곁에 앉아 있던 때와 떡을 배불리 먹던 때에 여호와의 손에 죽었더라면 좋았을 것을 너희가 이 광야로 우리를 인도해 내어 이 온 회중이 주려 죽게 하는도다.”(16.2-3)

 

    → 내가 너희를 위하여 하늘에서 양식을 비 같이 내리리니”(16.4a)

        “이스라엘 족속이 그 이름을 만나라 하였으며

          깟씨 같이 희고 맛은 꿀 섞은 과자 같았더라.”(16.31)

 

[모세의 40년 회고록] - 만나신학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2-3)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광야에서 네게 먹이셨나니 이는 너를 낮추시며 너를 시험하사 마침내 네게 복을 주려 하심이었으니라.”(8.16)

 

또 그 땅의 소산물을 먹은 다음 날에 만나가 그쳤으니 이스라엘 사람들이 다시는 만나는 얻지 못하였고 그 해에 가나안 땅의 소출을 먹었더라.”(5.12; 16.35 참조)

 

    → [불평, 원망]

        “백성이 하나님과 모세를 향하여 원망하되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인도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는가

          이곳에는 먹을 것도 없고 물도 없도다

          우리 마음이 이 하찮은 음식을 싫어하노라 하매”(21.5)

 

[일용할 양식의 영성]

우리 조상들이 모세에게 속하여 다같이 신령한 음식을 먹으며,

그러나 그들의 다수를 하나님이 기뻐하지 아니하셨으므로

그들이 광야에서 멸망을 받았으니라.

이러한 일은 우리의 본보기가 되어

우리로 하여금 그들이 악을 즐겨 한 것 같이

즐겨 하는 자가 되지 않게 하여 함이니”(고전10.1-6)

 

, 핵심은 무엇인가. 하나님이 밥통령(밥느님)을 하시려고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하신 게 아니라는 거다. 이것이 구약의 빵에 들어있는 영성이다. 잘 먹고, 잘 사는 게 광야를 지나는 여정이 가지는 가치는 아니다.

그럼에도 광야의 이스라엘은 만나라는 일용할 양식으로 사는 게 아니라 이를 통해 저들을 낮추시며 또한 시험하사 마침내 복을 주려 하시는 만나에 들어있는 영성을 읽어내고 받아들고 믿는 일에 실패한다(8.16). 결국 만나로 사는 게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그 결과는 무엇인가. , 광야에서 다 멸망한다.

 

 

신약의 빵 - 오병이어(五餠二魚)

 

그럼 신약의 백성들은 어떤가. 오늘 오병이어(五餠二魚) 기적 사건이 이것을 보여준다. 예수님은 따로 빈 들에 가시”(13a)었고, 무리들은 이를 듣고 주님 계신 곳으로 몰려들었다. 천국 복음은 이처럼 좋은 땅에 뿌려진 겨자씨처럼 자라고 있는 중이다.

주님은 저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14). 마가는 이 장면을 그 목자 없는 양 같음을 인하여 불쌍히 여기사 이에 여러 가지로 가르치시더라”(6.34)라고 증언한다. 목자 없는 양 같이 유리하는 무리들이었기에 주님의 마음은 더 많이 애처로우셨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치유 사역과 더불어 하나님 나라의 일을 이야기하시”(9.11b)는 만남은 저녁 때가 되기까지 계속되었다(15a).

하지만 메시야 사역(14, 4.23, 9.35, 9.11)이 저녁까지 진행되면서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그것은 저녁식사를 어떻게 해결하느냐 하는 일이었는데(15), 주님은 이것이 필요하다는 제자들의 요구에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16)고 하신다.

하지만 제자들은 오병이어(五餠二魚)를 보는 시각이 예수님과 달랐다: “그러나 이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6.9b) 이때 주님은 있는 것, 비록 그것이 조그마한 것일지라도, 모인 수 천의 무리에 비하면 어린아이의 한끼 식사에 불과한 볼품 없는 그것을 내게 가져오라 하시고”(18), 이 오병이어(五餠二魚)가지사 하늘을 우러러 축사(祝謝)하시고”(19) 그것을 떼어 주신다.

그런데 문제는 그 이후다. 이미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들었고, 이때 그렇다면 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기적은 구약 광야의 만나처럼 사람이 진정 무엇으로 사는가를 보여준 사건이다(6.48-51). 이와 비슷한 말씀을 마태복음 6장에서 이미 듣지 않았겠는가. ‘무엇을 먹을까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자에게는 이 모든 것을 더하시리라라고 하신 말씀을 말이다. , 그렇다면 지금 빈 들에서는 이처럼 마태복음 6장은 물론이고 신명기 말씀이 이루어진 것이다: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40년 동안에 네게 광야 길을 걷게 하신 것을 기억하라.

      … 또 너도 알지 못하며 네 조상들도 알지 못하던 만나를 네게 먹이신 것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2-3)

 

하지만 신약의 성도들 역시, 일용할 양식에 대한 영성에서 빗나간다. 이 점이 아프죠. 병행본문인 요한복음 6장은 예수께서 행하신 이 오병이어(五餠二魚)의 표적을 본 반응을 이처럼 전해준다: “이는 참으로 세상에 오실 그 선지자라 하더라.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이 와서 자기를 억지로 붙들어 임금으로 삼으려는 줄 아시고 다시 혼자 산으로 떠나 가시니라.”(6.14b-15)

무엇인가. ‘빵통령’(떡느님)이 되어달라는 거다. 이들 역시 사람이 육신의 양식인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알고 믿고 따랐어야 한다. 하지만 이들도 이 진리를 받지도 믿지도 따르지도 않았다: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생명의 떡이니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요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이르기를 너희는 나를 보고도 믿지 아니하는도다 하였으니라.”(6.33,35-36)

오병이어(五餠二魚)의 표적이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더 이어진다: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니라. 너희 조상들은 광야에서 만나를 먹었어도 죽었거니와, 이는 하늘에서 내려오는 떡이니 사람으로 하여금 죽지 아니하게 하는 것이니라. 나는 하늘에서 내려온 살아 있는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내가 줄 떡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니라 하시니라.”(6.48-51)

이렇듯 구약의 40년이나 날마다 주신 일용할 양식 만나도, 신약의 오병이어(五餠二魚)의 표적도, 그렇다면 전하고자 하는 진리는 분명하다. 무엇인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요 여호와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사는 줄을 네가 알게 하려 하심이니라.”(8.3) 지금 만나도 <광야식당>이고, 오병이어도 단지 육신의 허기진 배를 채우는 <빈들밥집>인가. 하나님이 밥 주는 분이신가. 복음이 밥 주어서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인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부스러기 묵상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6.31-33)

 

일용할 양식을 얻고, 먹고, 그래서 배부른 것이 전부일까.

하나님이 식당 CEO이신가. 복음이 육신의 기갈을 채워주는 밥인가. 다시 말하면 구약 광야교회 성도들처럼 광야에서 하나님으로부터 만나를 하루도 거르지 않고 40년이나 먹는 것으로, 신약의 성도들처럼 빈 들에서 예수님으로부터 오병이어(五餠二魚)5천명이 나누어 먹고 배부른 것으로, 그러니까 일용할 양식을 먹는 것이 교회이고 복음이고 믿음의 여정일까. 정말 그런가. 그러려고 교회 다니는 것인가. 그거 하시는 분이 우리가 믿고 섬기고 경배하는 하나님이시고 예수님이신가.

 

    ■구약, 광야의 만나도 일용할 양식이 목적이 아니다(8.2-3).

    ■신약, 빈 들의 오병이어(五餠二魚)도 배부름이 목적이 아니다(6.33,35-36).

 

그럼 무엇인가. 우리 역시 예수를 믿고, 신앙생활을 하고,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을 듣고 알고 믿고 따르는 이유가 단지 먹고 배부르게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럼 무엇인가. 이것의 주인이시고, 이를 허락하시고 주심으로서 마침내 하나님으로 사는 자가 성도인 것을 믿고 알게 하시는 주님을 놓치지 않는 것이다. 다시 요한복음 648-51절을 읽어보겠다.

우리 시대의 교회와 복음이 자칫 잊어버릴 수 있는 부분입니다. 가난하여 일용할 양식이 필요한 사람들이 진짜 잃어버려서는 안 되는 게 있습니다. 그것은 떡이 보여주는, 만나가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있는데 그것이 곧 생명의 떡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입니다.

일용할 양식은 하나님을 향한 건강한 신앙과 믿음의 반응이 열어가는 길을 흔들리게 하곤 한다. 구약의 만나를 먹었던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도, 주님에게서 오병이어(五餠二魚)를 통해 배부르게 먹었던 신약의 백성들도 바른 반응과 응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떤가. 먹고 사는 것이 예수 믿고 교회 다니는 목적이라면 이들과 다를 바 없다. 먹고 사는 문제를 해결하고 응답받는 것이 결국 종교 생활의 목적이고 중심이라면 우리도 망할 수 있는 길을 가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나는 이런 일용할 양식을 위해 살지 않는다! 이게 뭐죠? 주께 드리는 헌금이다. 하나님, 저는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면 살고 있다! 이 또한 무엇이죠? 주께 드리는 온전한 전적인 헌신이다. 물질이 있는 곳에 마음이 있다 하신 말씀처럼 주께로 주님의 것을 다시 돌려드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며 사는 자의 삶이다. 나는 하나님이 주시는 것으로 살아가는 자녀라는 것을 주께 보여드리는 것이 헌신이자 헌금이다. 하나님의 나라 곳간에 쌓는 자가 천국을 이루어가는 사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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