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3 맡음과 결산, 그 사이를 산다(마 25.14-30).

20190602(양무리교회)

 

 

 

맡음과 결산, 그 사이를 산다.

Matt. 25:14-30

  

 

    본문 관찰

 

    자기 소유를 맡김과 같으니 각각 그 재능대로 주고 떠났더니

    오랜 후에 그 종들의 주인이 돌아와 저희와 결산할새

    다섯 두 달란트 받았던 자는

       잘 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 내가 많은 것으로 네게 맡기리니

       네 주인의 즐거움에 참예할지어다

    한 달란트 받았던 자도

       악하고 게으른 종아

       그에게서 그 한 달란트를 빼앗아 열 달란트 가진 자에게 주어라

       그 있는 것까지 빼앗기리라

 

 

준비하는 자는 아름답다.

 

주인은 자기 소유(달란트)를 종들의 재능대로 각각 맡긴다.

보다 엄밀한 의미에서 볼 때 종들이 맡은 일들은 그들이 하겠다고 원해서, 선택해서, 또한 종들의 지정의(知情意)적인 결정이나 그들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다. 이것들은 모두 주인(하나님)께서 각각 그 재능대로”(능력대로, 15a) 맡긴 것들이다. , 주인으로부터 주어진 것이다. 그러나 종의 의사와 상관없이 주인의 주권에 따라 맡겨졌다고 해서 내 마음대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까지 허락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부분이 이 비유를 읽어내고 해석하는 중요한 착점이다.

 

 

주인 소유 vs 내 재능(능력, ability)

 

지금 내가 맡은 것은 하나님이 맡기신 것이다(14). 여기서 요청되는 것은 청지기자세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모든 것들은 -건강, 가정, 자녀, 직장, 생업, , 내 몸, 직분, 재능, 사명, 생명, 등등- 다 하나님께서 잠시나에게 맡긴 것에 불과하다. 주인은 내가 아니라 하나님이시다. 잠시, 정말 잠시 동안 임시로 맡은 것일 뿐이다.

사실 한 가지 고민스러운 것은 에 대한 청지기적 사명을 스스로 반납(포기)하는 것을 아직 누구에게서도 보지 못했다. 그런데 교회에서 맡긴 사명들에 대해서는 왜들 이처럼 쉽게 생각하고, 그것을 아주 자연스럽고 보란 듯이 던져버리는지 모르겠다. 나는 하나님의 거룩한 것을 맡은 선한 청지기인가. 이것은 내가 지금 맡은 달란트를 위해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 있느냐를 보면 답이 나온다.

한편 누구도 주인이 맡기신 달란트를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결정권까지를 맡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월권이며, 주인에 대한 도전이요 모독이다. 내가 포기하고 땅에 감추어 둔 그것만큼 나는 교만한 종이요!”라고 소리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처럼 살아가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고, 또 전혀 반성의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데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18,24-25).

하지만 하나님나의 재능대로”(능력대로, 15a) 맡기셨다. 그렇다면 내가 지금 감당하는 일은 그 만큼 재능을 인정받은 것이다. 그러므로 불평하고, 짜증내고, 수동적인 자세로 있으면 곤란하다. 따라서 감사하면서 맡기신 주인의 의도대로 달란트를 잘 관리하고 또한 충성된 종으로 언제나 서 있어야 한다. 이것이 내 재능을 인정해 주신, 그래서 달란트를 맡겨주신 주인에 대한 바른 태도다.

내 재능을 하나님이 먼저 인정해 주셨다. 하나님이 아셨다면 그것은 정확한 것이다. 그럼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못하고 다른 소리를 하고 있다면 그것만큼 불신앙이요, 교만인 셈이다. 하나님은 실수가 없으신 분이라는 것을 믿기에, 그렇다면 현재 내가 재능을 다 발휘하지 못하는 어떤 일들은 그것만큼 부끄러운 것이다. 사실 한 달란트를 맡은 자는 그것만큼의 재능이 있었고, 그렇기에 주인은 그에게 자신의 소유 가운데 1/8을 맡긴 것이다.

주인의 자기 소유는 총 8 달란트였다(15). 그런데 종들이 맡은 이후에는 그것이 15 달란트로 늘어났다(20,22,25). 결과적으로는 주인이 큰 이득을 얻게 된 것이다. 전체로 보면 만족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주인의 관심은 이런 것들에 있지 않았다. 주인의 관심은 총액에 있지 않았다. 주인(하나님)은 각자 한 사람에게 관심이 있으셨다. 물론 종 전체에게 모두 결산의 시간을 가졌다. 그럼에도 그 회계는 결국 각 개인에게 이루어졌다.

역시 교회라는 종들 전체에게 맡긴 달란트도 반드시 결산하실 것이다. 동시에 각각의 종들에게도 개인적인 결산이 반드시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교회(종들 전체)가 어떤 일들을 매우 아름답게 하고 있다는 것으로 대리 만족하고서, 그래서 각각의 종들이 나는 교회 다닌다!”는 우월감만을 앞세우고 있다면 그는 한 달란트 맡은 자의 아류인 셈이다.

한 달란트 맡은 종은 결코 핑계가 통하지 않는다. 그는 맡은 바 주인의 소유와 주인이 평가한 재능, 이 둘 모두를 철저히 거부했다. 따라서 주인이 한 달란트 맡은 종에게 심판의 선언을 하신 이유는 분명하다. 그는 주인을 위해 살지 않았다. 그도 주인이 먼 나라로 떠나 돌아오는 날까지 종이었다. 그러나 그 시간만큼을 허비하였으며, 자기 방식대로 살았고, 주인을 위해서는 철저하게 냉담했다.

그의 기준은 주인이 아니라 자신이었다. 이것이 그로 하여금 주인을 위해 사는 것을, 주인을 위해 작은 일에 충성하는 것을 포기하도록 만들어 버렸다. 자신이 누구인가를 망각했기 때문이다. 왜 한 달란트가 그대로 있었을까. 주인의 의도대로 움직이는 헌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이렇듯 아직 자아(Ego)가 펄펄 살아 있는 사람은 착하고 충성된 종이 될 가능성이 그것만큼 멀어 있는 자인 셈이다.

 

 

결산보고서(決算報告書)

 

    “보소서 내가 또 다섯() 달란트를 남겼나이다!”(20b,22b)

    “보소서 당신의 것을 받으셨나이다!”(25b)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다. 하나님은 신실하시기 때문에 말씀의 약속은 명백하게 지키신다. 최소한 1세기 바울이 살던 때보다 21세기가 주인이 다시 올 때가 더 가깝다. 달란트를 맡은 시간이 점점 늘어날수록 다섯()을 맡은 종은 장사를 하면서 그것이 여섯이 되고, 또 일곱이 되는, 말하자면 맡은 달란트가 점점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 내가 맡은 달란트는 어떠한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는가. 이 말은 꼭 양적인 증가만으로 제한되지 않는다. 주인이 내게 맡긴 것을 통해 기쁨(감사, 은혜, 축복, 헌신, 충성, 열심), 말하자면 이런 것들이 동시에 많아지고 있느냐를 생각해 본다. 내 삶의 평가는 바로 이러한 것들로 말미암아 하늘의 그래프(graph)에 기록되고 있다.

아직은 주인이 오지 않았다. 사실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그렇다면 주인이 아직 오지 않은 기간만큼이 남아 있는 시간이요, 또 기회다. 동시에 주인(하나님) 편에서 보자면 이 기간만큼이 참아 주고 계시는 사랑의 시간일 수 있다. 그러나 주인이 다시 오는 그 시간은 사랑이 곧바로 심판, 즉 공의의 집행이 시작되는 시간으로 바뀌고 만다.

이처럼 아직 주인이 오지 않는 시간마저도 이중 구조다. 그 결과가 사랑으로 끝날 것인가, 아니면 심판으로 끝날 것인가. 그 몫은 여전히 아직 오지 않는 시간 속에 맡겨져 있다. 바울은 종말을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이렇게 충고한다: “세월을 아끼라. 때가 악하니라.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5:16-17)

 

 

결산 그 이후

 

    “잘하였도다 착하고 충성된 종아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매!”(21b,23a)

    “악하고 게으른 종아!”(26a)

 

주인이 종들에게 달란트를 맡기고 떠날 때와 다시 돌아와 결산하는 때는 서로 연속적이다. 결코 단절되지 않는다. 하지만 달란트를 맡았다는 것이 자동적으로 주인의 즐거움에 참여하는 것을 보장하지는 못한다. ‘재능을 주인으로부터 인정 받았으나, 그 이후 그것을 주인의 의도와 목적대로 이어갈 수 없는 종의 문제는 고스란히 그대로 남는다는 얘기다. 이것은 달란트를 맡은 자로서 겁나는 대목이기도 하다. 달란트를 맡은 것만 가지고 우쭐거리다가는 마치 배짱이 신세가 되고 말 수 있기 때문이다.

여름은 노래하고 시원한 바람 곁에 있을 때이기도 하지만 겨울 동안 먹어야 할 양식을 준비해야 할 때이기도 하다. 내가 어떤 직분을 맡았다는 것은 대단히 영광스러운 일이고, 또 행복한 일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반드시 책임이 뒤따른다는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행동해야 한다. 오늘의 종됨이 내일의 종됨에까지 영향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맡은 달란트는 점점 확장되고 있는가, 아니면 그대로 인가. 그 이유는 무엇인가. 지금은 묻어 둔, 그래서 아무 변화가 없는, 그 결과 살아 있으나 실상은 죽어 있는 듯이 한 알 그대로 있는 달란트가 있다면 빨리 꺼내어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돌아가야 할 때다. 재능을 아셨고, 그래서 거기에 합당한 당신의 의지와 뜻을 담아 주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아직 주인이 오지 않았다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그래서 가능하면 빨리 서둘러서 인정된 재능을 열매로 나타내 보여야 한다(12:24).

종들에게 맡김은 주인이 언젠가 결산’(決算)하는 것과 서로 연속적이다. 어제 없는 오늘 없고, 오늘 없는 내일 없다. 어제는 내일을 비추어 주고, 내일은 어제의 정체를 들어낸다. 그 중간에 오늘이라는 시간이 주인으로부터 맡은 기간으로 주어져 있다. 주인의 오심(재림) 이후를 착하고 충성된 종으로 맞이하기 위해 오늘을 살아보자.

 

 

부스러기 묵상

 

천국은 이미 시작되었다.

예수님의 일생에서 다섯과 두 달란트를 맡은 종의 원형을 만난다. 이 땅에서의 낮아짐은 저 곳에서의 높아짐과 서로 연속적이었다. 주님은 아버지 하나님이 맡기신 십자가라는 달란트를 잘 감당하심으로써 부활의 아침에 잘하였도다!”는 영광에 참여하셨다. 바울의 [그리스도의 영광시](2:5-11)가 이를 잘 말해 준다.

이 땅과 저 곳이 만난다. 주인이 맡긴 달란트에 대한 종의 처신은 주인이 다시 온 이후의 자신을 결정한다. “맡김과 결산(決算)할새는 주님의 방법이다. 또한 착하고 충성된 종아! 악하고 게으른 종아!” 역시 주인의 평가다. 이 모든 것은 주인과 종의 관계에서 진행된다. 종은 주인이 돌아올 때까지 종에게 요구된 것이 있다. 바로 그 맡은 것을 위해 주인이 기대한 것은 최선이다. 최상이 아니었다.

내 마음대로 주인을 평가하고 생각해 버리는 것(24-25), 그래서 주인을 아는 지식에서 실패하면 인생이라는 농사에서도 흉년이 든다는 걸 잊지 말자. 내 생각대로 결정하는 것이 주인의 재능 인정을 거짓으로 만들었고, 그렇다면 주인의 판단과 결정이 잘못되었다는, 그럼 결국 다른 생각을 한 종의 판단이 옳았다는 이런 얘기가 된다는 것이 결정적이다. 그래서는 주인의 주되심과 전능하심과 하나님되심이 허물어지니까 말이다.

나는 종이다. 주인이 나의 재능(ability)을 보시고 거기에 맞는 달란트를 맡기셨다는 게 얼마나 큰 은혜요 감격스러운 일인가. 맡긴 분이 나를 가장 알아서 내 재능(능력, ability)을 따라 거기에 꼭 맞게 맡기셨으니까 많고 적게 맡은 게 아무런 의미가 없다. 문제는 종()인 나다. 주인이 올 날이 점점 가까이 오고 있다. 그분 앞에 설 나의 모습을 생각해 보는 아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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