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망하리라(눅 13.1-9).

20200913(양무리교회)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망하리라.

Luke. 13.1-9, 2.5-42

  

    본문 관찰

 

    빌라도가 갈릴리 사람들의 피를 제물에 섞은 일(1-3)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 치어 죽은 18 사람(4-5)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로 생각하느냐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

    회개에 든 두 가지 영성(6-9)

       열매로 드러난다.

       기회는 제한되어 있다.

   

 

뉴스특보, 새상은 요지경이다.

 

몇 사람이 예수님께 당시 발행한 뉴스특보를 전달하는 장면이다.

먼저는 정치적이라 할 수 있는 빌라도 학살사건(1-3)이고, 이어서 재난에 해당하는 실로암 망대사건(4-5)이다. 한쪽에서는 로마가 유대 종교의 영역을 침해해 들어오고 있고, 또 한쪽에서는 부실공사에 사람들이 죽어나가는 악순환의 연속이다. 이럴 때 호사가는 물론 누구든지 이런저런 얘기를 할 수 있는 그런 때다.

   

 

빌라도 학살사건(1-3, )

실로암 망대사건(4-5, )

 

[팩트]

사람들이 예수님께 충격적인 뉴스를 전한다(1a). 그것은 총독 빌라도가 성전에서 제물을 바치고 있는 갈릴리 사람들을 학살하여 제단에 그들의 피가 가득하게 되었다는 정치적이면서 종교적인 사건이었다. 갈릴리 사람들은 로마에 대해 적대적이고, 빌라도는 포악하기가 하늘을 찌르는 자였으니 이런 일은 충분히 일어날 수 있었다. 비록 로마의 식민지였으나 로마도 인정한 종교 영역을 침해한 사건인만큼 경우에 따라서는 일파만파로 번질 수 있는 사안이었다.

실로암에서 망대가 무너져서 무려 18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치어 죽은 사건이다. 오늘로 하면 부실공사에 따른 인재(人災)에 해당한다. 아마도 실로암발 뉴스는 건설사, 시공사, 인허가 공무원, 합동장례식장, 보험사, 보상 등 이런저런 경위와 대책에 대해 심층보도와 기사들이 쏟아지는 분위기와 비슷할 것 같다.

 

[사람들]

이 소식을 전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은 이런 징벌을 받지 않았다고 안심하는 눈치다. 이런 일이 일어나면 보통 사람들은 갈릴리(실로암)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예수님의 진단이기도 하다(2,4).

 

[예수님]

하지만 예수님은 아니라’(3a,5a)고 단호하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갈릴리(실로암) 사람들이 다른 모든 갈릴리(예루살렘)에 거한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있다고 생각하면 안 된다라고 하신다. 그러면서 놀라운 말씀을 더하신다: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3,5)

 

여기까지가 본문을 정리한 것이다. 어떤 대형 사건이나 사고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비슷하다. 이는 사실상 소위 일반화의 오류. 예를 들면, 일본이 어려움을 겪으면 오만 잡신이 많고 십자가 복음이 가장 약한 나라여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받은 것이라는 생각이 이 경우다. 그러면 스데반이 돌아 맞아 죽고, 교회가 벼락에 맞아 불타는 것과, 믿음 좋은 성도와 목회자가 암으로 죽는 것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오늘 우리가 1절의 두어 사람처럼 지금 고난과 죽음과 실패와 고통을 받는 것은 필경 다른 사람보다 죄가 많아서이다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때 예수님은 우리에게 뭐라 말씀하시는가. ‘아니다!’라 하신다. ‘그렇지 않다라고 하신다.

 

사도행전 25-42절을 보라.

 

예수님의 이 말씀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좀 더 살펴볼 게 있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사도행전 교회에서도 일어났다. 주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승천. 이어 약속하신 보혜사 성령이 교회에 오신 성령강림 사건이 사도행전 2장이다. 그런데?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올라온 많은 사람들은 이 사건을 놓고 아침부터 술에 취했다라고 비아냥거린다. 자기 식대로, 자기 기준이나 틀대로 생각해 버린 것이다. 누가복음 13장에서는 죄가 많아서라, 사도행전 2장에선느 술에 취했다고 말한다.

이를 우리 상황으로 가지고 와 이해해 보자.

, 글쎄 이번에도 불합격이라네. 주일성수 안 하고 학원 다녀서 그런 것 아냐?

저 집은 뭘해도 왜 그러지? 우리가 알지 못하는 무슨 큰 죄가 있나?

혼자 다 교회 일하는 것처럼 열심인데 왜 저리 가난하게 살까?

저 목사님은 40일 금식을 두 번이나 했다는데 목회가 안 되면 이제 그만 하시지!

저 집사님은 학생 때 목회자로 서원했다는데 아직 평신도야. 저러다 벌 받을 껄?

벌써 집을 두 채나 팔아 건축헌금했다는데 왜 저 집은 복을 못 받을까?

 

여기서 <프레임의 법칙>에 대해 생각해 보자. 이는 똑같은 상황이지만 어떤 사건(말이나 행동이나 태도)이 서로 다른 이해의 틀을 통해서 전혀 다르게 해석되고 받아들여짐으로써 이 때문에 과정이나 결과도 달라진다는 법칙이다. 몇 가지 예를 들어보자.

(https://m.kin.naver.com/mobile/qna/detail.nhn?d1id=11&dirId=1112&docId=306107999&qb=7ZSE66CI7J6E7J2YIOuyley5mQ==&enc=utf8&section=kin.ext&rank=1&search_sort=0&spq=0).

[1] 눈이 내리던 어느 날 일과가 끝난 후 한 군부대의 인사장교, 공병장교, 간호장교가 부대 정문 앞 건너편 커피숍에 앉았다. 세 장교가 있던 커피점에서는 얼마 전 부대 공병대가 세운 육교가 아주 잘 보였다. 그날 사병 2명이 휴가 후 귀대 중에 술이 취해 약간 비틀거리면서 육교를 올라 지나가는 게 보였다. 걷다가 조금 쌓인 눈에 미끄러져 비틀 하다가, 화가 나는지 워커 발로 육교의 계단을 쿵쾅 차기도 하면서 육교를 오르고 있었다. 이를 세 장교가 보며 생각한다.

*인사장교 - '완전 빠졌군. 모자도 삐뚤어지게 쓰고, 술 취해서 귀대해! 한 따까리 해야겠군.'

*공병장교 - '뭐야, 우리가 만든 육교를 작살내겠다니, 소속이 어딘지 본때를 보여줘야지.'

*간호장교 - '위험한데, 넘어지면 입원 3 주 중상인데, 탈 없이 육교를 내려가려나? 걱정일세.'

[2] 선생님은 매일 지각을 하는 학생에게 회초리를 들었다. 회초리를 든 다음 날 아침, 그 선생님은 학교에 가다가 늘 지각하는 그 학생을 보게 되었다. 한 눈에 봐도 병색이 짙은 아버지가 앉은 휠체어를 밀고 요양시설로 들어가고 있었다.

순간 선생님은 지각은 곧 불성실이라는 생각에 이유도 묻지 않고, 무조건 회초리를 든 자신이 부끄러웠고 자책감이 들었다. 학생은 요양원이 문을 여는 시간에 맞춰 아버지를 모셔다 드리고, 100미터 달리기 선수처럼 뛰어서 학교에 왔을 텐데, 그래도 매일 지각을 할 수밖에 없었을 텐데...

그 날 역시 지각을 한 학생은 선생님 앞으로 와서 말없이 종아리를 걷었다. 그런데 선생님은 회초리를 학생의 손에 쥐여주고 자신의 종아리를 걷었다. 그리고 "미안하다, 정말 미안하다."라는 말과 함께 그 학생을 따뜻하게 끌어 안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울었다.

   

 

새 술에 취하였다고?

 

, 계속해서 사도행전 2장이다. 사람들은 예수 그리스도, 복음, 교회, 진실, 사실, 구원, 은혜, 십자가, 부활, 보혜사 성령이 오셨음을 알지 못하고 믿지 않기 때문에 십자가와 원수로 살아간다. 그러니 앞서 예수를 십자가에 못 박으라 이처럼 외친 것 아닌가. 그리고 이번에는 약속하신 성령이 오셨는데도 예루살렘은 이를 두고 자기 소견에 옳은대로 말한다. 사도행전 25-13절이다: “각각 자기의 방언으로 제자들이 말하는 것은 듣고 소동하여 이 어찌 된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이르되 그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하더라.”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죽을 것이다.

 

    마침내 종들(선지자)이 아니라 아들을 보내셨다.

    그런데? 너희가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그런데 그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다.

    그리고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셨다.

    그런데? 새 술에 취했다고? 조롱하고 놀리다니!

 

여기서 우리는 누가복음 13장에서 말씀하신 예수님의 대답을 기억한다. 이를 여기에 올려보면, 성령이 오셨음에도 조롱하며 새 술에 취한 것이라 말하는 예루살렘 사람들이 다른 사람보다 죄가 더 있는 줄로 생각하느냐. 아니라 너희도 만일 회개하지 아니하면 다 이와 같이 망하리라.”는 말씀이 된다.

그렇다면 정작 자신이 타고 있는 인생이라는 배는 타이타닉처럼 침몰하고 있는데 저 배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실로암 망대에 대해서 빌라도와 성전 제사를 향해서 이런저런 얘기나 하고 있는 때인가 말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지금 세상이 그렇다고 하신다. 정작 자신은 회개하지 않고, 하나님에 비추어 자신을 돌아보지 않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자신을 돌아볼 생각은 하지 않고 교회가 어쩌고, 이런 때에도 예배가 어쩌고, 기독교가 어쩌고하며 세상 탓, 코로나 탓, 너 때문이야를 외치고 있다면 결국 갈릴리 사람들처럼, 실로암 망대가 무너져 죽은 18 사람들처럼 그렇게 너희도 죽을 것이라 하신다.

 

이렇게 끝이라면 얼마나 허망하겠는가. 참 놀라운 것은 마침내 사도행전에서 베드로의 설교를 듣고 청중들이 보인 반응이다. 이것이 너희도 죽을 것이다는 말씀에 대한 응답이다. 사도행전 237절이다: “듣고 있던 사람들이 마음 속 깊이 찔려서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었다. ‘형제 여러분! 형제 여러분! 그러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것이 빌라도 학살사건(1-3, )과 실로암 망대사건(4-5, ), 그리고 성령이 오셨으나 조롱하며 복음을 비웃는 사람들에게 필요한 메시지다. 우리 주님이 기대하시는 복음이다. 지금 이 코로나 시대에 우리와 이 시대 사람들이 고백해야 할 자신을 향한 질문이어야 한다: ‘그러면 우리가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바로 이 고백 앞에 선 사람들에게 베드로는, 성경은 말한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2.38a)

삶을 돌이겨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죄 용서를 받으라! 이것이 회개하지 아니하면 너희도 죽을 것이다는 주님의 말씀에 응답하는 것이다. 이 말은 분명 또 이런 오해를 가져올 수도 있다: 뭐라, 또 회개하라고? 세상이 이처럼 요지경인데 자기만을 위해 회개하라고? 기독교는 이처럼 다른 사람, 세상에 관심이 없고 오직 자신의 구원에만 목숨을 거는 종교인가? 죄의 회개와 상관없이 살아가는, 그래서 계속해서 시비나 프레임의 법칙과 같은 것에 묶여 사는 자들에게 계속해서 이런 생각은 충분히 가능한 생각들일 수 있다:

무고한 18명이나 되는 사람이 망대가 무너져 죽어갈 때 하나님은 어디에 계셨습니까? 다른 것도 아니고 갈릴리 사람들이 예배와 제사를 드리는데 그 자리에서 빌라도에게 죽어가는데 하나님은 그때 무엇하고 계셨습니까? 사랑의 하나님이시라면서 온 세상이 코로나로 죽어가고 신음하고 있는 이때 당신은 도대체 누구십니까? 마치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께 질문하듯이 악이 선을 이기며 날뛰는 이때 하나님은 무엇하십니까?”라며 온통 저마다 소리를 지르며 프레임의 법칙이라는 장단에 맞춰 날뛸 뿐일 것이다.

이럴 때 우리는 베드로처럼 이 시대와 사람들을 향한 메시지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36절이다: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은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이 예수를 하나님이 주와 그리스도가 되게 하셨느니라.”

이 말을 듣고서 마음에 찔려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하면, -이것이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반응이다.- 그러면 우리가 저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메시지는 38절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2.38a) 우리의 입술과 마음과 심령에는 빌라도 학살사건(1-3, )과 실로암 망대사건(4-5, ), 그리고 성령이 오셨으나 조롱하는 사람들이 떠벌리는 자들과 같은 그런 뉴스만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주와 교회와 복음에 대해 이런 소리를 하는 자들 앞에 아무런 대답도 없이, 그냥 동의하듯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면 안 된다. 다시 베드로 사도의 말씀으로 교훈을 삼는다.

 

 

부스러기 묵상

 

    “하나님의 뜻은 여러분이 지속적으로 선을 행하여,

      여러분을 사회의 위험 요소로 여기는

      어리석은 자들의 생각을 고쳐주는 것입니다.”(벧전2.15, The Message)

    “또 너희가 열심으로 선을 행하면 누가 너희를 해하리요.

      그러나 의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면 복 있는 자니

      그들이 두려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며 근심하지 말고,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 선한 양심을 가지라

      이는 그리스도 안에 있는 너희의 선행을 욕하는 자들로

      그 비방하는 일에 부끄러움을 당하게 하려 함이라.

      선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이 하나님의 뜻일진대

      악을 행함으로 고난 받는 것보다 나으니라.”(벧전3.13-17)

 

언제나 그랬지만 요즘처럼 세상이 온통 교회와 그리스도인과 하나님에 대해 시끄러운 적이 있었을까 싶다. 마치 사사시대처럼 각자 자기 생각에 옳은대로 이러쿵저러쿵 말들을 쏟아낸다. ‘아니면 말고식이다.

누가복음 13장과 같은 일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일어난다.

사도행전 2장 역시 그렇다.

또한 사도행전 7장에서는 돌을 들어 스데반을 죽이고야 만다.

이러한 때에 주님은 묵묵히 십자가 앞으로 나아가시는 메시야의 길을 가신다.

이러한 때에 베드로는 선지자를 통해 이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증거한다.

이러한 때에 비록 순교의 제물이 될지라도 진리의 길을 걷는다.

이는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주시는 메시지다.

이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하나님의 지혜가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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