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요 17.6-13)

20220409b(묵상)

  

 

 

우리와 같이 저희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Jn. 17.6-13

  

    본문 관찰

 

    자신을 위한 기도(1-5)

    제자들을 위한 기도(6-19)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그들은 아버지의 말씀을 지키었나이다(6)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7)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8)

       내가 비옵는 것은 내게 주신 자들을 위함이니이다(9)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10)

       우리와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11)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전하고 지키었나이다(12)

    교회를 위한 기도(20-26)

  

 

제자들을 위한 기도(1)

 

주님은 제자들, 내게 주신 사람들을 위해 기도하신다(6a,9).

예수님의 기도의 두 번째 큰 주제 가운데 전반부에 해당되는 기도를 묵상하게 된다. 주님은 이제까지의 공생애 3년의 말씀행전에 대한 제자들의 고백을 -“우리가 믿사옵나이다.”(16.30b)- 받으시고서 눈을 들어 하늘을 우러러 하나님 아버지께 기도하시고 계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연약한, 그리하여 제자들이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 나를 혼자 둘 때가”(16.32a) 오리라는 것을 미리 하셨다. 때문에 믿음 이후가 여전히 불완전한 제자들이기에 저들을 위해 기도하시지 않으실 수 없으셨다. 하늘을 우러러 제자들을 기도로 품고 계신 주님의 따라 나선다.

 

 

6-8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을 그들에게 주었습니다.

      그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온 것을 알고,

      또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었습니다.”(8, 표준새번역)

 

주님은 제자들에게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셨고(6), 자신을 주셨고, 아버지의 말씀을 주셨다(8a). 다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기 위함이었다. 이처럼 주님은 주시는 분이시다. 말씀 안에 모든 것을 주셨다. 이처럼 주님이 말씀을 통하여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시자 제자들에게는 무엇보다 그 말씀을 지키고, 또한 받아들이는 기적이 시작되었다.

사실 나는 받기만 하면 된다. 그래서 값없이 주신 은혜의 선물을 감사합니다!’라며 받아 살아오고 있다. 하지만 종종 받기에는 너무 부담이 되는 말씀도 있다. 그렇다고 달면 삼키고 쓰면 거절하는 식으로 내 입맛을 따라 편식(偏食)하거나, 내 마음대로 담아낼 수는 없다. 그럼에도 욕심을 부려서 과식(過食)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나에게 주어지는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제자들은 아버지께서 주님께 주신 그 말씀을 받아들였다(8). 말씀 그대로를 받아들였다는 것이 중요하다. 순수하고, 순전한 복음이 뿌리내리도록 하는 것, 이것이 말씀을 받는 자의 마음밭이어야 함을 깨닫는다. 좀 성경을 알고, 믿음이 깊어지고, 말씀을 경외하는 마음이 나의 영적 자유함이라는 개인적인 것보다 후순위에 밀리기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말씀 앞에 서는 심령의 자세나 상태가 좀 일그러지는 것을 본다. 하지만 나 역시 제자들처럼 주님으로부터 말씀을 받아들인 자로 인정받고 싶고, 그 기도의 은총 안에 머무르며 살아가고 싶다.

주님은 말씀을 주었더니, 그러자 제자들이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심을 알았다고 아버지께 보고를 드린다(7,8). 그래서 1630절에 드려지는 제자들의 고백이 중요하다. 주님을 아는 것은 오직 말씀을 통해서일 때 가장 안전하며 정확하며 신뢰할 만하다. 하나님을 아는 지식(Knowing God)은 기록된 말씀을 통해서, 성육신하신 말씀 곧 그리스도를 통해서, 선포된 말씀 즉 설교를 통해서 주어진다. 하나님이 이 셋을 통해서 진리를 아는 은총 앞으로 당신의 자녀들을 모으신다.

하나님을 아는 일은 즐겁고, 그것만큼 행복한 일이다. 여전히 의인된 죄인인 내가, 세상과 사탄의 영향력이라는 교차로 안에 원하든 원치 않던 걸어가는 내가, 무한하신 하나님을 유한한 내가 알고, 깨닫고, 발견하고, 생각하고, 느낄 수 있다는 말인가. 그래서 아는 것만큼 낮아지고 겸손해지고, 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두렵고 떨리는 게 주님을 앎 이후의 삶인 것 같다.

주님이 주신 말씀을 받은 제자들에게 일어난 세 번째 기적은 믿음이다(8). 주님은 말씀을 주셨고, 제자들은 그 말씀을 받아들였고, 알고, 믿었다. 하지만 엄밀하게 따지면 이 셋 역시 제자들이 한 것이라 할 수 있을까. 신앙공동체 안에서 종종 나타나는 문제의 원인들은 내가말씀을 스스로의 결단에 의해 받았고, 내가 말씀을 읽고 듣고 묵상해서 알았고, 내가 마음으로부터 동의하고 결정해서 믿었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이다. 그것만큼 교만이 있고, 알량한 비교우위가 있고, 나는 특별한 무엇을 통해서 받았다고 생각하면서 자신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을 최고로 생각하거나 만약 그게 없어 보이는 사람은 무시하고 정죄하고, 말하자면 영적 기준이 자기 자신으로 가버리는 경우를 허다하게 만난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자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4,17)

 

주님이 말씀으로 오셔서 이루신 세 가지 은혜를 보고 있는 중이다(8). 주님의 하나님을 향한 지난 3년의 공생애에 대한 보고서를 읽어가면서 참 감동이 된다. 그러면서 이 말씀을 목회라는 앵글에 비추어 본다. 나 역시 때가 되어 주님 앞에 섰을 때 나는 말씀을 심었고 물을 주었으되 오직 하나님은 자라나게 하셨나니”(고전3.6)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주님처럼 세 가지의 건강한 자람을 주님께 보고드릴 수 있을까. “그런즉 심는 이나 물 주는 이는 아무 것도 아니로되”(고전3.7a)라고 고백할 수 있을까. 이 셋마저도 하나님이 하셨다고 고백할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소망한다.

 

 

11-12

 

    “나는 이제 더 이상 세상에 있지 않으나, 그들은 세상에 있습니다.

      나는 아버지께로 갑니다. 거룩하신 아버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 주셔서,

      우리가 하나인 것과 같이, 그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 주옵소서.”(11)

    “내가 그들과 함께 지내는 동안은,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지켜서 보호하였습니다.

      그러므로 그들 가운데는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멸망의 자식만 잃은 것은 성경 말씀을 이루시려는 것입니다.”(12, 표준새번역)

 

주님은 8절의 제자들을 내게 주신 아버지의 이름으로 그들을 보존하여 주시도록 아버지께 부탁드린다. 아버지 하나님을 높여드리는 주님의 낮아짐(자기 비하)을 만난다. 모든 영광을 하나님께!, 이를 주님이 친히 모범을 보이신다. 한편 주님은 8절 이후의 제자들의 모습, 그러니까 보혜사(保惠師) 성령님이 오신 이후의 사명자로서의 제자들을 기도로 품으신다: “하나가 되게 하옵소서!” 이 기도가 마쳐지면 제자들은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16.32a), 부활하사 승천하실 주님 앞에서도 여전히 주께서 이스라엘 나라를 회복하심이 이 때니이까.”(1.6b)에 관심이 있고, 또한 서로 누가 크냐?”(9.33- ) 때문에 미묘한 긴장이 아직 해소되지 않은 상황에서 한 지붕 12가족으로 살아간다면 8절 이후, 그러니까 시작될 사도행전의 미래는 암담할 수 밖에 없다.

여기 하나 된다는 것은 인위적이고 물리적인 의미가 아니다. 두 고양이의 꼬리를 서로 묶는다고 해서 하나가 되지 않는다. 또한 유니폼을 통일해 입는다고 하나가 아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됨은 영적인 연합이요 한 성령 안에서, 한 분 그리스도 안에서의 일치됨이다.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께서 하나이듯이 이처럼 제자들도 하나가 되어야만 위대한 계명’(13.34, 22.37-40)위대한 사명’(28.18-20)을 성취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됨을 허는 여우는 언제나 있는 법이다. 가룟 유다가 그랬다(12). 그는 멸망의 자식으로, 성경을 응하게 하는 자로 하나됨의 자리에서 깨어져 나간다. 비극이다. 그의 배반(13장에서 이미 살펴보았다)은 여기서는 생략하지만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자’(6,9)들은 한 사람도 멸망하지 않았다. 8절 안에 있는 자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지키시며, 보존하신다.

 

 

부스러기 묵상

 

주님의 기도는 깊고도 깊다.

주께서 이처럼 기도하신 이유가 내 귀에도 들린다: “내 기쁨이 그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이니다.”(13b). 제자들을 향한 끝없는 사랑의 열정이 기도의 향이 되어 내 심령의 창에 가득 채워진다. 슬픔이 변하여 기쁨이 되는 그날을 소망 가운데 약속하신 주님(16:16-24), 그걸 다시금 기도로 아뢰시는 주님(13)에게서 깊은 사랑을 본다: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b)

이 사랑을 받았으니 나 역시 사랑하며 살아야겠다. 중요한 것은 이 기쁨은 주님이 이루신 것이다(6.22)는 사실이다. 부활은 내 기쁨의 진정한 이유다. 이처럼 기쁨은 내가 이 땅에서 무엇인가를 통해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다. 주님도 기쁨을 제자들 안에 충만히 가지게 하려 함을 위해 기도해 주시고 계시지 않은가: “하늘의 기쁨 맛보려고 주께로 갑니다!”(찬송가 2723)

가볍게 뛰어 넘은 몇 구절이 아무래도 마음에 걸린다. 특히 그 중에 10절이다: “내가 그들로 말미암아 영광을 받았나이다.” 주님이 기대하시는 것은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어떤 유형적인 것이 아니다. 지금 제자들이 한 일이란 어떤 의미에서 1630, 그리고 176-8절이 증거하고 있는 것뿐이다. 하지만 제자들은 곧 다 각각 제 곳으로 흩어지고”(16.32a) 말 뿐이다. 그런데 이미 영광을 받았다고 하신다. 아직 제자들이 넘어야 할 산은 험난하기만 하다. 이 일은 이제 비로소 시작할 조그마한 준비가 되었을 뿐이다. 그것은 믿음이다.

그런데 주님은 이미 영광을 받으셨다고 말씀하신다. 그래서 믿음이 중요한 것 아닌가. 주님은 불완전하고 연약한 지금의 제자들이 아닌 믿음에 굳게 서서 세상을 이기신 주님의 뒤를 따라 주님의 영광의 깃발을 온누리에 펄럭이게 할 그날의 영광을 이미 보셨다. 이미 시작된 하나님의 나라(Kingdom of God)의 영광을 이처럼 기도하고 계신 것이다. 이미 영광을 받으셨다는 주님의 말씀과 기도가 무척이나 인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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