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 시작된 종말: 마지막에 될 일들(마 24.1-28)

20230305(양무리교회)

  

 

 

시작된 종말: 마지막에 될 일들

Matt. 24.1-28

  

 

    본문 관찰

 

    성전 파괴에 대한 예언(1-2,15-28)

    제자들의 질문(3)

    종말론적 사건들(4-14)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4-5)

       난리와 기근과 지진이 있으리니(6-8)            종말1

       사람들이 너희를 환난에 넘겨주겠으며(9-12)  --------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         종말2

    이 천국 복음이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

  

 

마지막에 될 일들

 

잘 알려진 예수님의 [감람산 설교]가 이어진다(24-25).

주제는 이 세상의 마지막에 도래할 심판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이것이다: ‘종말은 이미 시작되었다.’ 소위 신학적으로는 이를 <시작된 종말론>이라 부른다. 그러니까 종말은 오늘과 전혀 상관없는 외딴섬과 같은 저 미래에 오는 어떤 날이 아니라 오늘의 연속으로 이어지는 내일, 오늘을 뿌려 얻은 결과로서의 내일을 뜻한다. 그래서 오늘과 연결하지 않으면 도대체 이해하고 느끼고 알 수 없는 그런 내일이다. 때문에 종말이라는 말 자체가 저 미래를 바라보게 하지만, 그러나 오늘을 보면 내일이 보이는 게 주님이 말씀하신 종말이다.

한편 제자들의 질문에 대한 예수님의 대답 형식으로 된 24장은 크게 세 부분으로 되어 있다. 첫째,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c)에 대해서는 4-14절에서 다룬다. 둘째, 성전 파괴가 어느 때에 있겠사오며”(3a)에 대해서는 15-28절에서 다룬다. 셋째, “주의 임하심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b)에 대해서는 29-51절에서 다룬다. 정리하면 오늘은 첫째와 둘째를 다루고, 이어서 다음에 셋째를 나누기로 하겠다.

 

 

성전주의라는 환상(1-2)

이스라엘의 미래(15-28): 성전 파괴가 어느 때에 있겠사오며”(3a)

 

    ■ 사도행전 때에 종말론적인 산통은 이미 일어나고 있다.

    → 거짓 예언자: 드다(5.36), 마술사 시몬(8.9-10), 바예수(13.6- ), 애굽인(21.38),

    → 예언자 아가보(11.28)

 

예루살렘에 대한 주님의 예언(23.37-39)이 선포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제자들은 이것을 자기 방식대로 들었다. 그래서 감람산으로 가는 길에서 제자들이 예수님께 저 멀리 보이는 예루살렘 성전을 가리키며 좀 보시라고 권한 것일까(1): ‘저렇게 웅장하고 견고한 성전이 무너져 황폐하여 버려지게 된다구요?’ 제자들은 성전만 있으면 희망이라 생각하고 여전히 믿는 눈치다. 제자들은 겉만 화려하게 남아있는 성전에 희망의 눈길을 주고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예수님의 말씀에 따르면 이것은 바른 시각이거나 이해가 아니다.

그래서 그럴까, 주님의 말씀은 단호하다(2). 구약적 개념의 성전은 이제 끝났다 하신다. 더 이상 기대할 아무런 가치가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무너지는 것 밖에는 더 이상 할 일이 없다. 다니엘의 예언처럼 멸망의 가증한 것’(15, 9.27, 11.31; 21.20-21)이 거룩한 곳에 세워지는 사건이 성취되는 때에 -안티오쿠스 에피파네스가 BC 67년 무렵 예루살렘 성전을 유린한 사건이다.- 전무후무(前無後無)한 환난이 있을 것이다(21). 결국 죄의 값대로 집행하신다면 모두가 멸망할 환난일 것인데 택하신 자들을 위해 감()하실 것이라 하신다(22).

그렇다면 예수님이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던 성전을 포기하면서까지 얻고자 한 것은 무엇일까. 사실 어찌 보면 무너져야 세운다: “이 성전을 헐라 내가 사흘 동안에 일으키리라.”(2.19) 예수님 자신이 성전이시며(1.14a, 2.21), 따라서 이제는 예수님을 통해서 하나님께 이르게 된다는 점에서 성전에 대한 율법을 완성한 복음을 말씀하고 계신다. 하지만 그것이 이루어지는, 마지막에 될 일들의 상황은 예사롭지 않다.

 

 

종말을 알리는 산통(産痛, 4-14): 세상 끝에는 무슨 징조가 있사오리이까.”(3c)

 

먼저 종말은 어느 날 갑자기, 아무도 알 수 없도록 은밀하고 비밀하게, 또한 이미 온 후에야 비로소 그것이 왔음을 알게 되는 것이 아니다. 마치 출산을 앞둔 산모에게 산통이 시작되면 이제 곧 새생명이 태어날 것을 알게 되는 것에 비유할 수 있다. 이런 종말론적 산통(4-13)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14)는 말씀이 성취되는 그날까지 계속될 것이다.

또한 동시에 천국이 도래하는 종말론적 시간이 다 차기까지 이 세상은 온통 고난이라는 이름의 산통(환난)을 혹독하게 치르게 된다. 이렇듯 시작된 종말 역시 고난 없이 영광 없다. 이것은 종말이라는 시간표에 들어있는 역설이다. 바로 이 종말의 때에는 언제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속이는 사람이 있다(4-5,11). 가짜가 진짜 행세를 하는 일은 천국(종말)이 오고 있는 이 급박한 시기에도 그치지 않는다. 바로 여기에 그 심각성이 있다.

뿐만 아니라 난리와 전쟁과 기근과 지진은 재난의 시작이지 그것이 곧 종말은 아니다(6-8). 이것들은 종말을 알리는 하나의 사인(sign)과 같은 산통(産痛)이다. 하지만 더 심각하고 결정적인 것은 이런 환난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믿음에서 떠나 서로 배반하고 서로 미워하며(10), 또한 세상은 불법이 성하므로 사람들의 마음 속에서 따뜻한 사랑을 찾아 볼 수 없게 될 것이다는 점이다(12).

이처럼 종말론적 환난은 필연적으로 사람들의 마음을 쑥대밭으로 만들어 버린다. 불신의 골은 더 깊어지고, 환난의 고통은 더 가중되고, 급기야 믿음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들로 변해가는 세상, 이게 산고처럼 고통스러운 종말이다. 하지만 산모야 태어날 아기 때문에 희망이라도 있지만 종말 앞에 떳떳하게 설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은 종말 이전과 이후라는 이중 고통이 휘몰아치게 될 것이다.

그렇지만 시작된 종말은 이것이 전부인가. 아니다. 모두가 다 이처럼 절망의 나락으로 추락하는 것은 아니다. 이런 총체적 난국에서도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 약속이 있다는 점에서 그렇다. 그렇다. 인내는 신뢰와 믿음의 기초 위에 세워지는 집이다. 이런 환난과 고통 속에서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다면 끊임없이 계속되는 종말론적 사건들을 이겨낼 수 없다.

 

 

부스러기 묵상

 

    “아침에 하늘이 붉고 흐리면 오늘은 날이 궂겠다 하나니

      너희가 날씨는 분별할 줄 알면서

      시대의 표적은 분별할 수 없느냐.”(16.3)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13)

끝까지 견디는 자로 종말론적 고난(4-12)을 통과하여 구원의 은총을 받게 되려면 핍박을 이기며 사는 것은 필연적이다. 예수를 믿고 산다고 해서 고난이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잠시 미풍(微風)처럼 슬쩍 왔다 가는 그런 것은 없다. 미움을 받는 것은 기본이고 죽음의 자리에까지 밀려가는 게 종말을 사는 성도의 모습이다(9).

종말론적 징후들이 모두 활개를 치고 있는 때에, 나는 과연 어떤 모습으로 마지막 때를 맞고 있는 것일까. 세상 끝에 시작될 영원한 안식과 평강을 위해 지금 잠시 지불하고 있는 산고인가. 아니면 거짓 복음에 그만 흔들리며 나부끼는 쭉정이로서 당하는 환난인가. 마지막에 될 일들이 이미 시작된 종말의 때를 살아가는 성도로서 우리 자신을 돌아본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거짓 그리스도와 거짓 선지자들에 의해 파멸(파산, 멸망)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결국 신앙이란 언제나 순풍에 돛단배처럼 그렇게만 진행되는 게 아니다. 성경은 세상 끝의 모습을 유토피아(무릉도원)로 그리지 않는다. 그럼 무엇인가. 인정하기 싫지만 바로 환난이다.

하지만 바로 이 환난이라는 세상 속을 뚫고 들어가는 하나의 빛이 있는데 그것이 바로 천국 복음이다(14). 주님은 세상이 아무리 파멸의 구렁텅이로 추락해 갈지라도 이 세상을 치료하고 새롭게 하는 유일한 길은 오직 천국 복음이라 하신다. 이것을 성취하시기 위해 지금 자신이 먼저 고난과 환난 속으로 침노해 들어가신다. 따라서 종말은 환난이라는 고난과 고통이지만 그러나 복음은 이것을 넘어서는 희망이고 승리다.

그렇다면 이제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차례다. 이렇듯 총체적인 절망 가운데 있는 이 세대를 향해 나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를 위해 무엇을 준비하는 삶을 살고 있는가. 변하는 세상에 불변하는 진리를 전파하면서 이 세상이 만들어내는 파도에 휩쓸려 내려가지 않기 위해 우리가 지불해야 할 대가는 무엇인가.

우리는 지금 비록 절망의 세대를 따라 살고 있지만, 그럼에도 복음과 함께 희망의 땅으로 이동 중이다. 환난이지만 그러나 주님이 말씀하시는 복음으로 세상 끝을 볼 수 있음이 얼마나 감사하고 다행스러운 일인가. 시작된 종말이 누군가에게는 파멸과 심판이다. 하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에게는 구원이고 천국이다. 이것이 시작된 종말이 보여주는 신비한 그림이다. 놀라는 것은 이 시작된 종말은 이처럼 복음의 빛에 의해서만 듣고 볼 수 있다. 이것이 오늘 우리가 들어야 할 종말의 복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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