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 바리새주의(1) - 행위는 본받지 말라!(마 23.1-12)

20230226(양무리교회)

 

 

 

바리새주의(1) - 행위는 본받지 말라!

Matt. 23.1-12

    

     

    본문 관찰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2-7) - A

    모세의 자리에 앉았으니

    말하는 바는 행하고 지키되 저희의 하는 행위는 본받지 말라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

    무리와 제자들(1,8-12) - B

    랍비라 칭함을 받지 말라

    땅에 있는 자를 아비라 하지 말라

    지도자라 칭함을 받지 말라

    너희 중에 큰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

 

 

    ■ 유대 종교 지도자들, 예수님을 시험하다.

    [1] 정결 논쟁: 세리 마태의 집에서 함께 식사(9.9-13)

    [2] 귀신 논쟁: 귀신 들려 눈 멀고 말 못하는 사람을 치유(12.22-37)

    [3] 전통 논쟁: 제자들이 식사 때 손 씻지 않음은 장로들의 전통 위배(15.1-20)

    [4] 세금 논쟁: 유대의 로마에 대한 세금 납부(22.15-22).

    [5] 부활 논쟁: 성경과 부활과 하나님에 대한 조롱과 모욕(22.23-33)

        → 예수께서 사두개인들을 압도하셨다는 말을 들은 바리새인들이,

                힘을 모아 공격에 나섰다.”(34, The Message):

        → 이에 예수께서 무리와 제자들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1)

 

이제 바리새인들에 대해 뭔가 매듭을 지어야 할 때가 되었다.

마태는 주님 곁을 밀물과 썰물처럼 오갔던 저들의 언행(言行)을 이곳저곳 현장들에서 때마다 비교적 소상히 소개했다.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4.17)는 하나님의 나라의 복음 전파를 시작으로, 이어지는 산상수훈(5-7)의 메시지가 전해지자 마자 어떤 서기관들을 시작으로 악한 생각을 마음에 품기 시작한다: “이 사람이 신성을 모독하도다.”(8.3) 이는 중풍병자에게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2b)는 사죄의 선언이 있은 후였다. 이처럼 그럴 때마다 유대주의자 혹은 유대교의 부끄러운 실상이 노출되곤 하였다([1]-[5]).

때문에 마태는 주님께서 저들에게 하신 말씀들(A)을 다시 정리하듯 회상함으로써 진짜 하시고자 한 말씀(B), 곧 유대주의 전통들과 섞일 수 없는, 그리고 타협할 수 없는 바른 복음에 대한 교회론적 입장을 분명하게 말씀하신다. 바리새인들의 전통과 유전은 다른 복음이다. 따라서 어느 때보다 십자가 복음의 순수성과 순결성을 지켜야 할 때였다. 이것이 저들의 결점(약점)을 하나 둘 살피는 이유이다(A). 이를 통해 제자들의 삶이 어떠해야 하는가를 생각하게 만든다(B).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1-7) - A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주님으로부터 평가, 곧 심판을 받게 되어 있다. 먼저 A를 향한다. 중요한 것은, 그러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A)에게 무엇을 주의해야 하는가이다. 이것은 곧 이어서 나(B)에 대한 평가를 하기 위해서다. 그렇다면 바리새인들이 심판 받을 실상은 무엇인가. 저들은 모세의 자리에 올라 앉아서 율법을 가르치고 있다는 게 주님의 첫 번 진단이다. 겉은 모세의 자리이고, 그리고 율법을 말하는 것까지는 좋다. 하지만 속은 모세를 닮지 못했고, 무엇보다 행실은 그야말로 본받을 게 하나도 없다.

심각한 언행불일치(言行不一致). 소위 율법을 가르친다는 자들이 그것을 남의 어깨에는 무거운 짐이 되도록 하지만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러 들지 않는다(4). 그러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모든 행위를 사람에게 보이고자 하여그럴 듯 한 허세와 위선으로 연출까지 한다(5). 율법을 통해 자신을 보는 일에 실패한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신앙이 없으니 하나님은 물론이고 자신의 실상이 보일 수 없다.

여기에 명예욕까지 있으니 가관이다(6-7). 이렇게 살라고 모세의 자리에서 율법을 가르치도록 하신 게 아닌데 . 인간이 종교의 이름으로 얼마나 타락하고 또 무너질 수 있는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하지만 저들이라고 처음부터 이러고 싶었을까. 아니었을 것이다. 우쭐하다가, 사람들이 높여주고 존경해 주니까, 자기 스스로 자신의 점수를 높이 잡는 어리석음을 범하면서 서서히 침몰하여 여기까지 왔을 것이다.

 

 

무리와 제자들(8-12) - B

 

    “너희 선생은 하나이요 너희는 다 형제니라.”(8b)

    “너희 아버지는 하나이시니 곧 하늘에 계신 자시니라.”(9b)

    “너희 지도자는 하나이니 곧 그리스도니라.”(10b)

 

그렇다면 제자들(‘’, B)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 ‘그러나’(8- )로 이어지는 말씀이 그 답이다. 그러니까 심판과 정죄 아래에 있는 바리새인들(A)과는 다르게이다. 하나님의 권위를 위임받은 청지기 직분임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처럼 행세하려고 하는 것, 이것이 바리새주의로 가는 단초가 된다는 것을 잊지 않아야 한다.

비록 맡은 바 역할이 선생(아버지, 지도자)일지라도 다른 형제 위에 군림하는, 거들먹거리는, 명령하고 휘두르는 자리는 아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로서 아버지는 하나님 한 분이시며 이제 모두가 다 하나님을 아버지라 불러야 한다. 우리의 지도자 되시는 예수님 안에서 모든 사람은 다 동등한 형제요 자매들이다. 이것이 주님이 의도하신 교회의 모습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모시고, 그리고 사람은 마땅히 하나님을 높이고 섬기는 것으로 건강하게 살아가려면 한 가지 더 요구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섬기는 자로서 진정한 선생이시며 아버지이시며 지도자이신 하나님과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이다. 섬김은 만이 아니라 아래에도 그대로 유효하다. 이것만이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처럼 살지 않을 수 있는 길이다.

 

 

부스러기 묵상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의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보다 더 낫지 못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5.20)

 

바리새인들을 보면서 사실은 걱정이 앞선다.

주께서 나에게 너도 바리새인들처럼 말은 잘하는 것 같은데, 그래서 말인데 너에게서 쓸 만 한 것은 단지 말뿐이구나!”라고 하시지 않을까 해서다. 결국 말만 하는 도구(기계)로 살다가 바리새인들처럼 행위는 아무런 영향력도 거두는 것도 없이 바닥난 채로 끝나버린다면 이건 비극 중의 비극이다. 바리새인들을 향한 옐로우 카드가 나를 향할 수 있다는 점에서다.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처럼 그러나 너희는 섬기는 자가 되어야 하리라!”(8-11)는 말씀이 이루어져야 한다. 때문에 하나님 앞에서 사는 일에 실패하지 않기 위해 경건의 끈을, 섬기며 사는 행실의 끈을 촘촘하게 묶어야겠다. 사람들이 보는 것은 우선적이지 않으며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것은 주님께서 나를 보시는 대목이다.

이 땅에서의 나의 언행과 모습이 기록되고 있는 [나의 인생보고서]는 어떤 것들로 채워지고 있을까. 나의 삶의 질()로 평가 받는 것 밖에는 다른 길이 없다. 거기에 걸맞은 행위라는 삶의 내용이 동반되지 않으면 다 소용이 없다. 바리새인 꼴 나지 않기 위해, 나중에 슬피 울며 이를 가는 돌이킬 수 없는 후회나 하고 있지 않으려면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신앙하는 삶이라는 게 섬기는 낮추는 자”(11-12)로 살자고 다짐하고, 그리고 힘차게 구호를 외치기만 하면 그게 기다렸다는 듯이 자동적으로 함께 따라오는 것이라면 얼마나 쉽겠는가. 따라서 내가 말한다고 해서 그대로 내가 행하는 자리에 서는 것이 아니라면, 그래서 말만 하고 행하지 아니하며”(3b)라는 부끄러운 훈장을 달지 않으려면 언행일치(言行一致)라는 균형잡힌 신앙을 향해 좀 더 애쓰고 땀흘려야 한다.

까딱 중심을 잃고 머뭇머뭇거리다가는 점차 주님과 멀어질 수 밖에 없는, 그리하여 결국 현대판 바리새주의자로 전락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돌이킬 수 없는 추운 겨울에, 지난 여름이나 추억하며 후회하는 그런 동화의 주인공(베짱이)처럼은 살지 말자. 어느덧 본향 가는 길이 어제보다는 한 걸음은 좀 더 가까워졌다. 그렇다면 이제는 지나온 날들보다는 앞으로 밟고 살아야 할 시간들 안에 주님 인정하시는 언행(言行)을 채워야 할 때다. 나를 향한 주님의 평가가 바리새인들에게 그러셨던 것처럼 결국 돌이킬 수 없이 결정되어 버리기 전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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