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면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눅 10.25-37)

20200719(묵상)

  

 

 

그러면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

Luke. 10.25-37

  

    본문 관찰

 

    율법사(25) -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예수님(26)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

    율법사(27) – ❶ 하나님 사랑(6.5), 이웃 사랑(19.18)

    예수님(28) 네 대답이 옳도다 이를 행하라 그러면 살리라

 

        율법사(29) 그러면 내 이웃이 누구니이까

                          (그러면 이웃을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 The Message)

        예수님(30) 어떤 사람이 강도를 만나 거의 죽은 것을 버리고 갔더라

           ① 한 제사장(31):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② 한 레위인(32):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③ 어떤 사마리아 사람(33-35):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라 비용 갚으리라

               →

                   예수님(36) - 이 세 사람 중에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율법사(37a) 자비를 베푼 자니이다

                   예수님(37b) 너도 이와 같이 하라!

   

 

Good Samaritan

 

영생과 이웃 사랑(강도 만난 자의 이웃), 그러니까 영원한 생명-어떤 사마리아 사람이 강도 만난 이웃을 불쌍히 여겨 돌보아 준 자비를 베푼 일- ‘이웃 사랑이 만나고 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이를 위해 먼저 본문을 정리해 볼 필요가 있다.

   

 

영생과 이웃에게 자비를 베푼 삶이 만난다.

 

[1차 정리] 영원한 생명

영생과 사랑(하나님, 이웃)이 율법에서 만난다. 다시 예기하지만 구약 율법에서다. 영생이 구약이라는 말인가. 그럼 신약과 예수님의 십자가는 어찌되는 것인가. 어떻든 지금 예수께서 그리하신다. 하지만 여기서 우리가 긴장하듯이 만일 율법사의 연결(❶❷)이 바르지 않았다면 종종 이런 때에 하신 말씀이 여기서도 제안되었을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너희가 성경도, 하나님의 능력도 알지 못하는 고로 오해하였도다.”(22.29) 따라서 그가 이웃 사랑이라는 율법을 따라 행하며 살아가고 있다면 그는 이미 영원한 생명에 가까이 살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당황스럽지 않을 수 없다. 영생, 그러니까 구원에 대한 신약의 이해, 곧 익숙한 구원을 말하는 성경의 매뉴얼을 알고 있어서다: ‘주 예수를 믿으라. 주와 구주로 영접하라. 죄를 회개하라. 입으로 시인하라. 예수 이름 외에는 구원 얻을 이름이 없다. 십자가에서 단번에 다 이루셨다.’ 그런데 예수님은 율법이 무엇이라 기록되었느냐?’라고 하시는 것 아닌가. 그리고 이 율법(❶❷)을 행하면 영원히 살리라 하신다.

 

[2차 정리] 어떤 사마리아 사람

대화의 흐름이 이번에는 그렇다면 이웃이 누구인가?’로 이어진다: 그러면 이웃을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The Message) 이렇게 해서 말씀은 드디어 주제로 넘어온다. 영원한 생명과 이웃 사랑이 만나면서 그럼 이웃이 누구인가에 주목하게 된다.

이웃 사랑의 한 구체적인 예가 예수님의 비유에서 제시된다. 선한 사마리아 사람의 비유다. 영생에 연결되어 있는 이웃 사랑, 이것의 구체적인 예는 강도 만난 자를 불쌍히 여겨 그를 돌보아 주는 자비를 베푸는 것이다. 이 자비를 베푼 자의 언행이 이웃 사랑이고, 이것을 1차 정리와 연결하면 다름 아닌 이 행위가 영원한 생명과 분리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세 사람의 삶의 방식 가운데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임과 동시에 영원한 생명에 가까이 가 있는 삶을 사는 것인가? 예수님은 이 세 사람 가운데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푼 어떤 사마리아 사람이라 하신다. 예수님의 말씀을 종합해서 정리하면 이렇다: 율법교사인 네가 영원한 생명으로 살려고 한다면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품으로서 너도 사마리아 사람처럼 그의 이웃이 되어 살아라.

   

 

선한 사마리아 사람

 

이 비유는 이렇게 되어 있지 않다: ‘강도 만난 자가 이웃이고, 이처럼 곤란과 역경에 처한 이웃인 강도 만난 자를 돌보는 것이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사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을 정말 오해한 것이다. 초점은 강도 만난 자가 아니고, ‘그 사람에게 누가 이웃인가?’이다. 그러니까 강도 만난 자가 있고, 그 이웃이 있다는 얘기다. 가끔 너무나 쉽게 강도 만난 자가 우리의 불쌍한 이웃이다는 이해가 있어서 하는 말이다. 그렇지 않다. 초점은 강도 만난 자가 아니고, 핵심은 그에게 누가 이웃인가 이다. 바로 그 이웃은 율법이 명한 이웃 사랑을 행하는 자이고, 바로 그가 영생에 가까이 살아가는 자다.

 

(1) 강도 만난 자와 그를 본 세 사람, 누가 그의 이웃인가?

한 제사장: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한 레위인: 그를 보고 피하여 지나가고

어떤 사마리아 사람: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니라

중요한 것은 이웃의 자격이나 조건이 그 사람의 신분(직함, 지위, 직업)이 아니다. 핵심은 그를 보았음에도 피하여 지나가고’(①②)에 있고, 또한 그를 보고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니라’()라는, 그러니까 강도 만난 자에 대해 어떤 반응과 행위를 했느냐에 있다. 제사장이고 레위인이고 사마리아 사람이냐에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고 아니고의 어떤 흔들 수 없는 힘이 있는 것은 아니다.

 

(2) 이웃의 자격은 강도 만나 자를 보고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니라’()를 행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웃 사랑이며, 동시에 이것이 율법이 명하는 영생에 이른 자다. 비록 세상으로부터는, -특별히 유대인들은 이들을 혼혈인’(samaritan)이라 하여 하나님의 사랑으로부터도 밀어내 버렸다.- 거부되고 소외된다 해도 사마리아 사람을 우리 주님은 당신의 품에 품으신다.

그러나 제사장이고 레위인이라는 이유로 종교그룹으로부터는 존경과 박수를 받는다 하더라도 그러나 고통 당하는 자의 이웃으로써 율법이 명하는 이웃 사랑을 따라 살지 않으면 하나님의 나라와 영생에서 멀어지는 것이다.

 

(3) 그렇다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은 영생을 얻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준 것인가. 아니다. 이 율법을 지키면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다고 이웃 사랑을 행한 것이 아니라는 얘기다. 비슷한 예수님의 말씀이 마태복음 2531-46절 말씀에 나오는 소위 양과 염소의 비유. 주께서 재림하셔서 양과 염소를 구분한 후에 오른편에 있는 양들에게 창세로부터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 “내가 주릴 때에 병들었을 때에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그러자 의인들이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라고 이어 대답한다. 이에 예수님은 매우 놀라운 예상할 수 없었던 매우 중요한 말씀을 하신다: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40)

, 그렇다면 어떤 사마리아 사람의 언행이 마태복음 25장의 이 말씀, -이 말씀은 구약 율법이 아니라 예수님의 복음이다.- 과 잘 어울린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정도까지 이야기하면 행위구원인가?’라는 질문을 하고 싶은 사람들이 제법 많을 것 같다. 지금 우리는 내 능력과 선행과 착함과 행위가 구원을 얻는다는 구원론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다. 오늘 본문의 전체 흐름에서 이미 1-2차 정리를 통해 살펴보았던 것처럼 영생은 하나님 사랑(6.5)과 이웃 사랑(19.18)이라는 말씀과 직결되어 있다는 것이 예수님의 긍정이다. 영원한 생명은 이미 그가 하나님이 명하신 말씀대로 사는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교회는 구제기관이 아니다.

그렇지만 또한 예배하는 곳만은 아니다. 한편 교회는 예배하는 곳이다. 그러나 구제하는 일을 하지 않아야 하는가. 결코 그렇지 않다. 사람들은 사회복지와 구제는 국가가 알아서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예배와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을 잘하면 된다고 말한다. 하지만 정말 그런가. 분명 우리들 내부에서 보면 -제사장과 레위인 스타일에 익숙한 교회 이해에서 보면- 사마리아 사람 스타일은 최우선이 아니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이 그림을 교회 바깥에서, 그러니까 세상에서 교회를 바라보면 좀 달라진다. 교회 밖의 사람들은 교회의 종교적 행위와 기능에 박수 치지 않는다. 세상은 제사장이나 레위인이라는 소위 교인들이 강도 만난 자를 보고 지나가면서 교회에서 종교생활만 잘 하는 것에 동의하지 않는다. 세상이야 어떻게 되든 제사장이나 레위인으로만 잘 지내면 된다고 얘기할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얼마나 건물이 웅장하고 아름다우냐, 얼마나 유명하고 존경 받는 사람들이 출석하고 있느냐,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 교회에 다니느냐와 같은 이런 것들에 대해서는 관심이 없다. 세상은 지금 강도 만난 사람을 교회가 세 사람의 후보들 가운데 어떤 사람과 같은 모습으로 그를 대하는 교회인가에 주목한다.

그렇잖은가. 쉬운 예를 하나 더 들어보자. 사람들은 얼마나 비싼 아파트에 사느냐, 얼마나 좋은 차를 타느냐에 존경과 경의를 표하지 않는다. 그가 어떤 삶을 사느냐, 그가 옆에 있는 사람들에게 어떤 사람으로 사느냐, 그가 위기와 고난의 눈물을 흘리는 사람들에게 어떤 반응을 보이느냐에 주목한다.

그가 제사장이라고 존경 받지 않는다. 그는 제사를 집전할 때, 예배를 인도하고 설교할 때에 존경을 받을 수도 있다. 하지만 강도 만난 자를 피해 간다면 그는 이웃이다의 후보에 들 수는 있을지는 몰라도 이웃으로 인정되지는 않는다. 레위인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그가 비록 사마리아인(혼혈인, 오늘로 하면 다문화 가정)이라는 이유 때문에 비웃음이나 불이익을 받는다 할지라도 그가 어떤 삶을 사느냐에 따라, 그러니까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니라’()라는 삶을 통해 그럼에도 불구하는 나는 너의 이웃이다는 것을 행하며 산다면 바로 그가 이웃이다는 주님의 선언을 받는 것이다.

 

그러면 선생님은 이웃을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29) 라는 율법사의 질문은 그러면 예수님은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로 적용해 볼 수 있다. 우리는 분명 어떤 교회이기를 요청 받고 있는가. 하나님은 물론이고 세상 또한 우리를 주목한다: “너희는 세상의 빛이라. 너희는 세상의 소금이라.” 이를 다른 말로 하면, 교회의 사회적 책임이다. 또한 교회의 공공성이다. 교회는 이미 교회 자체만의 생존을 위해 존재할 수 없다.

그렇다면 우리는 세상으로부터 어떤 교회로 정의되고 있는가. 교회는 선한 사마리아 사람처럼 이 세상의 이웃으로 살아야 한다. 이것이 교회의 가치이고 아름다움이다. 교회는 사마리아 사람처럼 아름답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아니 그보다 더, 동시에, 교회는 사마리아 사람보다 아름답도록 부르심을 받았다. 우리는 이 시대 강도 만난 자를 위해 교회로서 어떻게 정의해야 하는가. ‘피하여 지나가고’(①②)여야 할까. 아니면 불쌍히 여겨 돌보아 주니라’()여야 할까.

 

    Q 여러분은 우리 양무리교회(이웃, 그리스도인)를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

    A 강도 만난 자에게 자비를 베풀어서 그의 이웃이 된 사마리아 사람 같은 교회입니다.

       *네 주님, 오늘도 고통과 염려와 아픔 때문에 눈물 흘리는 사람들에게 따뜻한 이웃으로

         살아가는, 주님께서 세운 교회되기를 원합니다.

    Q 그럼 주님이 뭐라 하실까요?

    A ‘너도 그와 같이 하라!’

 

성도 여러분! 그러면 여러분은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

교회는 지금 사회적 책임과 공공성을 요구받고 있다. 이것이 빛으로 소금으로 부름 받은 교회의 모습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모습을 <굿네이버스>, <컴패션>, <월드비전>, <동방사회복지회>에 다 맡겨 버리고 우리는 예배만 드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면 된다? 정말 그런가.

 

  

제목 날짜
유대인 vs 이방인(눅 14.15-24) 2021.02.13
일상생활의 영성.靈性(눅 14.1-14) 2021.02.09
예루살렘 비가.悲歌( 눅 13.31-35) 2021.02.09
‘하나님의 나라’ 클리닉(눅 13.18-30) 2021.02.09
18년 동안의 고독(눅 13.10-17) 2021.02.09
회개하지 않으면 너희도 망하리라(눅 13.1-9). 2021.02.08
복음(福音): 분쟁을 넘어 화해로!(눅 12.49-59) 2021.02.08
그 종이 복이 있으리로다(눅 12.35-48) 2021.02.08
다만 너희는 그의 나라를 구하라(눅 12.13-34). 2021.02.04
제자대로.弟子大路(눅 12.1-12) 2021.02.04
이중생활을 버리라!(눅 11.37-54) 2021.02.04
표적을 요구하지 말고, 회개가 답이다(눅 11.29-36) 2021.02.04
이미 임한 하나님의 나라를 보라!(눅 11.14-28) 2021.02.02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눅 11.1-13) 2021.02.02
기도를 가르쳐 주옵소서!(눅 11.1-4) 2021.02.02
둘 다, 하지만 좋은 편을!(눅 10.38-42) 2021.01.29
그러면 교회를 어떻게 정의하겠습니까?(눅 10.25-37) 2021.01.29
무엇으로 기뻐하십니까?(눅 10.17-24) 2021.01.29
복음전도: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다(눅 10.1-16). 2021.01.29
나들목에서 만난 예수님(눅 9.46-62) 2021.01.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