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난 받으시는 주님을 생각한다(요 18.19-24,28-32).

20220413(묵상)

  

 

 

고난 받으시는 주님을 생각한다.

Jn. 18.19-24,28-32

  

    본문 관찰

 

    대제사장(19-24)

    빌라도(28-32)

 

 

비극의 엑스트라들

 

계속해서 비극의 사람들의 이름이 오르내린다.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 유대 총독 본디오 빌라도, 그리고 이들을 따르는 무명의 부하들이 그들이다. 하나 둘 단역으로 등장했다가 소리도 없이 사라진다. 오직 십자가 구속이라는 하나님의 섭리를 응하게 하는 도구에 불과한 자들이다(32b). 하지만 마치 애굽(가나안 족속들, 이방 나라들)이 이스라엘을 회개하게 하는 일에 도구로 쓰임 받았다고 해서 하나님의 긍휼하심을 받게 되는 것은 아닌 것처럼 자기 행위대로 심판을 받게 될 뿐이다. 별로 유쾌하지는 않지만 영원토록 비극적인 사람들을 어쩔 수 없이 만나야 한다.

 

 

대제사장(19-24)

 

안나스는 로마의 권력에 의해 대제사장에서 해임된 자이지만 당시 대제사장인 가야바의 장인으로 막후에서 영향력을 행사하는 실력자였다(13). 아마 유월절 잔치를 먹고자 하여”(28b) 안식일 전에 모든 일을 -그것은 예수님을 죽이는 일이다(31b)- 끝내려고 하는 각본에 따라 법을 가장한 불법을 자행하면서 신속하게 자신들의 시나리오를 진행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흉악하고 파렴치함에도 불구하고 유월절절기를 운운하는 게 얼마나 가증스럽고 위선적인지 구역질이 난다. 이게 대제사장이란 사람들의 꼬락서니다.

성전과 제사장이란 누구에 의해서, 무엇 때문에,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거짓과 죄로 가득한 예루살렘 성전, 이렇게 해서 한 세대 후 쯤 함락되어 돌 하나도 돌 위에 남지 않고 다 무너뜨리우리라.”(24.2b)는 주님의 예언처럼 AD 70년 마침내 역사의 무대에서 사라지고 만다. 성전이 로마 군대와 천부장에 의해서 지켜진다는 게 뭘 의미할까. 참으로 부끄러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사람들은 흔히 믿음과 진리에로의 부르심과 상관없이 그의 교훈’(19), 그러니까 주님의 말씀에 대해서 질문한다. 하지만 이들의 관심은 진리에의 목마름이 아니다. 주님을 알고, 믿고, 만나고, 사귀고, 사랑하기 위함이 아니다. 뭔가 꼬투리를 잡아 주님을 훼방하고, 진리를 상대화시키고, 교회와 복음을 모독하기 위해서 고작 대하여 물으니”(Knowing about Jesus)로 일관할 뿐이다. 이는 예수님을 알기(Knowing Jesus) 위함과는 근본적으로 다르다. 주님의 대답을 읽어보면 이를 모르실 리 없으시다(20-21,23).

하지만 진리에 대해서 무지한 사람들은 폭력을 사용하거나(22), 뒤로 미룬다(24). 대화를 몇 마디 해 보면 그가 진짜 주님에 대해서 목말라 있는 갈급한 심령인가, 아니면 뭔가 다른 꿍꿍이 속이 있는 야바위꾼인가를 알 수 있다. 주님은 이를 다 아시기에 결코 우회하거나, 타협하지 않으시고 정면 승부로 처리하신다. 진리자(이단)들에게는 주님처럼 대할 필요가 있다. 진리는 언제나 담대하게 서도록 하기에 그렇다. 주님은 바리새인들을 위시한 당시의 거짓의 사람들을 진리로 설득하신 것이 아니라 단지 진리를 선포하시기만 하셨다.

얼마 전, 성경공부반에서 어떤 신실한 자매는, 몇 일 전 좋은 소식을 전하려고 왔다길래 전도자인줄 알고 집에 영접하여 차()까지 대접을 했는데 알고 보니 [하나님의 OO]라는 뭔가 석연치 않은 자들이어서 앞으로 어찌할지 모르겠다며 난감해 했다. 이들은 이단(異端)이다. 유월절을 지켜야 한다는 유월절주의자들이며, 자신들에게만 구원이 있다고 말하는 이단의 전형인 분리주의자들이다. 이들은 상대할 가치가 없는 자들이다. 마음에 부담을 느끼지 말고 다시 찾아오면 나는 예수님을 믿는다!”며 집 안으로 영접하지 말 것을 권했다.

 

 

빌라도(28-32)

 

가야바는 걸어 다니는 진리, 곧 숨 쉬는 하나님을 만났으나 그것으로 끝이다. 이처럼 세상에는 주님을 만나는 기회를 놓치고서 -이들은 그랬는지조차 깨닫지 못한다.- 살아가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역시 가야바에게서 예수님을 넘겨받은 빌라도가 그랬다. 빌라도는 가능하면 이 문제에 휘말리지 않으려고 몇 가지 언행을 반복한다(29-31a). 하지만 지금도 사도신경을 고백하는 주의 백성들의 입에서 하루에도 수 만 번씩 오르내리는 불행한 사람의 대명사로 등단한다. 아마 지금도 지옥에서 귀를 틀어막고 통곡하며, 고난주간에는 더욱 더 괴로워할 것이다.

 

 

부스러기 묵상

 

    “그들이 예수를 가야바에게서 관정(官庭)으로 끌고 가니 새벽이라.”(28a)

    “유대인들이 이르되 우리에게는 사람을 죽이는 권한이 없나이다.”(31b)

 

여기 새벽’(28a)은 앞에서 숯불을 피우고”(18)서 추위를 달래던 때, 그 이후다.

그렇다면 18장은 지금 한 밤중에 진행되는 권모술수(權謀術數)라는 뜻이 된다. ‘참 빛’(1.9)이 어두움의 세력에 의해 무참하게 일그러지는 것, 이것이 요한복음을 펼치자마자 맛본 영적 분위기였다: “빛이 어둠에 비취되 어둠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정죄(定罪)는 이것이니 곧 빛이 세상에 왔으되 사람들이 자가 행위가 악하므로 빛보다 어두움을 더 사랑한 것이니라. 악을 행하는 자마다 빛을 미워하여 빛으로 오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 행위가 드러날까 함이요.”(1.5, 3.19-20)

빛과 어두움은 이처럼 교차한다. 지금은 어두움의 때이기에 어두움이 뭔가를 주도하는 것처럼 보인다(12.31, 14.30). 그래서 이들은 주님을 죽이는 것까지 도모한다(31b). 하지만 하나님은 어두움을 당신의 말씀을 응하게 하려”(32)는 것으로 반등시키신다. 주님은 죽는 것이 아니라 죽음에 자신 스스로를 내어놓으신다(16.21). 밤은 이를 끈질기고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지만 그럴수록 주님은 밝은 광명의 빛으로 나아오시는 시간이 점점 임박하고 있다. 이 팽팽한 긴장이 18장을 주도하고 있다.

기가 막히는 부분은 더 있다. “그들은 더럽힘을 받지 아니하고”(28b), 주님을 고발’(29)하고, 또한 행악자’(30)라 명한다. 이게 죄인이 행하는 뻔뻔스러움이요, 간교함이다. 누가 누구를 더럽히고 있는데 적반하장(賊反荷杖)도 유분수지, 이는 다 선을 가장한 위선이요, 종교의 거룩을 가장한 가짜들의 종교노름이다. 이것이야 말로 두 얼굴을 가지고 살아가는 전형적인 종교인들의 초상이다. 따라서 선악(善惡)을 판단하고 처리할 권세는 저들의 몫이 아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죽이고서라도 자신들의 목적과 계획을 성취하고자 하는 모리배들의 사악함이다.

주님도 이처럼 사역(목회)을 하셨구나 생각하니 만감이 교차한다. 이게 역시 내가 걸어가야 할 길이고, 이 길은 고난이기에 주님의 뒤를 따라 가야 한다. 이 땅에서 핍박과 고난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주님처럼 사는 게 어려운 만큼 해 보자. 고난을 내 생의 시간표에 심을 수 있음만큼이 축복 아닌가. 주께서 그렇게 쓰시겠다니 드릴 수 밖에. 주님을 위해 고난 받을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니 참 감사하다. 나를 통해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다면 그 어떤 일도 즐겁지 않으랴.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머니나 아버지나 자식이나 전토(田土)를 버린 자는,

      ‘현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어머니와 자식과 전토(田土)를 백 배나 받되

      ‘박해를 겸하여 받고

      ‘내세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10.2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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